posted by cimple 2012. 10. 31. 16:12

 



엄재경 해설이 오늘 (날짜로는 어제군요) 강의를 오셨습니다. 3년의 대학원 생활 동안 많은 세미나 연사분들이 계셨지만, 이렇게 설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린 세미나는 처음이었고, 또한 이렇게 즐겁고 많이 웃었던 세미나도 처음이었던 것 같네요.

이제 제 나이도 서른줄이지만, 20대시절 열광했던 그 역사의 산실을 만들어온 주인공을 직접 만나뵌다는 것은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어요. 

다른 세미나 연사분들과는 달리,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한 장 없이 강의만으로 두시간 가까운 세미나를 순식간에 지나가게끔 만드신 타고난 만담꾼, 엄재경 해설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전해 볼까 합니다.


스토리작가 엄재경, 그리고 스타리그의 시작. 

세미나 자리에는 저와 같은 스덕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계셨으므로, 엄재경 해설은 먼저 만화 스토리 작가로 이 문화산업계에 처음 발을 들여 놓으시던 시절 이야기로 강의를 시작하셨어요. 엄재경 해설도 군대 제대하고, 복학하고 뭘 해야 하지 고민하는 흔한 청년들의 고민을 함께하던 시절이 있으셨답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노가다도 해 보시는 등 전전긍긍하다가, 당시 친구였던 만화작가 이충호님과 뜻이 맞아 만화의 스토리를 쓰는 스토리작가 일을 하셨다고 해요. 그때 만드신 작품이 당시 소년만화 보신 분들이라면 아실 "마이러브", 그리고 "까꿍" 이었죠. 놀랐던 것은 그 와중에 부모님의 걱정으로 잠시 대기업(!)인 LG 에 입사하신 적도 있으셨다고 해요. 그런데 회사 연수 다 받고 발령 3주만에 사표(;;)를 미련없이 쓰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하고싶어서 이 만화일을 하는 것이다 라는 것을 부모님께 보여드렸다는 것에 만족하셨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당시에 이충호님 말고도 스토리작업을 함께 하셨던 작품이 '초시공전사 넥스트' (제목만 들으면 응? 했는데 찾아보니 알겠더군요) 였는데, 이 작품이 잠깐은 드래곤볼을 제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엄재경 작가님이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 소년 만화의 암묵적인 룰을 깨고, 당시 꽤나 인기 있었던 캐릭터를 죽였다고 하셨어요. 그러자 갑자기 만화의 인기도가 폭락(...), 그때 엄재경 해설은 어떤 마음가짐을 배우셨다고 해요. 대중을 위한, 대중이 좋아하는, 대중이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어야겠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마인드는 지금의 해설을 하는데까지 일관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스타리그의 탄생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주셨습니다. 스덕들이라면 아마 대충은 알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만화 '까꿍' 을 게임화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한데 모여서 밤새 토론한 것이 스타 이야기였다는 것, 그리고 그 때 만났던 분이 바로 지금의 온게임넷 본부장인, 당시 투니버스의 '게임플러스' PD 였던 황형준 PD 였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부터 '스타를 스포츠처럼 중계해보자' 라는 재미있는 도전이 일어났고, 탁구대에서 시작한 투니버스의 스타 중계가 99 PKO 로, 온게임넷으로, 그리고 스타리그의 전설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 황형준 PD가 참 도전적인 일을 많이 했다고 회고하셨어요. 특히 그때만 해도 네트워크 상태가 불안정하던 시절이어서 방송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99년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99 PKO 결승전 생중계를 강행했다고 합니다. 이때 소위 대박을 터뜨렸고, 온게임넷이 개국되고 지금의 E-sports 가 자리잡는 데 많은 역할을 했었다고 하네요.



새로운 세대, 새로운 문화 컨텐츠, 그리고 게임. 

엄재경 해설은 스타리그와 E-sports 에 대해서 평가하시면서, 일단 순수한 목적으로 자생적으로 커져 나간 풀뿌리 문화라는 사실을 먼저 꼽으셨어요. (특정 스포츠가 언급되어 죄송하지만) 전두환 정부 시절 3S 정책으로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야구와는 달리, E-sports 는 정말로 그것을 좋아하는 몇몇의 사람들이 시발점이 되어, 게임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많은 게이머들이 끊임없은 노력과 의지로 그것을 건전한 문화로 정착시켰다는 것이죠. 

또한, 게임과 E-sports 가 한국이 IT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데 큰 밑바탕을 마련했다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IT 강국이라는 것에 대해 분분한 의견은 있을 수 있지만, 엄재경 해설은 일본의 문화산업, 일본인의 국민성에 대해서 언급하셨어요. 일본인은 개인주의적이고,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기 때문에, 게임 패키지를 하나 사거나 만화책을 하나 사면 그것은 자신의 소유, 그리고 남에게 빌려달라거나 빌려주지 않는 문화라고 합니다. 반면 한국은 우루루 몰려다니며 무엇을 하기 좋아하는 문화라, 패키지 게임이나 단행본 만화가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라고 하셨어요. 

이러한 이유로, 최근의 일본은 나라 전체가 약간 쇄국에 가까운 이미지라고 덧붙이시며, 여전히 출판 종이만화, 그리고 콘솔게임이 고고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반면 한국은 빠르게 출판만화 시장이 해체되었지만, 대신 모두가 함께 볼 수 있는 웹툰이라는 새로운 컨텐츠가 그 자리를 대신하였고, 패키지 게임 대신 MMORPG 가 흥행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죠. 물론 장단점은 있지만, 엄재경 해설은 새로운 세대, 그리고 새로운 방식의 문화컨텐츠의 소비 방식에 있어서, 한국은 좀더 빠르게 그러한 흐름에 적응하고 있는 것 같다고 평가하셨어요. 그리고 그 원인중 하나는, 함께 게임을 보고, 함께 즐기고, 그것으로 서로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E-sports 가 끼친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이죠. 

때문에 게임과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에 대한 편견없는 시각이 필요하고, 새로운 세대에 발빠르고 능동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항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강의를 마무리하셨습니다. 



질문과 답변 

사실 위에서 언급한 좀 딱딱한 이야기들 말고, 청중이 모두 함께 빵 터지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이야기들을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글로 옮기려니 영 재주가 없네요. 하긴 그 만담을 어떻게 글로 옮기겠습니까.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려서, 공교롭게도 제가 유일하게 엄재경 해설에게 질문을 한 질문자가 되었어요. 그래서 꼭 하고 싶었더 질문이 있어서 드렸는데,

"엄재경 해설님의 별명은 기적의 포장가, 엄대엄, 뭐 이런 별명이 있으신데, 이런 것들은 항상 어떤 스토리텔링을 하려고 하신다고 말할 수 있을것 같아요. 어떻게 그런 스토리들을 준비하고, 만들어 내시는지요?"

라는 질문이었죠. 엄재경 해설이 껄껄 웃으면서, 그런데 굉장히 구체적으로 답변해 주셨습니다.

일단 '기적의 포장가' 부분에 대해서, 엄재경 해설은 현재의 시대가 '스토리의 시대에서 캐릭터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는 약간 의외의 말씀을 해 주셨어요. 즉 스토리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진부하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를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뻔한 이야기를 엄청 좋아한다, 라고 하시며, 같은 이야기지만 어떤 캐릭터이냐가 지금은 더욱 중요하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예로 드신 것은 락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저는 락 음악은 잘 모르고, 결론은 노래에서도 내러티브보다 캐릭터가 중요하다, 는 말씀이셨죠. (저는 "투헤븐" 과 "강남스타일" 의 차이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스타리그에서도 각 선수들이 어떤 캐릭터를 가지고 있냐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키셨고, 결국 하나의 스타리그는 이 캐릭터와 캐릭터들이 서로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하나의 컨텐츠가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올림푸스의 서지훈, 인크루트의 송병구처럼 한 시즌의 스타리그 전체가 그 캐릭터로 기억된다, 라고 멋지게 말씀해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엄대엄 부분에 대해서는 먼저 자신이 게임해설가를 하시면서 멘토가 되는 분이 누구였나를 말씀해 주셨어요. 게임해설가는 정말 엄재경 해설이 월드 퍼스트였기 때문에 (월드 베스트는 아니어도, 월드 퍼스트는 이견이 없다고 하시며) 누구를 참고할 만한 사람이 없고, 엄재경 해설은 하일성 해설위원을 멘토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일성 해설위원이 어떻게 해설이 되셨는지, 그리고 왜 인기가 있었는지 말씀해 주셨어요. 이런 거죠. 9회말 8:0 상황에서, "지금 이 팀이 한점을 내느냐가 앞으로 3연전에 영향을 줄수 있거든요?" 라고 말씀하신다는 거에요. 즉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현재의 승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엄재경 해설이 배운 해설자의 역할이었다, 5:5의 비밀이다, 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렇게 일단 강의가 끝나고, 이후에 함께 피자를 먹으면서 싸인도 받고, 조금 더 엄해설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해설 포지셔닝에 대한 생각은 명확하시더라고요. 자신의 게임 상황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예측하며 분석하는 해설을 하기 어렵다는 것은 프로게이머 출신 해설자들이 하나 둘 씩 해설을 하게 되면서 정확하게 아셨다고 합니다. 결국,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엄재경 해설은 대중을 즐겁게 하고,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는 해설을 해야 하겠구나, 그것이 나의 역할이구나 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스타 2에서는 그게 더욱더 힘들어졌다고 하십니다. 엄재경 해설은 스타 1은 권투에, 스타 2는 유도에 비유하셨어요. 서로 좀 치고박고 그러면 코피 터지고 피멍들고 그렇게 유불리를 알 수가 있는 것이 스타 1인데, 깃싸움 신나게 하다가 업어치기 한판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스타 2라는 것이죠. 게임의 스타일과 양상이 다른데, 사람들은 스타 1의 해설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것이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리고 좀 조심스러운 질문일 수도 있는데, 제가 "리그오브레전드가 대세가 될 것을 모르시지 않으셨을 듯 한데, 왜 리그오브레전드 해설을 하지 않으시고 스타2 해설을 하시게 되셨냐" 라고 질문드렸어요. 사실 지금의 대세가 롤이 될 것도 알고 계셨고, 스타 2가 고전중이라는 것은 엄재경 해설이 가장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우니까, 그렇게 힘드니까, 바로 엄재경이어야만 한다는 온게임넷의 요청, 그리고 스타리그를 지켜야겠다는 본인의 결심이 있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두 해설을 병행하는 것은 온게임넷 방침으로 안 되었고, 엄재경 해설은 힘든 항해일지언정 스타2라는 배를 선택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블리자드 코리아 측에서도 현실을 잘 알고 있고, 군단의 심장에서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귀띔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참 짧지만 소중했던 세미나가 끝나고, 감사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엄재경 해설님과 헤어졌습니다. 정말 세미나 시간 내내 웃고 공감하며 즐거웠던 세미나 시간이었고, 또한 유익한 정보와 생각할 거리도 많았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E-sports 의 중흥의 역사를 만들어 오시고, 산 증인이신 엄재경 해설님, 누군가에게 가슴 뜨겁게 벅차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지금도 고민하시고 노력하시는 엄재경 해설님, 앞으로도 더욱 훌륭한 해설가로, 또 컨텐츠 제작자로, 오래도록 그 열정을 우리에게 전해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강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