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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mple 2009. 9. 5. 15:48


해운대
감독 윤제균 (2009 / 한국)
출연 설경구, 하지원, 박중훈, 엄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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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운대>가 천만 관객을 넘어섰습니다. <실미도>(1108만), <태극기 휘날리며>(1174만), <왕의 남자>(1230만), <괴물>(1301만) 에 이어 한국 영화사에 새겨질 5번째 대기록입니다. 천만 관객이란 생각할수록 경이로운 수치입니다. 전 국민의 4분의 1 가까이 하나의 영화를 보다니요. 천만이라는 숫자를 넘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조그마한 나라의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국민이었나, 참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어지는 관객 수입니다.

영화관을 찾은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천만 관객이라는 수치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자 그제서야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사실 개봉 전부터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는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훌륭한 영화를 사전에 알아보는 안목은 굉장히 낮은 편이지만 (흑...;;) <해운대> 는 뭔가 석연찮았습니다. 뭔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별 거 없을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뚜껑을 열어본 다음 튀어나온 천만이라는 수치는 사실 놀라웠습니다. 그 수치는, 단순한 입소문 이상의, 영화적인 재미와 감동을 보유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는 <실미도>와 <왕의 남자>도 천만 관객의 영화답지는 않았다고 봅니다만.)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대체 2009년 여름, 우리나라 국민들이 원하는 그 어떤 것을 영화 <해운대> 가 충족시켜 주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감상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갸우뚱' 입니다. 일단 영화가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천만명이라는 관객이 볼 정도로 대단한 작품인가, 라는 질문에는 즉각 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천만이라는 팩트 또한 실제입니다. 그래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영화 보는 눈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저만 재미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해운대> 에서는 천만 관객의 명백한 요소를 찾기가 정말 어려웠는걸요. 자세한 이야기는 뒤이어 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이번 결과는 기이하다 싶을만큼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형 재난영화' 해운대.

'한국형 재난영화' 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헐리우드의 재난영화 공식에서 벗어나, 재앙 앞에 선 우리의 모습,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기에 앞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헐리우드의 재난영화 공식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의 영화들이 떠오릅니다. 가장 비슷하다고 볼수 있는 <투모로우> 부터, <볼케이노>, <단테스 피크>, <트위스터> 와 같은 옛날 자연재해 영화들, <딥 임팩트>, <아마게돈>, <코어> 와 같은 인류를 멸망시킬 재난에서부터 <포세이돈 어드벤쳐>, <타워링>, <데이라잇> 등과 같은 단일 사고로 인한 재난 영화까지. 이러한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공식들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 물량공세. 스펙터클.
2. 극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
3. 희생과 헌신, 사랑.

이 공식에서 벗어나서, '한국식 재난 영화' 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연출력과 기술력의 부재로 인한 불가피함이었는지, 아니면 감독의 확고한 의지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벗어나긴 벗어났습니다. 해운대에 밀어 닥치는 메가쓰나미는 영화 후반부에 잠깐 등장할 뿐이므로 물량공세를 벌이는 1번 공식을 탈피했고, 대신 영화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한국적인 정겨운 캐릭터들이 벌이는 코믹하고 즐거운 드라마에 할애했습니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밀어닥치는 메가쓰나미로 인한 상황을 극복한다기보다는, 그저 그 속에서 허우적댈 뿐이므로 2번 공식에서도 탈피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3번 공식인 희생과 사랑은 매우 억지스럽게도 충실합니다. 하여간 한 두가지가 아니었던, 그 '한국식 재난영화' 에서 느꼈던 위화감을 하나씩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력한 주인공, 만식(설경구), 연희(하지원)

이 영화가 재난영화인가 아닌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끔 만든 것은 바로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었습니다. 영화는 해운대 토박이 어부 청년인 만식과 횟집 아가씨 연희, 이 둘의 이루어질듯 말듯한 사랑 줄다리기를 큰 관심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TV 앞에서 자주 보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두 명의 남녀 주인공들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라는 설정이 추가되고, 연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가 만식 때문이었다는 비밀 하나쯤 덧붙이면 완벽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코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들입니다. 이걸 '한국식' 이라고 부른다면, 나름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영화 속에서는 여러 가지 갈등 구조가 존재합니다. 연희와 만식과의 갈등, 연희와 만식의 어머니와의 갈등, 지역 유지인 억조(송재호) 와 만식 사이의 갈등. 쓰나미는 이들의 이야기에 있어서, 갈등을 해결하거나 상황을 반전시키는 그 어떠한 필연이나 개연도 마련해주지 못합니다. 단지, 메가쓰나미가 밀어닥치고, 그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재앙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스리슬쩍 갈등이 해소된다는 식입니다.

억조(송재호)와 해운대 사람들간의 갈등을 봅시다. 무엇이 해소되고, 해결되었을까요? 억조가 돈/권력 때문에 해운대 사람들과 마찰이 빚어졌고, 이는 굉장히 골이 깊은 갈등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재앙이 닥치고, 팔 한번 내밀어 만식(설경구) 한번 붙들어주면 화해가 되는 것이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는군요? 문제의 중심에 있던 억조(송재호)가 흘러가는 간판에 맞아 안타깝게 죽어가는 것으로 그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고 해결하려는 영화의 문제해결방식은 납득하기 어려운 방법이었습니다. 어떠한 감정적 회복도, 진심의 공개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다른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나미가 끝난 다음에 특별한 이유 없이 연희는 다시 만식과 함께하기로 결정하고, 만식의 어머니는 결혼을 승낙합니다. 큰 일을 함께 겪으면 '사는게 다 그런거지 뭐' 하고 그렇게 좋게 좋게 살게끔 되는 것일까요. 뭐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것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 진행인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전히 난감합니다.

두 사람은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사실상 하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그게 우리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대재앙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무력한 모습. 그저 도망치고, 매달리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전부인 모습.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영화의 주인공 아닙니까. 그들이 무엇인가 보여주기를 바랬습니다. 쓰나미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 가운데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예를 들면 만식은 영화 초반의 사고 때문에 폭풍에 대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면, 쓰나미가 밀어닥쳤을 때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모습을 그려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끝까지 평범하게 끝나는 것이 아닌, 평범 속에 담긴 우리 안의 영웅을 생각해봄직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무능한 전문가, 김휘(박중훈) 박사와 그의 가족.

다른 모든 인물은 그렇다고 치고, 영화에서 유일하게 쓰나미와 관련있는 인물은 김휘 박사(박중훈) 입니다. 따라서 그는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가 재앙에 맞서서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없었을까요? 아주 약간, 먼저, 쓰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 또한 쓰나미가 일어나자 마자 허둥대고,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죽어가는 그냥 보통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무력한 모습을 인간미라고 포장해 버리기에는,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던 전문가 아니었을까요. 사고가 발생하자 마자 자신의 자리를 비워버리고 딸을 구하러 갔다가, 아내하고 죽는 것이 전부인 전문가. 이것이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네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김휘의 아내인 유진(엄정화)의 마지막 모습들은 억지 감동, 억지 설정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딸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서서히 물이 차올라 죽어가는 유진의 모습은, 우리들 마음에 충격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나 싶었고, 그 노골적인 안타까움 조장에 사실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괄시하던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죠.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대체 이 대목에서 유진을 살려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옥상에 올려 보내서 남편과 함께 한번 더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려는 것인가, 좀 불쾌하게까지 여겨지더군요. 딸을 구조 헬기에 태워 보내면서 외치던 김휘(박중훈)의 "내가 니 아빠다!" 는 딱히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밀려 오는 쓰나미 앞에서 남편의 넥타이를 고쳐 매어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너무 억지 감동을 짜내려 애쓰는 모습 아니었던가요. '딥 임팩트' 에서 혜성이 떨어지는 순간에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던 아버지와 딸의 상황만큼 절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지요. 김휘 박사라면,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라도 살아남을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리얼리티를 원했다면, 오히려 그 쪽이 낫지 않았을까요.

 

신파의 희생자들, 형식(이민기) 와 동춘(김인권)의 어머니.

구조대원 형식(이민기) 와 서울아가씨 희미(강예원) 의 사랑이야기는 '헐리우드의 공식'에서 벗어나는  대신 '대한민국 연애소설의 공식'을 판박이 해놓습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에서 본듯한 아가씨가 해운대에 놀러 와서는 돈 많고 재수없는 준하(여호민)의 꼬임에는 넘어가지 않고 구조대원과 눈이 맞아 졸졸 쫓아다니는데, 이를 질투한 준하(여호민)는 친구들을 불러 형식을 때려주고, 형식과 희미 사이에서는 오해가 생기고 뭐 어쩌구 저쩌구...

그러다가 쓰나미가 일어나자 형식은 준하와 희미를 구하기 위해 출동해서, 몇 번이고 헬기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결국 로프가 고장나자 <버티컬 리미트> 나 <투모로우> 에서 보았던 것처럼 로프를 잘라 자기를 희생합니다. 유진(엄정화) 의 죽음만큼이나 억지 감동을 짜내기 위한 불필요한 희생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차라리 두 사람을 안전하게 구해 내기만 했으면 어땠을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평범하고도 사실적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를 잘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동춘(김인권) 이라는 캐릭터는 잘 살려냈으면 훌륭한 캐릭터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동춘이 쓰나미 이후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것으로 보아, 평소에는 괄시받고 무시받던 얼간이 이미지였던 동춘이 정작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순수한 의도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그러한 '의외의 영웅' 이라는 면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이미지와 전개가 잘 드러나지 않았죠. 또한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동춘의 어머니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비중이 낮았고, '어머니' 라는 단어를 영화 안에 황급히 집어 넣은 무리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천만인가.

하지만, 결국 영화 <해운대> 는 천만 관객을 넘겼습니다. 이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인정하고, 높게 평가했다는 증거입니다. 수십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영화를 만들기도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수백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천만의 관객을 모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경이적인 일입니다. 이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죠. 아무리 저 혼자 '해운대 재미없더라. 그런데 대체 왜 본거야?' 라고 떠들어봤자 소용 없는 일입니다. 천만이라는 팩트는 저같은 일개 개인의 평가를 짓누릅니다. 왜 천만 관객일까요? 무엇이 천만 관객을 만들었을까요?

일단 '웃음이 있는 영화' 라는 요소를 들고 싶습니다. 해운대는 참 웃긴 장면이 많은 영화입니다. 설경구가 겔포스 대신 샴푸를 집어삼킨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이고, 심지어 쓰나미라는 대재앙이 일어난 다음에도 코믹한 요소를 삽입했습니다. (부산대교 위에서 이리저리 도망치는 동춘의 장면) 한국 사람들은 심각한 것 보다는 웃긴 것을 좋아합니다. 웃을 일 없이, 가슴 먹먹하고 답답한 일 많은 요즈음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2009년은 참으로 우울한 한 해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적당한 볼거리와 함께 적절한 웃음을 던져주는 해운대는 마침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가기 알맞은 영화가 아니었나 합니다.

두 번째로, '익숙함' 입니다. 드라마에서 보았을 법한 캐릭터, 연애소설에서 본듯한 스토리, 다른 영화에서 보암직한 장면들. <해운대> 는 우리에게 익숙한 코드들을 이리저리 끌어모아 모자이크처럼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신선하지는 않지만 친숙하고, 식상하다 싶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나왔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지만 손해보지도 않았다는 기분. 그 '본전치기' 를 <해운대> 는 보장합니다. 그리고 천만의 사람들이 그 안전한 본전을 약속받고서는 극장을 찾았습니다. 마치 최고의 명품은 아니지만, 빨간 색으로 Hit 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인터넷 쇼핑몰의 상품과도 비슷합니다. <해운대> 는 관객과의 그런 합리적인 상거래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나중에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부산' 과 '해운대' 라는 지역 자체의 요소입니다. 818만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친구> 의 경우에도, 부산을 배경으로 하여 강렬한 부산 사투리를 사용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나이드신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극장을 찾도록 만드는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여전히 부산은 우리나라 제 2의 도시이고,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부산 효과' 가 이번 <해운대> 에서도 작용하지 않았나 합니다. 열기 넘치는 해운대 해수욕장, 횟집에서 신선한 생선회와 함께 들이키는 소주 한잔. 걸쭉한 부산 사투리. 사직 구장에서의 야구 응원 등등, 영화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지역적 공감대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킵니다. 여기에 동조하게 될 부산에 살고 있는, 또 부산에 살았던 사람들만 극장을 찾더라도 이미 어느 정도의 흥행 수치는 보장된 것이었죠. 따라서 그들이 느끼는 '재미' 란 것은 사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100%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영화 자체의 재미인 것으로 포장되고 재생산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 나갑니다.
또한 영화 <괴물> 의 한강과 마찬가지로, 부산의 해운대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상당히 친숙한 장소이라는 것이 좀더 <해운대> 의 입소문이 신속하게 온국민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였겠죠. 따라서 그 곳에서 일어나는 대재앙이라는 설정에 대해 좀더 호기심이 들고 현실감있게 받아들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 정도가, <해운대> 가 천만이라는 관객을 넘길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해운대> 가 남긴 것들.

부산 해운대에 쓰나미를 일으킨다. 그런 컴퓨터 그래픽이 화제가 되는 영화라는 사실만으로, CG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해운대> 의 성공은 무척이나 반길 일입니다. 비록 해외 CG 회사에 거액의 돈을 지불해서 외주를 맡기고, 또 실제 작업은 국내 CG 팀이 소스를 받아 와서 새롭게 진행하는 등 이런 저런 잡음도 있었지만, 어쨌든 한국 영화의 CG 산업에 훌륭한 성공 사례를 남긴 것은 맞습니다. 이를 통하여 국내 CG 업계가 새로이 주목받고, 또한 이번 경험을 통해 시뮬레이터 개발 등 원천기술을 보유하려는 R&D 기반의 CG 회사들이 더욱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영화에 대한 안좋은 평을 잔뜩 써 놓았지만, 어쩌면 이것은 헐리우드의 스펙터클한 재난영화에 길들여진 제 탓일 수도 있습니다. <해운대> 는 경험 부족과, 예산 부족 가운데, 우리 손으로 직접 도전적인 시도를 통해 만들어진 훌륭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수천억원의 제작비를 자랑하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해, 우리나라는 100억의 예산을 들인 영화를 만들기에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니까요. 천만 관객은 그러한 한국 영화의 끊임없는 도전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이자,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더욱 과감한 시도들, 더욱 과감한 도전들이 이어져서, 경험이 축적되고, 노하우가 쌓여,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퀄리티와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영화들이 끊임없이 제작되기를 바랍니다.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