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13. 4. 25. 19:17

이 리뷰 보셔도 사실 상관없어요 - 아이언맨3 리뷰




...라고 제목에 적었지만 다량의 미리니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미리니름에 방해받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버튼을 눌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영화 개봉일에 리뷰를 쓴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닙니다.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요. 쓰는 입장에서 영화 리뷰란 영화를 보고 난 감상을 나누며 공감하는 목적이 클 터인데, 사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별로 읽고 싶지가 않을테고 공감이고 뭐고 없겠죠. 읽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개봉일에 리뷰라니, 먼저 봤다고 유세하는건가 뭔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좀 꺼려지기는 한데, 그렇다고 굳이 미루어 리뷰를 쓸 만한 작품까지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나름 기대한 작품을 밋밋하게 넘어가 버리기도 아쉽고 하여 짧은 리뷰를 작성해 보려고 해요.


제목에도 썼지만, 리뷰 읽고 보더라도 별 상관은 없는 영화였으니까요.






영웅의 고뇌는 없었다


사실 예고편의 이미지들에서 아이언맨3 에서는 아이언맨의 영웅으로서의 고뇌, 어두운 면을 다루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그런건 없어요. 뉴욕에서의 외계인 침공 사건 이후로(어벤져스가 출동했던 그 사건입니다. 어벤져스를 안보신 분들을 위해...) 내 힘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는 정신적 압박에 시달린다는 '설정' 은 있지만, 그것이 왜 아이언맨에게 그토록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그것이 대체 어떤 의미였는지 설명도 없고 공감도 없습니다. 단지 뭐 그게 힘들었나보다 하는거죠. 더군다나 이러한 갈등과 메인 빌런인 '만다린' 과의 갈등은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습니다. 만다린도 그런 트라우마 따위 일절 관심도 없고요. 이 영화에서 '아이언맨의 고뇌'란, 그냥 나쁜 악당 때려잡는 데 가끔씩 발작일으키는 질환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사실 제가 원했던 드라마는 없었습니다. 홀로 떨어진 곳에서 소년과 교감하며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모습에서 그것을 발견했어야 했는데, 그래야만 했던 이유도 잘 모르겠거든요.






빌런은 몹시도 실망스럽다


사실 저는 영화보기 전에 이런 저런 정보를 많이 찾아보고 보는 타입은 아니어서(오히려 몰입이나 감상에 방해가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아이언맨3 의 메인 빌런인 만다린에 대해서는 잘 알고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원작에서 대단히 강력한 빌런으로 등장한다고 하더군요. 때문에 사실 많은 분들이 이 메인 빌런에 대해서도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것도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빌런 기대하셨던 분들은 크나큰 실망을 하셨을 수 밖에 없었을 같네요. 오래전 아이언맨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복수를 꿈꾸고 빌런이 되었다는 좀 지나치게 흔한 설정에, 세계를 정복하고 돈과 권력을 손에 넣기를 원하는 다소 유치하다싶은 야망, 그리고 누구나 쉽게 예상할만한 허수아비를 세워두었다는 클래식한 전개까지. 아이언맨 슈트를 두부자르듯 잘라내는 그의 피지컬은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지만, '그릇된 욕망으로 만들어진 일그러진 과학의 산물' 로서 그 빌런은 그저 적당한 액션씬 제조의 대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외에도 억지로 쑤셔넣은 서비스컷이라는 생각을 지울수없는 흐콰한 페퍼포츠의 액션, 뜬금없이 총맞아 사망하는 옛 연인 과학자 '마야', 비중있는듯 등장하다가 폭탄테러맞고 영화내내 누워있던 경호원 '해피' 까지, 떡밥회수 및 극중진행에 있어 탐탁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인상깊은 장면들


혹평만 내리자니 훌륭한 장면 언급을 좀 해야겠네요. 다양한 아이언맨 슈트들이 등장해서 적과 싸우는 모습은 분명 눈여겨볼 명장면이었지만, 저는 영웅이 여럿으로 나뉘어지는 것 같아 그것도 좀 별로더라고요. 오히려 에어포스원이 추락할때 비행기에서 날아간 사람들을 한꺼번에 구해내는 장면이 진짜 영웅다운 멋진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 딱히 인상깊은 액션씬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게 사라져간 빌런 만다린으로부터 후속작의 느낌을 좀 받긴 했습니다. 아마 어벤져스에 대항해서 레드스컬, 로키, 어보미네이션 등과 함께 빌런 팀을 꾸려주지는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와 함께요. (극 초반에 중국인 박사라는 사람이 아주 잠깐 등장하는데 '닥터 우' 라는 또 다른 빌런이라고 하네요. 아이언맨 중국판에서는 좀더 다른 컷이 있다고 하는데;)






아이언맨의 끝


헐리우드에서 시리즈의 3편은 그 시리즈의 종결을 의미하는 경우가 꽤 됩니다. 스파이더맨, 캐리비언의 해적 등은 3편 이후 리붓되었고, 트랜스포머나 배트맨 등은 3부작으로 종결되었죠. 영화를 보고 나서, 아이언맨 하나로 나오는 시리즈는 사실상 종결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슈트들을 폭파시킨 다음, 그토록 그를 괴롭히던 심장의 파편들을 끄집어 내고, '토니 스타크는 돌아온다' 라는 문구를 일부러 대문짝만하게 박아 놓았거든요. 이게 영화 끝부분에서 굉장히 순식간에 지나가서 보고 나서도 '어?' 하게 만들긴 하지만... 그래서 '나는 아이언맨임' 이라고 강조하긴 하지만, 아마 후속 어벤져스에서나 또는 다른 시리즈에서 잠깐 등장하는 정도로 아이언맨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더 이상 아이언맨 혼자를 가지고 풀어 나갈 만한 이야기가 많아 보이지 않고, 또 그것이 매력적으로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사실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을 지울 수 없었던 '아이언맨3' 이었습니다. 어벤져스 멤버들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아이언맨이니, 오히려 눈을 사로잡는 화려한 액션이나 전형적인 히어로물의 전개보다는 그가 가지고있는 상처들과 두려움, 특히 '슈트'와 함께 해야 슈퍼 히어로가 되는 그의 숙명을 좀더 진지하게 다루어보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하지만 감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영화의 흐름과는 좀 다른 곳에서 마음이 울리긴 했지만 말이죠. 자신의 연구가 잘못된 곳에 사용되는 것을 괴로워하며, '마야' 박사가 2차 세계대전때 로켓을 발명했던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주 여행을 꿈꿨던 이상주의자 폰 브라운 박사는 V-2 로켓이 영국 런던에 떨어지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로켓은 완벽했다. 하지만, 잘못된 행성에 떨어져 버렸다."




posted by cimple 2012. 7. 21. 16:33

- 다량의 미리니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버튼을 누르시기 바랍니다.


- 제목에서도 눈치채셨다시피,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를 비판하는 내용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의 감동을 해치고 싶지 않으시고, 기분을 상하지 않고 싶으신 분들 또한 '뒤로' 버튼을 누르시기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수없는 볼거리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그것에 대한 실망감을 예견하는 버릇이 들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기대치 않은 즐거움을 얻는 경우는 꽤 있지만, 기대한 곳에서 그만큼의 감동을 느끼긴 사실 대단히 어려워졌습니다. 때문에 사실 요즈음의 우리는 일종의 습관처럼 실망감을 예견합니다. 말하자면, 마지막 스타리그에서 4강의 테테전을 기다리는 마음이랄까요.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정말 오롯이 기대감만을 쏟아붓고 싶은 대상이 생깁니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런 흔치않은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작의 성공도 있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 에는 단순히 그런 박스오피스 숫자로 측정하지 못하는 일종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표현할 단어가 정말 궁색하네요.) 그 아름다움이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오락' 에서 쉽사리 찾아보지 못하는 '영화의 미' 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라는 주제에 대해 '헐리우드 슈퍼히어로 무비' 가 깊이있고 복합적으로 그려내었다는, 좀 믿기지 않은 사실 말이지요. 우리는 그 전설과도 같은 작품이 마무리된다는 '다크나이트 라이즈' 에, 순수하고 열정적인 기대감들을 차곡 차곡 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전설은 끝났습니다.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 는 전설을 이어 나가기보다는, 전설을 끝맺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시리즈의 마지막인 이유도 있겠지만, 제가 본 '다크 나이트 라이즈' 는 더이상 우리에게 어떠한 이야깃거리나 마음을 쏟을 만할 거리를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그러면 왜 전설은 끝났다고 표현했는지, 그래서 왜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또다른 찬사와 경탄보다는, 이 배트맨 시리즈가 잘 끝났음에 안도하고 미소짓는 정도로 극장에서 일어나야 했는지, 제가 느꼈던 이유들을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너무 많아서 정리가 잘 될지 의문입니다. 






1. 사라진 캐릭터들.


'다크 나이트 라이즈' 를 좋게 볼 수가 없는 수많은 이유 중에서, 가장 먼저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도무지 그 어떤 캐릭터도 매력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리뷰를 쓰면서 캐릭터 하나 하나를 되짚어 보아도, 전혀 공감을 형성하거나, 두려움이 들게 한다거나, 감동을 주는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악역입니다.






- 최악의 악역들.


전작 히스 레저의 조커를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아도, 베인은 그 자체로 너무나 특색없고 매력없는 악당입니다. (빌런이라는 이름도 아깝습니다.) 단지 그가 임팩트를 준 것은 목소리와, 배트맨과 싸워 허리를 부러뜨렸다는 사실 뿐이며, '지능과 힘을 겸비한 최고의 빌런' 이라는 사전 보정 없다면 카리스마도 그닥입니다. 


우리는 라즈 알 굴이라는 죽어버린 유령과 싸우는 배트맨을 보고싶지 않았습니다. 베인에게 결정적으로 실망하게 된 장면은, '라즈 알 굴의  뜻을 이룬다' 라는 대사부터 였던 것 같네요. 베인은 자신의 뜻과, 자신의 철학, 자신의 가치, 그리고 자신만의 악이 가득찬 도시를 그려 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천재적 두뇌, 막강한 신체 등 그가 가진 특징들과 함께 개연성을 이루었어야 했고요.


헌데 그의 연설은 유치했고, 그 결과물의 도시는 단지 약간의 무법지대가 된 거 말고 대체 무엇을 이루었는가 무의미하며, 브루스 웨인을 가둬놓고 감시 한 명 안붙여놓는 어리석음에, 탈리아 알 굴의 순정남이었다는 꼭두각시 이미지가 덧씌워지더니, 결국은 배트맨도 아니고 캣우먼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최악의 최후를 맞습니다. 전작 다크나이트에서 조커를 차로 치지 못하고 피해버리는 장면을 기억하신다면, 베인의 죽음이란 얼마나 비교 불능으로 가벼운 것인지요.


그렇다면 착한 여자 갑부인줄 알았다가 암흑 조직의 수장임이 밝혀진 탈리아 알 굴이 메인 빌런일까요? 그럴 수 없음은 역설할 필요도 없고, 일단, '다크 나이트 라이즈' 는 이런 반전 장난질이 필요한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패를 다 보여줘도, 관객의 멱살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이 있었죠. 그 얄팍한 반전이 가져다주는 충격도, 의미도, 가치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전작과의 연계성을 약간 획득하고, 가장 매력적이어야 할 빌런, 베인을 쓰레기통에 디밀었죠. 


기타 무의미한 졸개들은 언급도 못 하겠고, 하여간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의 악역들을 말하면 정말 안스러울 뿐입니다. 그들은 그 스스로도, 그들이 만들어 낸 고담시도 모두 실패작일 뿐이었습니다. 








- 멘토, 미아.


배트맨은 알프레드와 폭스, 훌륭한 멘토를 둘이나 둔 축복받은 영웅이고, 이들의 조언은 영화 전체에 담긴 어려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있어 배트맨과 관객, 모두에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관객에게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이었는 지는 모르겠지만, '다크 나이트 라이즈' 는 멘토 없는 배트맨을 홀로 남겨둡니다. 알프레드는 배트맨 그만하고 평범하게 살라고 보채다가 비밀 말하고 떠나버리고, 폭스는 무기 셔틀로 전락합니다. 결국 배트맨은 조언자 없는 외로운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이것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 에서 브루스 웨인이 겪어야 할 시련이었는지는 몰라도, 멘토들은 분명 배트맨 시리즈에서 매력 있는 캐릭터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없애면서 대체 얻은 것이 무엇이었나 의문이네요. 또 알프레드가 밝힌 레이첼에 대한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던 무게감에 비해 너무도 가볍게 다루어졌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알프레드가 바라던 평범함으로 다시 대면한 것으로, 그 갈등은 얼렁뚱땅 덮어지는 것이었나, 싶고요. 하여간 멘토의 부재도 정말 크게 아쉬운 면이었습니다.






- 그렇다면 다른 캐릭터는


그렇다면 다른 캐릭터들 중에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었느냐, 주인공인 배트맨부터, 캣우먼, 존 블레이크(로빈), 고든 경감, 다 어느 하나 딱히 인상깊다고 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없었습니다. '캣우먼이 이쁘다' 라는 사실이 있지만, 그걸 정말로 진지하게 말할 영화 아니었잖아요.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배트맨은 레이첼밖에 모르던 순정파에서 이 여자 저 여자 쉽게 만나고 마음주는 바람둥이로 변했고, 복잡한 철학이고 가치고 자시고 그냥 악당과 싸워 고담시를 지키는 전통 슈퍼 히어로가 되었습니다. 존 블레이크는 정의감 불타서 배트맨 없는 고담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열심히 노력하고, 그 정의감과 현실 철학으로 나중에 로빈이 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이 인물이 이번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의 중심적 인물이냐, 그건 아니고요. 고든 경감도 정의감에 열심히 뛰어 다닙니다. 그게 끝이고요. 선과 악을 오고가며 독특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졌어야 할 캣우먼은 그냥 과거 포맷하고 싶은 배트맨 도우미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강렬한 인상 없이, 인물들을 더듬거리며 기억해 내야 한다는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만큼 색깔도, 개성도 불분명한 캐릭터들이 잡탕처럼 뒤섞여, 폭발과 총성 속에서 두시간 여를 뒹굴다가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마무리하는 것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 의 인물들이었습니다.





2. 사라진 개연성들


쌓인 말을 쏟아내다 보니, 리뷰글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듯 하네요. 개연성 부분 관련해서는 그냥 생각나는 것들을 개조식 가깝게 풀어쓰고자 합니다. 혹시 제가 잘 몰라서 개연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런 부분들은 조언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브루스 웨인 허리가 부러졌는데 접골 한방에 회복... 정말 이 부분은 웃음 터질뻔 했는데 참았네요.


- 감옥에서 탈출하는 브루스 웨인. 그 오랜 세월 아무도 탈출 못한 그곳을 탈출하는 방법이 '몸에 줄을 묶지 않고 훌쩍 뛰면' 된다는 것이, 아무리 그래도 좀 설득력이...;;


- 감옥 안에 있어야 할 브루스 웨인이 슬며시 엄중히 통제된 고담 시 안으로 들어와서, 제 발로 잡히기까지 했는데, 폭스가 있는 곳까지 안전히 배달되어서 들어옴. (흠;;)


- 베인에게 의해 본진 털려서 무기 다 빼앗긴 줄 알았는데, 폭스가 숨겨둔 무기 창고가 또 있어서, 무기 빼앗긴게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구나;


- 레이첼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도 '알프레드는 쫓아내지만 뭐 딱히;'


- 하비 덴트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도 '뭐 어쩌라고'


- 고든 경감 등이 사형판결 받고 강물위로 걸어가는데 안전하게 안깨지고, 반대쪽에서 배트맨 걸어옴;


- 경찰과 범죄자들이 한판 패싸움을 벌이는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음. 굳이 일렬로 달려들어 죽고, 패싸움을 벌일 필요가 왜 있는건지? 그냥 배트맨과 베인 싸움의 배경도구일 뿐?


- 밝은 대낮에 경찰들 옆에서 싸우는데 아무 주목이나 관심도 없이 싸우게 되는 배트맨.


- 비행기로 간편하게 가져다 내다 버릴 수 있는 궁극의 핵융합 무기


- 블레이크가 뚜껑만 열어줘도 빠져나올 수 있던 일부 갇혀 있던 경찰들


-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핵융합 폭탄이 아슬아슬하게 폭발했는데 멀쩡히 살아있음. 차리라 알프레드가 고개를 들고 미소 짓는 정도로만 씬을 마무리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인줄 아는 사람이 이제 넘쳐남. (블레이크, 베인, 캣우먼, 고든 경감 등등등...) 



이게 다가 아니라 더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을까 합니다.











3. 마치며...


오랜 만에 리뷰를 쓰려니 의욕적으로 시작해도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네요. 게다가 재밌고 신나게 썼으면 좋겠는데 실망감이 큰 채로 남기는 리뷰글이라...


더 좋은 리뷰글을 남기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리고 '다크 나이트 라이즈' 는 더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이로써 전설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아쉬움 때문에 저는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절의 전설을 다시 한 번 들추어 보게 될 것 같네요.


ThEnd.






posted by cimple 2010. 11. 29. 12:44

ThEnd.
posted by cimple 2010. 11. 13. 06:22

초능력자
감독 김민석 (2010 / 한국)
출연 강동원,고수
상세보기



초능력자. 초능력을 가진 사람을 다룬 이야기.

Heroes 라는 너무도 유명한 미국 드라마가 있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초능력으로 인해 어떻게 고뇌하고, 번민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어떻게 그 개개인이 성장하고, 하나 둘씩 서로를 이해해가며, 정말로 영웅이 되어가는지, 그 섬세한 접근이 Heroes 를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드라마로 만들었죠. 또 다른 초능력자를 다룬 영화, X-man 이 선하고 악한 뮤턴트 각자의 신기한 초능력을 보여주는 오락물에 가깝다면, Heroes 는 놀라운 초능력을 가진, 너무도 평범한 '사람’ 개개인에 입체적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인물들이 불분명한 선과 악 사이에서, 스스로의 가치관을 성장시키고 그에 따라 판단내리죠. 그러면서도, 초능력자들이 가진 특유의 신비한 능력으로 보는 이를 매료시키며, 탄탄한 스토리는 긴박감과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듭니다. 때문에, 더 이상의 초능력자를 다룬 매력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을까 할 정도로, Heroes 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물론 시즌을 거듭하면서 안타까워졌지만요;)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Heroes

이 외에도 초능력을 가진 인물을 다룬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전작들은 사실 무수합니다. 영화 ‘초능력자’는 어떻게 이러한 거대한 전작들의 망령의 틈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처음부터 녹록치 않은 과제를 부여받은 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초능력자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의 아픔은 무엇일까? 결국, 그 초능력이라는 것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인가? 영화 '초능력자' 는, 이런 질문들의 해답을 찾기 위해, 그 질문이 처음 시작된 지점으로 되돌아갑니다. 바로 '초능력' 의 본질. '남들과 다르다' 는 것으로요.

 

남들하고 다른 사람을, 남들과는 다르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화 '초능력자' 는 '남들과 다르다' 에 대해 나름의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입히려 시도했습니다. 영화는 '남들과 달라서 막강한' 초능력 뒤에, '남들과 달라서 연약한' 인물들과 상황들을 의도적으로 배치합니다. 일단 노골적이게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초능력자(강동원) 본인이 다리 한 쪽이 없는 장애인이고, 또 다른 주인공인 임규남(고수) 또한 중학교 중퇴의 일용직 노동자로서, 사회의 약한 고리에 있는 인물입니다. 규남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원래는 약간의 지적 장애를 가진 인물로 설정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 볼수 있었고요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런 설정은 사라진 것으로 보이지만).  또한 규남의 가장 절친한 친구들은 터키와 가나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었고, 주된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 또한 사회의 뒷골목과 같은 작고 허름한 전당포이며, 영화 후반부에 규남이 휠체어에 앉은 채 정신지체 장애인이 되어 있는 장면 또한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였습니다.

임규남(고수) 의 외국인 노동자 친구들.

영화는 꽤나 명백하게, '남들과 다름' 으로 소외받고 고통받는 계층들을 영화 안에 삽입하여, 그들이 품고 있을 분노와 외로움을 초인(강동원) 을 통해 분출합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고,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잘못도 없이 미움받고 차별받는 이들. 그들이 가진 '남들과 다름' 은 무력하고, 나약해서, 무시당하고 조롱당합니다. 하지만 초인(강동원) 이 가진 '남들과 다름' 은 막강한 것이죠. 때문에, 그동안 '평범함' 을 무기삼아 폭력과 잔혹함을 행사해왔던 '보통 사람들' 에게, 그 폭력과 잔혹함을 '남들과 다름' 을 통해 되돌려줍니다. 다른 이를 돌아보지도, 귀기울이지 않던 보통 사람들이, 일제히 한 사람의 생각만으로도 자신의 목마저 스스로 비틀어 꺾는 역설적인 상황. 또한 모두를 조종할 수 있지만,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초능력자의 고통.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남과 다름' 으로 잣대질하고 저울질하는 그 편견과 오만의 틀 속에, 우리 자신을 해칠 괴물을 탄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는, 영화는 나름의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초능력자' 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는 '초능력자' 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사회 문제와 연결시켜 그 중심축을 마련한, 꽤나 의미있는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볼거리, 흥미위주로 던져질법한 소재를 가지고 주인공 개인과, 영화를 보는 관객, 그리고 그 전체를 둘러싼 사회 전체까지 아우르려한 영화의 대범한 시도는 분명 훌륭하게 이루어졌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그 '볼거리', '흥미' 에 어설프게 발을 담그려 하면서부터, 영화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어긋난 가장 첫 단추에, '너무 잘생긴 주인공' 들이 있습니다.


괜찮은 각본, 하지만 아쉽기 짝이 없는 영화.

일단 정말로, 주인공들이 너무 잘생겼어요. 농담처럼 들리는 이 말이, 진지하게 영화의 스토리라인을 방해해버립니다. 일단, 주인공인 초인(강동원) 의 배역이, '너무 잘생긴' 강동원이라는 배우의 외모로 인해 몰입감과 설득력을 잃어버립니다. 강동원이 연기한 '초인' 은 샤프하고, 시크하며, 냉철하고 치밀한 이미지의 초능력자입니다. 하지만, 본래 각본상의 초인은 그런 모습이 아닌 듯 해요.

너무도 아름다운 초인, 강동원

일단, 초인은 폭력적인 가정에서 불우하게 자라났으며,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어머니의 품을 떠나 고아로 홀로 살아가게 됩니다. 때문에, 그의 성장 배경상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강동원이 연기한 샤프하고 시크한, 냉철하고 치밀한 캐릭터가 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고수를 만나기까지 그는 허름한 전당포 등에서 몰래 돈을 가져오죠. 물론 그런 곳이 돈이 사라지더라도 이목이 집중되지 않는 곳이어서 일부러 선택했을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 못 배우고, 사람과 교류하기 힘든 초인(강동원) 에게는 그런 곳이 돈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고, 자기에게 익숙한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 좀더 설득력있게 여겨졌습니다. 그렇게, 사회의 뒷골목에서 적은 돈이나 훔치면서, 자신의 엄청난 능력으로 세상을 뒤흔들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가다가,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임규남(고수) 을 만나서 모든 일이 커지고, 뒤틀어져 버린다. 라는 것이 원래 의도된 스토리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실제로, 초인의 캐릭터는 정처를 모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 합니다. 사회에 대해 나지막히 독백하는 첫 부분부터,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 자신만의 공간을 두는 모습에서는 천재적이고 치밀한 이미지를 보였다가, 전당포를 뒤지고, 임규남(고수) 에게 천박한 욕설을 내뱉는 모습에서는 갑자기 그 섬세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무식한 이미지가 씌워집니다. 그렇게 초인은 본래 자신과 강동원이라는 꽃미남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둥둥 떠다녔습니다.

그건 고수도 마찬가지였죠. 다행히 임규남이라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붙들어 둘 추 같은 것이 있어서, 일단 그것만 붙잡고 늘어지면 어느 정도는 성공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캐릭터였지만, 진짜로 차별받고 소외받는 '남들과 다른' 계층을 표현하기에는 고수도 너무 잘생긴 외모가 아니었나 합니다. 임규남이 방바닥에 뒹굴거리며 구직란을 뒤적거릴 때, 주위에서 '할거 없으면 그 얼굴로 배우나 하지' 하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물론 강동원, 고수라는 스타 파워는 영화를 흥행으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될 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본래 의도한 주제를 생각해 보았을 때 '너무 잘생긴 배우' 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관객으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만드는 까끌까끌한 모래알 같은 요소였습니다.

역시 너무 잘생긴 임대리, 고수

또한, 서브 캐릭터들이 너무도 정체 모를 역할들이었습니다. 일단, 임규남의 두 외국인 노동자 친구들. 임규남은 그들과 진정으로 허물없이 절친하게 지내죠. 아마도 이러한 '편견없는 소통' 이 임규남이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었고, 능력이었으며, 어쩌면 그것이 초인의 지배 하에 임규남이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열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초인이 아기를 지배할 수 없었던 장면으로 보아, '편견 없음' 이 초인의 능력을 벗어난다는 설정이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임규남의 두 외국인 친구들은 단지 그런 장치적인 의미를 가지거나, 코믹 캐릭터로 전락해 버리기 보다는, 스토리 라인에서 좀더 결정적이고 중요한 역할들을 감당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입니다. 친구들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준 제트 엔진으로 임규남의 차가 위기를 탈출하는 장면에서, 친구들의 모습이 플래시백으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은 사실 헛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장면이었고요.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영숙(정은채)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극중에서 히로인의 역할을 맡고 있으며, 어느 정도 초인과 임규남 사이에서 긴장감을 형성할 정도의 비중이 있고, 결국 가장 마지막에 납치되어 구해야만 하는 목표이며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임규남에게 단지 '일하는 직장 사장님의 예쁜 딸'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며, 초인에게는 더더욱 '단지 내가 조종할 수 있는 보통 사람' 일 뿐입니다. 그런데 임규남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하고, 더 대책없는 것은 영숙을 납치한 초인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영숙의 어깨에 기대는 장면입니다. 그냥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자기가 조종하는 아무 사람의 어깨에나 기댄다고 보기에는, 사실 장면 자체만 놓고 보면 애틋하고 가슴 시릴 수 있는 장면이었죠. 차라리 영화의 다른 쓸데 없는 장면들을 가지치기 하고, 여성 캐릭터인 영숙을 '닫힌 소통' 의 매개체로서 초인과 임규남 사이에 두었다면, 그 또한 너무 뻔한 삼각관계가 되어 버렸을까요? 그래도 지금의 어정쩡한 공주 역할보다는 나아 보이는데요.

갈 곳 잃은 히로인, 영숙(정은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집어내자면, 어쩔 수 없이 '초능력' 영화에서 기대되는 화려한 CG 장면이었습니다. 금문교를 통째로 옮기거나, 하늘과 땅을 뒤집어버리는 만화같은 초능력은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관객으로 하여금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초능력 씬이 하나라도 있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초능력 장면이라고 해야 임규남을 향해 사거리에서 한꺼번에 달려드는 자동차 정도였을까요? 그 장면을 포함해서, 90년대에서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을 법한 장면들만 영화 '초능력자' 에 가득했습니다. 어차피 임규남 또한 초능력자로 바뀌어져 간다는 복선을 노골적으로 넣어 놓았으니, 초인이 건물에서 사람들을 떨어뜨릴 때 임규남이 그들을 초능력으로 구해냈다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아니라면, 클라이맥스의 한 장면 정도는 도시 전체의 모든 사람을 한꺼번에 정지시키는 장면 정도는 충분히 구성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CG 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임팩트 한 번이 너무도 아쉬웠습니다.

 

살기 힘들다는 말.

'살기 힘들다' 는 말, 저 스스로도 참 자주 합니다. 할 게 많아서 힘들고, 사람 대하는 게 힘들고,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두려워서 힘들고. 물론, 삶을 살아 가는 게 녹록치만은 않은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감당해야 할 짐이 있고, 자신이 감당할 분량 만큼 힘들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누구의 인생도 쉽다 가볍다 판단내리기란 어려운 일이죠.

하지만, 세상엔 '정말로 살기 힘든'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모님 잘 계시고, 온 몸 멀쩡하며, 꽤나 좋은 학교 다니면서, 삼시 세끼 걱정없이 먹으며 공부하고 있는 지금 저 스스로도 힘들다고 느끼는데, '정말로 살기 힘든'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삶이란 정말 얼마나 힘들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득할 정도입니다. 몸이 불편해서 사람들의 편견에 시달리고, 국적이 달라 차별에 괴롭힘 당하며, 아무리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속에 처한 사람들. 그들에게, 세상은 얼마나 무겁고 괴로운 것이며, '평범함' 이란 얼마나 잔혹하고 이기적인 것일까요.

어쩌면 그들이 생각할 때, 어떤 사람이 주말에 시간 나서 영화관을 찾아 영화를 볼 돈과 시간과 사람이 있고, 또 영화를 보고 나서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고통받는 이' 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는 영화 리뷰를 쓰는 팔자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그 어떤 반성과 고민도 너무도 사치로와서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마음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을까.

어려운 일입니다.


ThEnd.

posted by cimple 2010. 8. 16. 15:25

악마를 보았다
감독 김지운 (2010 / 한국)
출연 이병헌,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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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도 아쉬운 참에, 안 좋은 것을 구태여 보고 듣고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헌데 영화 ‘악마를 보았다’ 는 참 보기 안 좋은 것들로 가득하고, 또한 그러기로 이미 소문난 영화이지요. 그럼 그 보기 안 좋은 것들을 불편함 참고 봐야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이유라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복수의 통쾌함을 맛보고 싶은 이도 있겠고, 복수의 허무함을 확인하고 싶은 이도 있겠죠. 인간의 잔혹한 단면을 엿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을 것이고, 거기로부터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악마를 보기 원했습니다. 감독이 제목에서부터 자신 있게 호언장담해 놓은 악마를 정말로 눈앞에 가져다 놓아 주기를, 그래서 영화관을 나섰을 때 입에서 저절로 '아, 내가 악마를 보았다’ 라고 말하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제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 연출력, 구성, 그리고 인간 내면의 기괴한 어두움에 정면으로 접근하는 감독의 독특하고 탁월한 시각이었습니다. 영화 ‘세븐’ 에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그려냈던 연쇄 살인범이나, ‘다크 나이트’ 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들어낸 조커와 같은 괴물을, 과연 김지운이라는 감독은 어떻게 살아 숨쉬게 만들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나 봅니다. 두시간 반 가까이, 악마가 되었어야 할 영화의 두 주인공은 그 탁월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악마를 흉내내기에 급급했고, 그들의 뒤에 서서 그들을 만들어 낸 감독 또한 인간의 그 악마적 본성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해 허둥대다가, 그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이미지들로 영상을 채워 나가는 방법에 머물렀습니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밤길에 택시 타면 위험하다, 다른 사람의 친절은 받아들이지도, 친절을 베풀지도 마라, 여자들은 돌아다니지 말고 그저 얌전히 집에 있는 게 상책이다 따위의 기분 더러운 교훈들만 무겁게 가슴에 얹혀집니다. 영화관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곁에 서 있는 모르는 사람이 짜증스럽게 불편해지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신의 벽만 두터워집니다. 바로 그것이 감독이 원래 의도하던 목적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관객이 얻고 돌아가기보다는 깎여 나가는 것이 많은 영화였습니다.

‘악마를 보았다’ 의 불편함

영화 ‘악마를 보았다’ 는 한국의 소위 ‘메이저’ 영화 중에서 유래 없이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들로 입소문을 타고 있고, 과연 그렇습니다. 너무 잔혹해서 심의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하는데도, 신체 훼손이나 폭력 장면이 정말 이전에 한국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선정적입니다. 고어 영화를 본적 없는 분이라면, 이런 영화가 고어 영화구나, 할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가만히 앉아서 보기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 잔혹함의 묘사 수준 보다는, 그 폭력의 ‘반복’ 에 있습니다. 어림 잡아 헤아려봐도, 영화에서는 7명 정도의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강간, 살해 등 잔혹한 폭력을 당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여성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유린당하며, 그것이 일곱 번 정도 계속된다면 좀 피곤해지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만은 아닙니다. 경철(최민식)과 수현(이병헌)에 의해서, 영화에서는 7명 정도의 남성이 잔인한 폭력을 당합니다. 감독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여성에 대한 폭력 횟수와 비슷하지요. 러닝타임이 140분 정도이니, 영화는 거의 10분마다 한 번씩 화면을 둔탁한 파열음, 찢어지는 비명, 선홍색 피로 물들입니다. 그 정도라면, 그냥, 영화 전체가 피칠갑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지요.

그 단순 반복적인 폭력이 악마를 창조해 내는 김지운 감독의 방식이었습니다. 잔인함과 불편함의 물량공세. 그로 인해 자칫 무뎌질 수 있는 감각을 남성과 여성을 적절히 번갈아 배치하면서 상쇄시키는 기법.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이지만, 말 그대로 단순하기만 하고, 효율적일 뿐입니다. 살과 피는 살아 번뜩일 지 몰라도, 악마로 자리잡아야 할 캐릭터들은 오히려 살아나지 못합니다. 연쇄살인범 장경철도, 그에게 복수하는 수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없는 괴수는 악마가 되기에는 과분하다. 연쇄살인범 장경철.



영화에서 원래 악마를 맡아야 할 인물. 당연하겠지만 연쇄살인마 장경철입니다. 정말 아무 거리낌 없이, 탐욕스러운 성욕과, 피해자가 ‘살려주세요’ 라고 말할 때 느끼는 권력욕 둘에 따라서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죽지 않을 만큼 때려서, 자신의 아지트로 끌고 온 뒤, 강간한 다음 토막냅니다. 그 어떤 계획이나 목적 없이, 너무도 단순하고 무지하게 보이는 대로 납치하고 죽이기에, 오히려 그의 폭력은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어쩌면 그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순수한 본성이 진짜 인간 내면의 악마 같은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 똑똑하고, 치밀하고, 섬세한 악마들을 영화에서 만나왔고, ‘악마라면 이래야 해!’ 하는 선입견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장경철은 다르다,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불분명한 그 원천적인 광기.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법한 심연 깊은 곳에 존재하는 탐욕의 결정체이다.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장경철에게 진짜 ‘악마’ 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에는 과분해 보입니다. 미친놈. 나쁜 XX. 개 같은 자식. 갖은 욕설이 어울리지, 그에게 악마같다는 표현은 아깝습니다. 아마도 감독이 장경철을 진짜 악마로 만들고 싶었던 장면은, 수현에게 붙들려서 단두대에 묶여 있을 때,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은 두려움이나 고통 따위 없다고 뱉아내는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에 젖은 장경철의 얼굴도, 그 얼굴을 비추는 조명도 그러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장면에서 섬뜩하게 소름 돋는 무서움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모습은, 사람을 밟아 죽이고 물어 죽이던 ‘고질라’ 나 ‘아나콘다’ 가 영화 마지막에 죽기 전 발악하는 모습과 더 비슷했으니까요. 두려운 존재라기보다는,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할 해충에 가까웠습니다.

배우 최민식은 그의 표정, 눈빛, 목소리를 통해서 장경철이라는 인물에게 무식하고 천박한 괴수영화의 괴수 이상의 캐릭터를 부여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이미 그 장경철은 악마로 불리우기에는 자격미달이었습니다. 인격을 잃어버린 악마에게, 우리는 비록 그가 사람의 탈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미친 개나 해충, 질병 이상의 두려움을 부여하기 힘듭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장경철은 악마로 불리기에는 과분했습니다.

튀어 보려고 애썼지만, 악마가 되기에는 모자랐다. 복수에 미쳐버린 남자 수현.



사실 영화에서 진짜 악마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인물은,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리고 복수에 미쳐버린 남자인 수현이었습니다. 국정원 경호요원이란 번듯한 신분. 잘생긴 외모. 그러한 그가, 사랑하는 이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자신도 모르던 악마 같은 모습으로 변모해 간다면, 진짜 악마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한 그것이 진짜 우리 안에 있음직한 악마적 본성의 실체라고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영화의 플롯은 수현이란 캐릭터의 향방에 대해 엇비슷하게 의도한 듯 보이지만, 수현이 보이는 모습은 악마같다는 정체성을 부여하기에는 끝내 모자랐습니다.

일단 그가 살인마 장경철에 대해 선택한 복수의 방식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토막살해한 살인범을 잡았다가 손목 하나 부러뜨리고 풀어주고, 잡았다가 발목 끊어놓고 풀어주기를 반복합니다. 수현은 그가 선택한 방식이 장경철을 두렵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진정한 복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장경철의 말대로 “이거 완전 싸이코네” 라고 할 만큼 독특하고 튀는 방식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은 장경철에게 어떠한 두려움이나 어려움도 심어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추적장치 하나를 먹여서 그를 감시한다는 생각은 너무도 위태로운데도 그것 하나만 믿고 그를 놓아주는 수현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고, 팔을 부러뜨리고 발목을 끊어놓아도 장경철은 별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강간합니다. 결국 수현은 위기에 처한 여자들을 구해주는 영웅놀이를 위해 장경철이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드는 것을 방조한 꼴이 되었고,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사랑하던 여자의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을 유도했습니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요.

결국 장경철을 손에 넣은 이병헌이 택한 방법은 장경철의 가족이 그를 죽이도록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멋모르고 문을 열어서 단두대가 장경철에게 떨어진다는, 좀 유치할 정도의 사형 장치가 악마로 변모한 수현의 모습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었을까요. 과연 그것이 수현이 마지막에 말했던 대로 장경철이 죽은 다음에도 고통받는 일이었을까요. 물론 아들을,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인 부모와 자식의 삶이란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자식이 죽음에 대해 보험금의 수령을 묻는 부모와,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 ‘시발’ 하고 먼저 내뱉는 아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괴로워할까요.

수현이 진짜 악마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면, 정말 악마가 되고 싶었다면, 그렇게는 하면 안 되었을 텐데요. 장경철이 자기 애인의 가족들을 죽였다면, 수현 또한 그와 평행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장경철의 눈앞에서, 그의 부모나 그의 아들을 고통스럽게 죽였다면, 그의 어리석은 사냥방식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장경철을 분노하고 두렵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거기까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는 않았던 것일까요. 대체 그에게 ‘아냐, 거기까지는 안 돼’ 라고 할만한 인간적인 경계선은 어디까지였고, ‘아직 이 정도로는 모자라’ 라고 했던 악마적인 상상력은 어디까지였던 것일까요.

또한 그 모든 일을 이루어 놓고 머리를 감싸쥐며 흐느끼고 울부짖는 수현의 모습은, 악마를 흉내냈다가 오열하는 평범한 사람의 결말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그는 처음부터 악마일 수 없었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허우적대다가,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자멸합니다. 만약 마지막 장면에서, 수현이 울지 않고 웃었다면 어떨까요. 훨씬 어려웠겠지만,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가, 미친 듯이 낄낄댔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악마를 흉내내 본 데 그치지 않고, 정말 악마가 되어 버렸다면 어땠을까요. 자신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이나,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복수에 대한 허무함, 모두 잊고, 단지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으로 웃었다면, 정말 악마처럼 변모한 그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악마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사를 보면 몇몇 잔혹한 장면들이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인육을 먹는다던지 개에게 던져 준다던지 하는 장면 말이지요. 제 생각에는 수현의 처제가 살해당하는 장면도 편집되지 않았나 합니다. 납치된 것으로 보아 원래 스토리상에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처럼 보였는데, 그냥 시체로 발견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잘려나간 장면들이 다 붙는다고 해도, 영화가 별다른 가치를 더 부여받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관객은 좀더 불편해지고, 좀더 짜증스러워질 뿐이겠지요.

사실 글의 처음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일부러 극장에까지 찾아가서 악마를 보려고 하는 것은 악취미입니다. 이미 충분히 우리네 삶에는 악마 같은 이들의 진짜 이야기가 널려 있으니까요. 그렇게 안 좋게 보려면 한없이 안 좋게 보여서, 마치 미쳐버린 듯한 이 세상에서, 굳이 악마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체 왜 악마를 보려 할까요. 정말로 우리 내면의 숨겨진 본성이 느끼는 카타르시스일까요, 아니면 왜곡된 본능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 의미일까요.

...어쨌든, 이 영화 좀 별로네요.

ThEnd.

posted by cimple 2010. 1. 19. 08:19

더 로드
감독 존 힐코트 (2009 / 미국)
출연 비고 모르텐슨, 샤를리즈 테론, 가이 피어스, 로버트 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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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첫 영화.

그러고 보니 2010년의 첫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보러 가자고 하기에는 영화의 재미에 대한 거의 확고한 마이너스적인 보장이 있었기에 그냥 혼자 보러 갔다 왔습니다.

이거슨_인증.jpg


'The Road' 를 극장에서 본 이유는 80% 정도 의무감에서였습니다. 지난 학기에 진행했던 'Robot on the Road' 라는 프로젝트가 바로 이 영화의 원작 소설 'The Road' 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아니라면, 사실 소설로 이미 보았던 작품을 다시 영화로 본다는 것은 저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한국 영화는 퇴마록이 그랬고, 외국 영화는 해리포터가 그랬군요. 금방 떠올려 보아도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던 기억들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세계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영상으로 옮겨진 소설의 세계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준 좋은 면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뭐, 저의 상상력이 소설 원작 영화의 감독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런 주제넘은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가 제한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 싫습니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이미 본 작품을 영화로 감상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The Road' 는 우려하던 것 보다는 괜찮았습니다. 재미는 없었지만, 기대하던 것 보다는 훨씬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얻지 못했던 것도 얻었고요.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화에 대한 내용은 이미 한번 책을 리뷰하면서 언급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다시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소설 'The Road' 리뷰 보러가기>


하지만 이번에는 영화를 보면서, 소설에서는 그다지 감명깊게 와닿지 않았다가 영화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슴에 있는 불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것을 이미 말했었고, 아들이 중간 중간에 아버지에게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지요?" 라고 묻는 장면으로 나오죠.

가슴에 가지고 있는 불.

주위의 사람을 둘러 보았습니다. 의외로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기가 쉽다고 느껴졌습니다. 딱히 무엇이라고 말로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고 정말로 그 사람이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제가 함부로 판단내릴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어떤 사람은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언가 다릅니다. 그런 사람은 참 멋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이와 가늠하기 어려운 높이가 있습니다. 불이란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그 사람에게는 온기가 있고 주변 사람조차 따듯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그냥 그 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소모됩니다. 너무도 얕아서 손만 뻗어도 그 바닥이 만져질 것 같은 사람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생각과, 꿈과, 노력들이 없습니다. 텅 비어있는 내면을 감추기 위해 겉 껍데기를 그럴듯하게 보이기에 애씁니다. 하지만 그 바스라지기 쉬운 위태로운 포장지는 스스로도 알고, 남들도 이미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단지 모른 척 하고 있을 뿐.

제 자신을 보며, 과연 나는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물어보았을 때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모습만을 골라 가지고 있는 듯 하여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루 하루 꾸역 꾸역 버텨 낼 뿐이면서,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해 화려한 미사여구로 내 삶을 치장해보지만, 결국 실속과 실체가 없는 허깨비같은 삶 같습니다. 그리고 불을 가지고 있으면서 뜨겁게 하루 하루를 태워 나가는 내 주위의 영웅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과 함께 시샘이 듭니다. 이 옹졸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나약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나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던, 그 불꽃의 온기들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 나의 삶을 진짜 삶처럼 만들어 주었던 것.

흩어져가는 자아를 추스리고, 부스러기 조각이 되어버린 꿈들을 한 조각 한 조각 정성스레 모아 봅니다. 언젠가 나의 삶의 온기가가 회복되어, 다시 한 번 불꽃이 타올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따듯하게 만들어 줄 그 날을 그려봅니다.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한번 걸어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도 함께 딛어봄직한 'The Road' 가 아닐까 합니다.

ThEnd.

p.s.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정말 인상깊었던 것은 노인 역할로 등장하는 로버트 듀발의 연기력이었습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주는 감동은 소설에서 제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cimple 2010. 1. 4. 05:15

아바타
감독 제임스 카메론 (2009 / 미국)
출연 샘 워딩튼, 조이 살디나, 시고니 위버, 스티븐 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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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the king of the world!"

"나는 세상의 왕이다" 라고 외치는 제임스 카메론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 으로 전 세계 관객들과 오스카를 휩쓴 지 1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제임스 카메론은 극중 잭의 대사를 인용하여 시상대에 올라 이렇게 외쳤죠.

"I'm the king of the world!"

그의 이 말은 어찌 보면 오만한 대사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만, 어쨌거나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의 영화 '타이타닉' 은 미국내, 그리고 전세계 박스오피스에 있어 여전히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타이타닉의 17주 연속 미국 박스오피스 1위의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타이타닉에 도전한다고까지 여겨졌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조차 4주 1위에 그친 것을 보면 단지 허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왕' 입니다.

말 그대로 '공전의 히트' 를 기록한 영화, 타이타닉

2009년 12월, 12년만에 영화 'AVATAR' 로 왕이 귀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딱히 큰 의미는 없지만, '왕의 귀환' 은 장차 타이타닉의 아성을 무너뜨릴 감독이 아닐까 여겨지는, 피터 잭슨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군요. 실제로 타이타닉에 이어 월드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요. 예, 쓸데없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피터 잭슨을 언급한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만은 아닌것 같군요. 쉬어빠진 헐리우드의 스타일과, 그 스타일의 유령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제임스 카메론 등으로 대변되는 그 낡은 스토리텔링과 연출을 혁신시킬 새로운 피는 누구일까. 새로운 감독은 누구일까.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마이클 베이가 감당하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습니다. 그는 헐리우드가 쌓아온 옛 영광의 끝자락에서 이전의 공식들을 충실히 재현해 나가고 있는 '클래식한' 감독이 아닐까 합니다. 새로운 변혁과, 신선한 흐름을 이야기할때, 그래도 사람들은 피터 잭슨을 많이 언급하고, 저도 동의합니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그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신선한 스토리텔링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었고, 그 변화의 물결을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라고 외치듯이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 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반향은 결코 조용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세계는 그가 들고 온 한 편의 영화에 적지 않게 소란해졌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머릿속에 훨씬 오래전부터 그리고 있었다는 세계관과 스토리. 그는 그 모든 상상의 세계를 구현해 놓고, 12년 후 단지 그것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마치 모차르트가 머릿속으로 이미 작곡해 놓고 단지 오선지에 옮겨 적었다 했듯이.


영화의 줄거리

'아바타' 의 포스터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자면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몇 개 있습니다. '원령공주', '포카혼타스', '라스트 사무라이' 등. 사실 이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특별한 말 없이 이런 영화들이 언급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영화 '아바타' 의 줄거리는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 지구는 환경이 오염되고 자원이 고갈되어 갑니다. 이 때, 지구인들은 외계 행성 판도라와, 그 판도라 행성에 묻혀 있는 어마어마한 대체 자원을 찾아냅니다. 허나 이 외계 행성 판도라에는 정체모를 외계 생물들과 함께 외계인 종족 '나비' 족이 살고 있습니다. 나비족은 비록 발달된 과학문명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과 호흡하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종족으로 그들 나름의 신앙 체계와 문화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들과 접촉하기 위하여, 나비족과 인간의 유전자를 결합시킨 '아바타' 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사람의 신경을 아바타에 접속시켜, 이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영화는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쌍둥이 형의 죽음으로 인해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주인공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 는,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미 해병대원입니다. 그는 지구군(軍) 지도자인 마일즈 대령(스티븐 랭)으로부터 몰래 군사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빼내올 것을 지시받습니다. 그 대신, 충실하게 임무를 이행하면 두 다리를 고쳐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말이죠. 제이크는 그렇게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아바타에 접속하게 됩니다.

파괴적 인간으로 대표되는 마일즈 대령

아바타의 몸을 입게 된 제이크는 우연히 나비족 추장의 딸 '네이티리'와 만나게 됩니다. 원래 제이크를 죽이려 했던 네이티리는 그가 대지의 신 '에이와' 의 알수 없는 선택을 받았음을 알고, 그가 정말 자격이 있는 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종족 곁으로 데려옵니다. 나비족은 지구인들을 '하늘의 사람' 이라 부르며, 그들의 아바타 프로젝트 또한 알고 있기에 자신들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제이크를 적대시하고 멀리합니다. 제이크는 그들 안에서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문화와 관습, 신념을 배워 나갑니다. 처음에는 충실한 정탐꾼 역할을 하지만, 점차 제이크는 자연과 함께하며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속에 어우러지는 나비족의 삶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모든 시험을 통과해 내고 멋지게 성장한 제이크와, 그 성장을 곁에서 도왔던 네이티리는 사랑에 빠집니다.

제이크와 네이티리 눈맞는장면

그러나 탐욕에 빠진 인간들은 끝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나비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인간들의 강력한 최신 무기 앞에서 물질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나비족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어갑니다. 제이크는 자신이 이 모든 인간의 파괴를 도왔다는 책임감과, 나비 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비족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는 통제 불가능의 괴수를 조종하는 전설의 용사 '토르크 막토' 에 도전하여 성공하고, 나비족 뿐만 아니라 판도라 행성 전체 종족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성공합니다.

마침내 목숨을 건 최후의 전투. 하지만 여전히 화력에서 열세인 판도라의 원주민들은 처참하게 스러져 갑니다. 제이크를 도왔던 그의 지구인 동료들 또한 하나 하나 죽어갑니다. 그러나 절망이 가득하던 이 때, 판도라를 관장한다는 '에이와' 의 도움으로 판도라 행성 전체가 인간들을 공격합니다. 인간 군대는 패퇴하고, 자신들의 행성으로 쓸쓸히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에이와의 도움을 통해, 더이상 아바타가 아닌, 진짜 나비족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입니다.

인간들의 판도라 침공

인간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서로 다른 종족간의 화합과 이해를 다룬 전체적인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나쁘지 않고, 오히려 훌륭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도 몇 가지 있었습니다. 딱 3가지만 이야기하면,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사랑이 특별한 계기 없이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는 점, 제이크가 '토르크 막토'가 되는 과정이 너무 쉽게 처리되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영화의 가장 큰 위협이나 적은 주인공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스토리텔링의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는데, 마일즈 대령을 죽이는 것이 제이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점. 이 세 가지가 제가 생각하는 영화 아바타에서 아쉬웠던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각각의 요소에 대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름의 이유를 들어 보니 그것들 또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납득되어, 이것들은 저만의 아쉬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I see you"

누가 누구의 꿈이고, 누구의 아바타인가.



영화에서, 아바타에 접속하는 것은 마치 꿈처럼 묘사됩니다. 아바타에 접속해 있는 동안의 제이크는 진짜 자신이 아니지만, 두 발로 뛰어다니고, 나비족과 함께 어울리며 오히려 '진짜 자신' 을 찾아갑니다. 마치 꿈 속의 일들처럼 판도라 행성의 삶은 아름답고 신비롭게 그려집니다. 그러나 접속을 해제한 제이크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과, 탐욕에 물들어 있는 인간들을 보며 점차 혼란스러워합니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그리고 진짜 자신은 누구인지. 정말로 '인간답다' 는 것은 어떤 것인지. 숱한 질문이 제이크와, 영화를 보고 있는 저를 괴롭혔습니다.

"i see you" 는 나비족의 서로에 대한 인사입니다. 이 인사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들이 영화팬들 가운데 분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I see you" 는 말 그대로 "나는 당신을 봅니다" 입니다. 그리고 굳이, 그 인사의 의미를 담는다면, 우리들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면서 상대방의 평안함을 묻는 것을 중요시 하듯이, 나비족에게 있어 눈앞의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존재와 나의 교감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삿말에 '나' 와 '너' 그리고 '본다' 가 함축적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네이리티.

아바타에 접속해 있는 제이크는 처음에는 네이티리와 교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나비족의 철학과 생활을 이해하며 거기에 동화되자, 네이티리는 제이크가 가지고 있는 본래 성품을 알게 되고, 그 존재의 주체와 깊이 교감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존재의 주체는 그 껍데기가 '인간' 이든 '나비족' 이든 상관 없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인간 모습을 한 제이크를 네이티리는 만나게 됩니다. 작고 초라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지만, 네이티리는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부드럽게 말합니다.

"I see you."

끝을 모르고 발달하는 물질 문명의 폐해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파괴 본능. 나와 다른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함. 그 모든 인간들의 '너무도 인간다운', 또는 '너무도 인간답지 못한' 면을 꼬집으면서, 제임스 카메론이 제시한 해답은 "I see you" 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진지하게 인정하고, 껍데기에 신경쓰는 것이 아닌 그 내면의 존재 자체에 주목하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라면 반목과 갈등, 차별과 억압은 해소될 것이며, 그것이 인간과 자연 사이라면, 자연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의 무분별한 파괴와 살육은 해소될 것이라는 것. 그가 12년동안 머릿속에 들어있던 모든 스토리를 응축시켜 빚어낸 단 문장의 답변입니다.



제임스 카메론, 몰입감의 야망을 드러내다.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 에 반대하여, '외계를 침공하는 지구인' 이라는 상상력은 아마 누구나 한번쯤 해볼 수 있을 법한 상상입니다. 그러나 전자보다 후자 영화를 실현시키기가 아마도 훨씬 어려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 '낯선 세계' 전체를 통째로 만들어서 영상에 담아야, 사람들로 하여금 저것이 지구 어딘가에서 세트를 지어놓고 연기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임스 카메론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머릿 속에 담긴 세계 전체를 '믿을 만한' 영상으로 담아낼 만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력을 12년동안 기다린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자신감이었을수도 있겠죠. 내가 아니면, 이런 스케일의 상상력을 나보다 먼저 실현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제임스 카메론이 의도한 '몰입감'은 최첨단 CG를 통해 실제와 같은 세계를 만들어, 그것을 화면에 가득 채워,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진짜처럼 여기게 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타이타닉' 을 통해 그는 관객이 기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몰입의 끝을 보고, 속된말로 '뽕을 뽑았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 컴퓨터 그래픽 기술력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어디까지나 관객이 '진짜같은' 영상을 보고 즐긴다는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관객이 '진짜같은' 영상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객이 '진짜' 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3D 입체로 펼쳐지던 판도라 행성

지금 한번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바로 이 세계가 '진짜' 입니다. 그리고 모니터 안을 들여다 보십시오. 바로 '진짜같은' 영상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궁극적으로 영상이 가야 할 방향은 '진짜' 라고 믿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2D 평면상에서 컴퓨터 그래픽이 가져다줄 수 있는 몰입감의 한계를 예견했고, 때문에 그는 관객이 '진짜' 에 완벽하게 몰입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3시간 짜리 3D 영화로 제작된 '아바타' 입니다.

다음 세대의 영상 매체를 보통 우리말로 지칭하기를 '실감미디어' 라고 부릅니다. 실감미디어는 단지 3D 영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촉각, 후각 등을 포함한 오감을 만족시키는 미디어 컨텐츠를 말하며, 단방향 전송이 아닌 사용자와의 인터랙션을 포함하고, 지금보다 더욱 큰 화면에 고화질의 영상, 더욱 큰 대역폭의 전송기술 등의 개발 또한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안경이 필요없는 입체 영화,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 3D TV, 들고 다닐수 있는 모바일 3D 기술 등등이 벌써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고, 관련 표준 제정에 각국이 열을 올리고 있으며, 눈치채셨겠지만 게임 산업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진짜' 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실감미디어의 개발은 결국 궁극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체의 통합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입체영화' 가 가야할 길도 멀다.

물론 아직까지 3D 기술은 부족합니다. 당장 영화 '아바타' 만 하더라도 몰입감있게 충분히 즐기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특수 안경을 착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화면의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눈이 피로하며, 디테일이 뭉개진다던가 색감이 흐려지는 단점등이 남아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즉, 아직까지는 3D 입체 영상 기술 하나만 해도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인간이 몰입감을 느끼는 이유가 단지 영상, 기술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훌륭한 배우의 연기나, 흡입력있는 스토리 전개가 더욱 인간을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3D 기술력이 오히려 영화의 감상을 방해하고, 집중력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아바타' 가 그랬습니다. 아바타의 3D 기술력은 저에게 영화를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 요인중의 하나였고, 입체 영상들은 저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가져다 주었을 뿐이지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또는 영화적 장치들에 있어서 그 어떤 눈에 띄는 장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세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 영화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바뀌어 왔을 때,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반발했습니다. 바로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어리석어 보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진지했을 것입니다. 영화의 3D 로의 진화도 비슷한 진통의 시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3D 기술력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신봉은 경계하여야 할 일이지만, 그 곳으로 영상으로의 대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는 그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은 2D 영화 시대를 정복한 정복자이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영화의 또 다른 세대를 열어젖히는 데 선봉장에 서고 싶다는 끝없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CG 를 하는 사람들로서는 참 할 게 없어지기도 했고, 참 할 게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그저 씩 한번 웃어주며, 오른손을 들고 읊조릴 뿐입니다.

"I see you."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1. 13. 07:27

2012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2009 / 미국, 캐나다)
출연 존 쿠색, 아만다 피트, 치웨텔 에지오포, 탠디 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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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 포스터.



스타게이트,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투모로우.

이 정도의 영화 제목만 나열하더라도, 롤랜드 에머리히라는 감독이 우리에게는 꽤나 친숙한 영화들의 감독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영화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떠한 '공통적인' 느낌들도 우리는 알고 있지요. 화려한 예고편을 보거나, '출발! 비디오 여행' 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소개해 줄 때 '저 영화 좀 끌리는데?' 하는 느낌을 주게끔 만드는 그런 영화들. 그런데 직접 영화를 보고 나면 드는 느낌이, 그러니까 굳이 그 느낌을 개인적으로 비유하자면 김치 없이 라면을 먹는 듯한(?), 뭔가 좀 진짜 맛있는 음식 먹었다는 느낌은 안 드는, 그런 영화들. 차분하게 집에서 DVD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왠지 좀 께름칙하고, 오히려 극장에 앉아 쏟아지는 물량공세를 눈과 귀로 즐기는 것이 경제적으로 느껴지는 영화들. 아닌가요?

<2012> 는 바로 그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영화를 보는 도중,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느낌, 그 컨셉. 정말로 그동안 겪었던 그 공식 그대로 충실합니다. 왠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 영화 이러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준비했다가, 정말 정직하게도 예상하던 딱 그대로의 느낌을 주는 영화. 영화를 볼 때 으레 따르는 운이나 복불복의 느낌 없이, 자판기에 동전 넣으면 그 가격에 맞는 상품이 튀어나오는 식으로 돌려주는 영화. 그런 면에서 롤랜드 에머리히는 자신의 분명한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아, 그렇다고 정말 제가 <2012> 의 AtoZ 를 모두 예상하고, 영화 전체가 모두 제 손바닥 위에서 놀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레짐작하고 아무리 가늠해도, 도저히 제가 예상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 밖을 보여준 것도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엄청난 CG 였습니다.



<2012> 의 CG, 태풍 메치기.

뜬금 없이 만화 이야기를 아주 잠깐만 할까요? '신 공태랑 나가신다 - 유도편' 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유도편의 주인공 격인 샌님 '시로' 는 환상의 필살기 '태풍 메치기' 를 선보이는데, 라이벌인 '대오' 가 이 태풍 메치기를 하지 못하게 원천봉쇄합니다.

신 공태랑 나가신다 - 유도편 이야기.



그 때, 시로가 이 봉쇄를 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엇박이나, 변칙적 기술이 아니라, 그냥 '더욱 더 큰 힘' 으로 메다꽂아버립니다. 그러면서 무도는 '강'도, '유'도 정답이 아닌 '강유일체' 라는 멋진 말이 나오죠.

영화 <2012> 에서 느꼈던 CG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CG? 당연히 예상 했지요. 대놓고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에다가 대놓고 재난영화. 어차피 스토리텔링이야 할리우드 답안지 그대로 베꼈을 테고, 처음부터 끝까지 CG로 끝장을 볼 영화 아니냐. 게다가 같은 CG 를 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스펙터클한 CG로 러닝타임을 채워 넣었는지, 어디 한번 너희가 만든 것 보여줘 봐라. 조금이라도 흠잡을 데 나와만 봐라. 하는 일종의 억하심정 잔뜩 가지고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헌데, 그런 저를 어떠한 변칙도 없이, 영화 <2012> 는 그냥 순수하게 CG의 힘만으로 메쳐버리더군요. 영화의 초반부, LA 전체가 말 그대로 '땅이 꺼져버리는' 씬에서, 저는 정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정말로요. 땅이 제멋대로 갈라지며 춤추다가 끝도 없이 무너져내리고, 빌딩이 산산히 바스라져 붕괴되고, 지하철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버리는, 정말로 세상이 망해버리는 듯한 아비규환. 단지 그 씬 하나만 가지고도, 이제까지의 모든 재난영화의 그것과 맞먹는 듯한 스케일이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놀랐고, 그 다음엔 질렸으며, 그 다음엔 '이제 이런것까지 나왔는데 CG로 뭘 더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드는 CG


사실 영화의 CG는 그 이후로 디크레센도(decrescendo)의 느낌입니다. 러닝타임도 제법 길고, 워낙 전지구적 스케일의 지각변동이어서 감각이 무뎌진 것도 있겠지만, 일단 초반부의 도시 붕괴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은 확연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거의 흠잡을 데 없이, <2012> 의 CG는 무척 훌륭합니다. 디크레센도의 느낌이 난다는 것은 뒤로 갈수록 별볼일 없어진다는 건 아니고, 영화의 후반부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오는 쓰나미 같은 것을 보면서 사실 좀 '해도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지요. 좌우지간 CG에 쏟아부은 150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천문학적 돈의 액수가 아닌 그 결과물로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100억짜리 영화 한편 찍는것도 큰일이나 난것처럼 떠들썩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데에 '넘사벽' 이라는 표현을 쓰는거구나, 싶었죠.

 

이혼한 가족, 젊은 과학자, 미국 대통령, 돈, 성경, 희생.

 
위의 키워드들만 나열해 놓으면, 대충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도 2012 의 스토리 라인을 구상해보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하죠?) 존 쿠삭이라는 배우는 영화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서, 누군가 한 사람정도 주인공은 있어야 하기에 존재하는, 그 정도 무게감을 제공하기에 적절한 배우였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존 쿠삭이 맡은 이혼당한 남편, 그리고 전 부인, 반항기 있는 아들, 그리고 귀여운 딸로 구성된 가족. 그리고 재앙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대처할 젊은 과학자가 등장하고, 숭고한 가치를 신념으로 삼는 헌신적인 리더인, 미국 대통령. 그 대통령의 딸. (캐릭터들이 전형적이어도 너무 전형적이네요; 어쨌든.) 그들이 적절하게 얽혀 만들어 나갈 이야기라는 것이 사실 별거 있겠습니까. 멸망하는 지구를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도망다닐 수 밖에요.

그 다운 연기를 했던, 존 쿠삭.

2012년으로 끝나 있는 마야인(재미있게도 Maya 는 영화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3D 컴퓨터 그래픽 소프트웨어이기도 하죠)의 달력에서 착안한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전체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2012년 태양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핵이 들끓게 되고 그로 인해 지표면이 계란껍질처럼 바스라져 버린다는 과학적 고증(!)을 가지고, 그 재앙 속에서 인류는 어떠한 모습일까, 알아보는 것이 영화의 주된 목적이지요. 영화에는 말씀드렸다시피 정말로 '노아의 방주' 가 등장합니다. 다행히도 소설 '파피용' 처럼 우주로 도망가는 우주선을 만들지 않아서 영화 전체가 코믹스럽게 변해버리는 것만은 막았는데, 그렇다고 히말라야 산속 한 가운데에 만든 커다란 방주에 코끼리, 기린 등을 날라다가 싣는 장면까지 설득력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이 무너지고, 바티칸에서 인류 최후의 미사를 드리다가 성 베드로성당이 무너져서 사람들을 깔아뭉갠다거나 하면서, 감독은 거대 재앙 앞의 종교와 신앙이라는 부분을 대해 빈번하게 툭툭 건드립니다. '지구가 멸망하는데 무슨 종교 타령이냐' 하는 식의 까칠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비하라거나 조롱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적당히 까칠합니다.

문제는 '누가 방주에 타느냐' 겠죠. 글쎄요. 누가 타야 할까요? 영화의 답안은 꽤나 현실적입니다. 돈 내고 타라는 거죠. 영화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지불해야 하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의 뱃삯은 10억 유로입니다. 1조 7천억정도 되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겨우 손가락을 헤아릴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인류에게 귀중하다고 느껴지는 학자, 예술가 등을 선별해서 태워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별 거 없이 마지막 인류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돈이라는 게 좀 어이없습니다. 하지만 나름 납득할 만한 이유는 있습니다. 그 돈을 받아야 그 정도 방주를 제작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10억 유로를 내고 탑승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딸은 그냥 미국 대통령의 딸이어서 탄 것 같고, 미국의 관료들, 방주의 승무원들은 그냥 관료이고 승무원이기에 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살고, 밖의 사람들이 죽어야 할 마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 <2012> 에서 한번 깊게 생각해 볼만한 주제, 화두는 바로 이것뿐이었습니다.

 

누가 살아야 하고, 누가 죽어도 될 것인가.


영화는 의외로, 우리에게 쉽지 않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질문은 오히려 간단한 편이죠. 당신에게 삶의 선택권이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어야 할 때, 당신은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살게끔 할 것입니까?

만약, 다른 사람을 살게 한다면, 어떤 사람을 살릴 것입니까? 왜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비슷하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면, 어떤 사람을 죽게 놔둘 것입니까? 왜 그 사람은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까?

누가 살아남은 자가 될 것인가.

영화는 이 문제를 건드리고는 있지만, 진지하게 다루고 있지 못합니다. 아니, 진지하게 다루기는 하지만, 전혀 그 방법이 틀려먹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장면에서, 그 어긋난 표현 방법은 몹시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중에, 여러 대의 방주중 한 대에 문제가 생겨서, 수많은 사람들을 태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섣부르게 문을 열어 주었다가는 그 과정에 무언가 차질이 발생해서 전체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영화는 이 장면을 엄청나게 부풀립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존엄, 인륜을 운운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을 굉장히 거룩하고 숭고한 결정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자식들에게, 후대에게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 하면서 말이죠. 결국 방주에 탑승하고 계시던 각 나라 국가 원수들이 (그것도 G8 국가들) 하나로 뜻을 모아서 문을 열어 주자는 고귀한(?) 결정을 내리고, 문을 열어 주고, 밖에서 바둥거리던 사람들이 추가로 방주에 탑승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당시에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감동은 커녕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위화감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먼저 일단 밖에서 동동거리던 그 사람들은 전 세계 모든 인류가 어떻게 되든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자신들만 생존하겠다고 10억 유로를 내고 비밀리에 방주 탑승권을 구입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네 마네 하면서 고뇌에 차 있다가 인간다운 인간을 위해서 문을 열어준다는 결정을 내린 사람들 또한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자식들, 후손들 운운하면서 뭐라 하기에는 그들은 벌써 전세계 수십억의 인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자신들만 살겠다 도피한 비겁한 이기주의자들입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 도처에 남겨져 있는 '보통 사람들' 과, 방주 주위에서 옥신각신 하는 '선택받은 사람들' 간의 차이는 이미 극명합니다. 영화 내내, 그들은 그 돈없고, 힘없고, 이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인간적인 공감도 보내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도 알 권리가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다독여주고, 아버지는 딸에게 사과를 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라며, 그들이 죽음을 준비하면서 맞이할 수 있도록 하자. 라는 식의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 방주 바깥의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감독의 태도이기도 하지요. 삶과 죽음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라면서 영화는 어물쩡 넘어갑니다. 그래, 하긴 그렇긴 하지. 지구가 망한다는데 뭘 어쩌겠어. 하면서 그냥 수긍해 버릴 수도 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요? 방주 안에 있는 자와 방주 밖에 있는 자. 그 괴리에저 빚어지는 깊은 고뇌. 이러한 고민과 감정들을 정말 진지하게 다루었다면, 이 영화는 정말 인간 본성과 가치의 심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있는 영화로 탄생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였고, 그것이 롤랜드 에머리히 영화의 결정적인 한계입니다.

답은 물론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선택에 어떤 정답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차피 답 없으니까 많이 생각할 거 없어' 라고 스리슬쩍 넘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답 없는 문제이지만 지독히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결코 그 문제가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 만큼은 분명하게 각인시켰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한다고 해서 인생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식을 방주 위에 던져넣고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억만장자 아버지의 모습에서 거룩한 희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평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주어지는 '삶의 자격'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에서 인간 존엄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방주 안에 안전하게 살아남은 입장에서 방주 밖의 절규를 보며 슬프다 눈물짓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아파하고 어떻게든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서 '하나된 인류, 진짜 인간' 이라는 공감을 줄 수는 없었을까요?

그런 면에서 어떤 부분에서는 <2012> 는 불쾌함마저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는 그 안에서 제 안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했을런지도 모를 일이죠. 그래서 불쾌함보다는 불편함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순간. 과연 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 때의 저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도 아침 해는 조용히 떠오르고 있고, 우리가 딛는 땅은 변함없이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는 고민과 소통을 통해 서로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가슴 선뜩하도록 안도하게 만드는, 영화 <2012> 였습니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0. 20. 23:43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상세보기



오랜만의 만족스러운 영화.

일단,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만족스러운 영화를 보았다는 말로 리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만족스럽다는 기준은 참 주관적이고 애매모호합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총평' 인지라, 무언가 명확한 기준들을 하나 하나 내세워 구별짓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디스트릭트 9> 은 참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슴 어디엔가가 묵직한 것이 느껴지는 영화. 내가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내 삶이 해석당하는 느낌의 영화. 그런 일종의 감성적 포만감을, 디스트릭트 9은 주고 있습니다.

District 9 의 포스터



요하네스버그, 그리고 디스트릭트 9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거대한 외계 우주선이 멈추어 섭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랍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겠죠. 그런데 우주선 내로 강제 진입이 이루어지고,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외계인들의 실체가 밝혀집니다. 인간이 외계인을 보살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외계인 수용 시설이 만들어지고, 외계인들은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바로 디스트릭트 9 입니다.

호기심이 사라지고 난 후, 인간의 태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공존하게 된 외계인의 존재는 귀찮고, 거추장스러울 따름입니다. 외계인에 대한 혐오. 배척. 차별은 삽시간에 확산되고, 그들을 지능낮은 벌레라는 '프런' 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프런들은 물도, 음식도, 의약품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쓰레기 더미 속을 뒤지며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이에 외계인에 대한 강제적인 이주 정책이 실시됩니다. MNU(Multi-National United) 는 군 병력을 투입, 디스트릭트 9 의 외계인들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명목상은 더 나은 환경의 제공이지만, 귀찮은 외계인들을 한켠으로 '청소' 해 버리기 위한 수단이지요.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요하네스버그 상공의 거대한 우주선



이야기의 배경이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인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겠죠. 사전 지식 없이 보아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들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남아공 정부는 1904년 요하네스버그의 도시 빈민가인 쿨리타운스(Coolietowns) 에 거주중인 유색인종들을 도심으로부터 남서부 20km에 위치한 클립스프룻(Klipspruit) 으로 강제 이동시킵니다. 대외적인 이유는 빈민층 주거환경 개선이었지만, 움푹 파인 분지 지형에 하수도 시스템으로부터 3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클립스프룻은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죠. 사실 진짜 목적은 요하네스버그에 유입된 백인들에게 주택 부지를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로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로 불리우는 소수 백인과 다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인종분리 정책이 법제화되면서, 남아공은 인종차별문제의 가장 대표적인 국가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록 92년에 인종분리정책 폐지 이후 17년동안 남아공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뿌리깊은 인종 문제는 남아공의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아공 출신 감독인 닐 블롬캠프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이 인종 차별 문제를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파고듭니다.



평범하게 사악하고, 보통으로 착한, 비커스.

영화의 주인공은 MNU 소속의 '비커스'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사무실에서 펜대나 굴리고 있을 법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무직 직원입니다. 그가 디스트릭트 9 이주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의 애인이 바로 MNU 국장의 딸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낙하산 인사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인간 비커스


그는 외계인들을 디스트릭트 9에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한 합법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해, 거주중인 외계인들에게 형식적인 서명을 받으러 다닙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숨겨진 목적은 외계인들이 숨기고 있는 외계인 무기들을 찾아내어 압수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착실하게도 수행하는 그는 평범하게 악합니다. 외계인들의 알을 불태울 때 팝콘 터지는 소리가 난다며 낄낄대고, 외계인의 자식을 가지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커스가 지독한 외계인 혐오주의자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는 그냥 평범할 뿐이죠.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고로 외계 물질(유동체)에 감염되면서 상황은 바뀝니다. 그의 팔이 외계인의 팔로 변하게 되자, 외계인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외계인 뿐이기에 MNU는 그를 가지고 갖가지 생체 실험을 하기에 이릅니다. 해부당하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한 비커스는 디스트릭트 9 으로 돌아갑니다. 우월하고 우등하던 지배와 억압의 위치에서, 삽시간에 비커스는 인간의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욕망의 희생자로 전락합니다. 쓰레기를 뒤지고, 움막에서 잠들고, 고양이 먹이를 게걸스럽게 손으로 집어먹으면서, 평범했던 비커스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변모해갑니다.

영화의 주인공, 외계인 크리스토퍼

그리고 디스트릭트 9 에서 비커스는 또 한명의 주인공, 외계인 크리스토퍼를 만나게 됩니다.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지구에 머무르던 20년동안 '유동체' 를 모았는데, 이것으로 지하의 수송선을 띄운 뒤 모선으로 복귀하여 고향 별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동체는 바로 비커스를 감염시켰던 그 물질이고, 때문에 이 유동체는 MNU 본부로 압수당해 버린 상태입니다. 크리스토퍼는 비커스에게, 이 유동체를 구해 오면 모선에 있는 의료기로 비커스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비커스와 크리스토퍼는 둘 다, '인간다운 삶(?)' 의 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MNU 에 침투해서 유동체를 가져오기로 결심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MNU 지하 4층에서 유동체를 발견해서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그 곳에서 크리스토퍼는 끔찍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인간들이 자신의 동족을 붙잡아 생체 실험을 한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실험대 위에서 잔인하게 파헤쳐져 있는 동족의 시체를 보고 심한 충격을 받은 크리스토퍼는 분노합니다. 디스트릭트 9 으로 돌아온 뒤, 크리스토퍼는 낮게 중얼거립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군대를 불러 올 것이다."


비커스를 잡으려는 MNU, 그리고 비커스를 잡아 먹어서 그 힘을 가지려는 남아공 갱단 두목, 그리고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비커스와 크리스토퍼간의 피과 살이 튀기는 잔인한 싸움이 디스트릭트 9 에서 펼쳐집니다. 크리스토퍼와 함께 목숨을 걸며 탈출하던 비커스는, 결국 자신이 희생하고 크리스토퍼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선택을 합니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보통 사람이던 그가 다른 종족, 다른 존재를 진심으로 위하고, 공감하며, 헌신하는 영웅으로 변모합니다. 끝내 크리스토퍼는 모선으로 복귀하게 되고, 거대한 모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모선은 떠나가고, 남은 외계인들은 디스트릭트 10 으로 이주하게 되자 인간들은 기뻐합니다. 훗날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아종에 대한 차별. 무시. 포악. 약한 상대에 대한 폭력. 우월의식. 탐욕. 그것으로 인류는 멸망하리라.

<인디펜던스 데이>, <우주 전쟁>, <화성침공> 등 외계인의 인류 침공에 대해 그렸던 영화는 많습니다. 그러고보니 저 또한 그런 소재로 소설을 쓴 적도 있군요.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외계인의 이유없는 정복욕과 사악함을 전제로 하여, 그에 대한 인류의 저항을 숭고하게 그립니다. 아무 죄 없이 침공받는 인간들은 억울한 희생자이며, 그들의 싸움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 의 접근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들보다 조금 못해 보인다고 해서 인류는 외계인을 학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대한 욕심으로 외계인을 생체실험하며,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외계인을 해부합니다. 그 잔인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능으로 인해, 크리스토퍼는 분노하고, 군대를 데려와 복수할 것을 다짐합니다. 외계인의 본래 과학기술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아마도 <디스트릭트 9> 의 세계관에서, 인류는 얼마 못 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영화의 포스터. 다른 종에 대한 '차별' 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이 비유는 직유법처럼 명백합니다. 여전히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집단' 에 대해 선을 긋고, 배척하며, 심지어 한없이 잔인해집니다.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러지 못한 집단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은 너무나도 흔한 일입니다. 피가 튀기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폭력 또한 세계 도처에 여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멸시와 차별로 다른 이를 상처주고 좌절하게 하는 일은 우리 바로 곁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다고, 현명한 일이라고 학교와 선배들은 가르치며, 도덕과 윤리, 희생과 헌신은 고리타분하고 어리석은 한심한 소리로 치부됩니다.

정말로, 인류는 이로 인해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대는 가고, 피터 잭슨의 시대가 오다.

영화의 원작은 같은 감독, 네일 브롬캠프의 6분짜리 단편 'Alive in Jobug'(2005) 입니다. 이것을 눈여겨 본 피터 잭슨의 제작으로 <District 9> 은 탄생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았던, CG를 하는 친구들끼리 형성된 공감대는 이제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대는 가고, 피터 잭슨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인물의 이름은 직접적이기보다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전자가 미국 중심의 가족적이고 오락적인, 소위 우리가 알고 있던 '전형적인' 헐리우드 상업영화를 말한다면, 후자 즉 피터 잭슨의 영화는 그 주제와 스토리텔링, 영화적 기법에서 새로운 할리우드의 방향성을 제시해 나가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잭슨... 은 아니고 둘다 피터잭슨. (응?)


기법 이야기가 나왔으니, 영화의 CG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은 거의 흠잡을 데 없이 매우 훌륭하지만, 정작 영화는 3천만불이라는 헐리우드 영화치고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러닝타임 상당부분을 TV 뉴스 화면, 인터뷰, CCTV 화면 등으로 현실감과 현장감있게 구성함과 동시에, 정교한 CG 에 대한 부담감을 대폭 줄인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린 것입니다. CG를 하는 입장에서, CCTV와 같이 낮은 화질 안에 그럴듯한 CG 캐릭터를 넣는다는 것은 부담이 확 줄어드는 일입니다. 이제 CG 물량으로 쏟아부어서, 관객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영화는 한계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결국 영화가 돌아갈 곳은, 얼마나 그럴듯하고 심금을 울릴 만한 '이야기' 로 관객을 설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헐리우드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가장 미국적인' 상징 중의 하나인 헐리우드 영화가, 과연 인류의 차별과 억압을 해소시키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지 그것조차 이미 경제적, 문화적으로 우월함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의 참신한 오락거리, 새로운 재밋거리로서의 소재일 뿐일까요. 그러나 적어도 <디스트릭트 9> 은 우리 가운데 그러한 자그마한 논쟁거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만한 영화였습니다.

좋은 영화를 원하신다면, 한번쯤 보세요.

ThEnd.


p.s. 감독의 6분자리 단편 'Alive in Jobug' 의 동영상입니다.


posted by cimple 2009. 10. 12. 23:25


어글리 트루스
감독 로버트 루케틱 (2009 / 미국)
출연 제라드 버틀러, 캐서린 헤이글, 셰릴 하인스, 브리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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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나인
감독 셰인 액커 (2009 / 미국)
출연 일라이저 우드, 제니퍼 코넬리, 존 C. 라일리, 크리스핀 글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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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나비처럼
감독 김용균 (2009 / 한국)
출연 조승우, 수애, 천호진, 최재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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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할 시간은 줄어들고... 그나마 짬을 내서 본 영화들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사그라들어 버리기 전에 붙들어 보려 합니다. 하지만 그다지 큰 감동을 받거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영화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별반 할 이야기가 많지는 않군요. 이런 저런것이 불만이었다라고 꼬투리를 잡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이 그다지 유익해 보이지도 않고, 시간도 부족합니다;


대사만으로도 19세가 가능하다 - 어글리 트루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생각하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 '어글리 트루스' 는, 그것이 진짜 'Truth' 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Ugly' 한 대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제라드 버틀러의 넉살좋은 매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캐릭터가 그런 대사들과 행동들을 뱉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웠을걸요.

로맨틱한 코미디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여자를 자빠트릴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그리고 여자는 남자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의 돈, 명예, 신분, 이미지를 사랑할 뿐이라는 사실은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죠. 그리고 결국 그 '불편한 진실' 속에서도 이루어질 사랑은 이루어진다. 라는 해피엔딩은 유쾌하긴 했으나 무언가 남겨주지는 못했습니다.


액션을 보려고 이 애니메이션을 본건 아니잖아 - 9

쉐인 액커라는 천재 감독이 11분짜리 단편으로 아카데미 후보에까지 오른 뒤, 이것이 팀 버튼의 눈에 들어 장편으로까지 탄생한 애니메이션 '나인'.
인류가 기계문명의 의해 절멸하고, 대신 인류가 남긴 자그마한 봉제인형들이 인류의 존재를 대신한다는 것이 영화의 전체적인 컨셉입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우울한 재질감과 색조는 참 마음에 들었고, 봉제인형이라는 캐릭터의 '디자인' 자체는 참신함이 있었으나, 9명의 봉제인형들이 각자의 개성과 매력을 살리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스토리 라인도 사실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어려웠고, 대부분의 러닝타임이 액션씬으로 가득차 있어서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해한 내용을 두서없이 풀어보자면, 주인공인 '9(나인)' 이 실수로 자신의 친구를 희생시키고, 인간이 만든 기계를 깨워 버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위험에 뛰어들려 하며, 때문에 보수적이고 안전함을 추구하는 '1(원)' 과 갈등을 빚게 되죠. 결국 여러가지 모험을 거치면서 9개의 봉제 인형들은 인류의 마지막 과학자가 자신의 영혼을 나누어 담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기계를 물리치며, 다른 봉제인형들의 영혼을 해방시키고, 그들의 영혼이 하늘에 닿아 생명의 근원을 담은 비를 땅에 내린다는 것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이었습니다.

조금 더 지루하지 않게, 납득가는 캐릭터로, 짜임새있는 스토리로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11분짜리 단편을 장면으로 뻥튀기시킨 한계였을까요.


아, 정말, 이건 아니잖아 - '불꽃처럼 나비처럼'

최근에 봤던 영화들이 줄줄이 '별로네' 하는 반응을 이끌어 냈는데,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 정점을 찍었습니다. 정말 영화를 보면서 불만이었던 것이 너무도 많았지만, 쓰면 괜스레 말만 길어질 것 같고, 그냥 3줄로 요약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전혀 개연성 없고,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었던 CG.
너무도 개성없는 캐릭터 무명, 별다른 매력없이 어중간해진 명성황후 민자영.
납득할 수 없는 사랑, 이해할 수 없는 라이벌구도, 뜬금없는 애국심에 대한 호소.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OST, 이선희씨가 부른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었습니다. 노래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슬퍼지는 이 기분은 무엇일까요.

OST 나 들으면서 포스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