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09. 2. 4. 10:02
대한민국을 뒤흔든 연쇄살인범과, 사형 존폐론의 논쟁이 뜨겁습니다.
그 슬프도록 참혹한 현실이라는 문제 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와 세 편의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 덱스터(Dexter)


얼마 전, 인기있는 미국의 드라마 <덱스터(Dexter)> 시즌 1을 봤습니다. 약간 충격적인 내용을 가진 이 드라마는, 주인공인 '덱스터 모건' 이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하는 살인마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덱스터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인데, 그를 입양한 그의 아버지 해리는 그런 덱스터의 본성을 알고 그에게 '살아남는 법', 즉 '마땅히 죽여도 되는 인간'을 죽임으로써 그의 살인 본능을 충족시키게끔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경찰의 혈흔분석가로 일하게 된 덱스터는 자신의 정보력과 수사력을 이용하여 흉악한 연쇄 살인범들을 잡아 묶어 놓고 죽인 다음, 그의 피를 채집하여 프레파라트에 차곡 차곡 보관합니다.

아직까지 사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집행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만들어진 드라마이기 때문일까요. 법의 테두리 밖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여 살인을 '집행' 하는 덱스터 모건의 이야기는 충격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엄연한 연쇄살인범임에도 불구하고 유쾌한 유머 감각, 뛰어난 업무 능력, 보통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보호본능 자극 등으로 덱스터는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가장 합당한 방법을 찾아서 가장 죽을 만한 놈들을 죽이는 덱스터의 철학. 사실, 저도 그의 모습이 무척 흥미로우며 드라마 또한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마땅히 죽어도 될 놈에 대한 잔혹한 폭력의 자행. 그것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용인과 수긍. 살인을 참을 수 없기에 살인자를 죽이는 이 덱스터의 철학이 지금 현재 우리의 논쟁과 어떻게 관련지어질 수 있을까요.


2.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포함, 앞으로 언급될 영화들은 워낙 유명한 영화들이기 때문에 줄거리나 등장 인물들을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별 관계 없을 법한 전쟁 영화를 들고 나온 까닭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한 인물과, 그가 했던 행동 때문입니다.



예, 바로 '업헴' 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유태인 병사와 독일군의 처절한 백병전 중에 대검이 유태인 병사의 심장에 서서히 밀려 들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좀 민감한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장면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며칠 동안 몸살 비슷하게 온 몸이 아파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이 상황에서 주저하며 발을 옮기지 못하는 '업헴' 이 미치도록 밉고 싫었지요.

결국,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업헴' 은 이 독일군 병사를 총으로 쏴 죽여버립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지요.

"널 살려두는게 아니었어."

이 자는 바로 '업헴' 이 인권을 문제로 놓아 주었던 독일군 포로였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처음 독일군 포로를 놓아 줄 때는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믿었고, 업헴이 독일군 포로를 쏴 죽일 때, 그 때는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옆에 서 있는 다른 독일군은 쏴 죽이지 않고 그냥 보내주는가, 원망하면서 말이지요. 영화를 보며, 저는 전쟁이 가져다주는 폭력성에 길들여져 버렸나 봅니다.

지금도 그 독일군 병사를 업헴이 죽인 것에 대해서는 후련함을 느낍니다. 만약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제 머릿속에는 굉장한 불편함과 거북함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는 영화에 따라붙었을 겁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결부되어 있지만, 이 살인의 판결, 그리고 그 판결의 합당함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3. 공공의 적


'공공의 적' 조규환(이성재)은 연쇄살인범입니다. 그는 부모를 죽이고,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잊을 뻔 했지만 택시 기사도 죽입니다. 사실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죽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더 이상 택시 기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이 뚜렷한 목적을 가진 영화적 장치인지, 아니면 단순히 범인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인지는 몰라도 좌우지간 의아했습니다. 그도 택시기사이고, 누군가의 가족일 텐데 말입니다.

하여간 <공공의 적> 을 언급한 것은 영화의 결말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하고 경찰을 조롱하기 위해 장난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공공의 적' 조규환을, 무식한 형사 강철중이 끝내 궁지로 몰아 넣습니다.

그런데, 강철중이 조규환을 한강 둔치에서 죽여버립니다.

그때, 사실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마약을 뿌리며 사형을 언도하는 강철중의 모습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 느꼈던 일종의 후련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왜 강철중이 직접 죽여야 하는가, 왜 저기서 조규환이 죽어버려야 하는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것으로, 사회 정의가 구현된건가, 이것으로 세상은 얼마나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나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아직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4. 추격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500만명 이상의 많은 관객들이 함께 보고, 그 참혹함에 몸서리쳤던 영화 <추격자> 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생략하고, 역시 영화의 결말 부분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범인을 붙들고, 자기 자신도 거의 죽을뻔한 위기에서 지영민(하정우)의 멱살을 잡고 장도리를 치켜든 중호(김윤석). 그 때 제 마음속으로 '내려쳐라, 내려쳐라, 확 내려쳐 버려라' 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중호는 장도리를 내려치지 않고, 또 치려는 찰나 동료 형사들이 제지하여 범인은 그의 손에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장면을 다시 돌아보면, 그가 그 장도리를 내리쳐, 마치 지영민이 그랬던 것 처럼, 그의 머리통을 피가 사방에 튀도록 박살냈다면, 과연 마음이 후련해졌을까요. 이것은 또 다른 고민을 낳게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추격자> 가 그런 결말을 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하는 연쇄 살인범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내린 이 결론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권력욕이라는, 그 더러운 이름의 괴물.

이번 연쇄살인 사건과, 다른 연쇄살인 사건들을 접하며, 가장 치가 떨리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던 것은 바로 살인범들의 '권력욕의 충족' 행동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영화 <추격자> 에서 지영민이 미진을 묶어두고, 화장실에서 팬티 바람으로 말을 거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진아. 살고싶어? 왜 살아야 하는데?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 - 지영민, <추격자> 中

실제로 연쇄살인범들은 그들이 잡은 여성들을 묶어놓고, 말을 걸고, 그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권력욕을 마음껏 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였습니다.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 조차 피해자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살인의 순간보다(물론 살인이 저질러지는 순간을 가벼이 여기는 발언은 아닙니다.) , 그렇게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는 권력욕을 충족시키던 그 순간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그 때 여성이 느꼈을 지옥같은 공포, 고통, 좌절. 그리고 그 틈새에 있는 실낱같은 희망의 고문.

이러한 것들을 생각했을 때, 이런 짓을 일곱 명에게, 일곱 차례나, 재미가 들려서 계속 되풀이했던 살인범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형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연쇄살인범에게서 느끼는 가장 악질의 범죄와 이유가 같습니다.
바로 권력의 획득에 대한 악착같은 욕구와, 획득한 권력을 누군가에게 마음껏 휘두르고 싶어하는 그 폭력적인 욕구에 대한 저항입니다.

저는 국민의 생명의 합법적으로 빼앗고, 말고의 권리를 국가에게 이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 집단이 그 권력을 제대로 이용하리라는 신뢰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도, 국민의 생명에 대해서 국가가 바라보는 태도가 어떠한가를 생각할 때 더더욱 그런 권력을 국가에 주고 싶지 않아집니다. 제가 볼 때, 현재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느끼고 있는 권력욕은 연쇄살인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항할 힘도 없는 연약한 이를 묶어두고, 희롱하고, 조롱하고, 헛된 희망을 품게 하고, 심지어 반성하지도 않고, 이제까지와 같은 쾌락을 영구히 누리려 합니다. 제가 그들을 지나치게 나쁘게 보고 있는 것인가요?

사형제도의 부활, 정확하게 말하면 사형 집행의 부활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적인 권력을 선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심각하고 깊은 수준의 논의는, 이미 많은 분들이 하고 계시고, 훨씬 좋은 의견과 논거들이 존재하므로 법과 인권 문제에 대해 무지한 제가 더 이상 떠들 부분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지 저는, 죽여버리고 싶은 범죄자가 생겨서, 사형이라는 권력을 선뜻 정부에게 넘겨주는 것은 너무 위험한 결정이 아닌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와, 세 편의 영화가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이 문제는 정말 굉장히 복잡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권력욕의 싸움에서 청결함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권력욕이라는 더러운 이름의 괴물을 마음 속에 키우고 있으니까요.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만나, 재미라는 명목으로 상대방을 희롱합니다. 상대방이 내가 충분한 희롱을 하기까지 계속 게임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이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의 권력에 만족함을 느낍니다. 아니면, 내가 미물이라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괴로움은 어떻습니까? 군대에 있던 시절, 잔반통에 들어간 쥐에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삶아 죽이면서, 낄낄거리는 동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괴물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저 또한 가식적으로 청결함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다들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정말 더럽고 나쁜 사람이 저이지요. 들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왔던 과거를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 다시는 다른 이의 고통을 즐거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야 좀더 나은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휴. 그러고 싶네요.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