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10. 1. 4. 05:15

아바타
감독 제임스 카메론 (2009 / 미국)
출연 샘 워딩튼, 조이 살디나, 시고니 위버, 스티븐 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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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the king of the world!"

"나는 세상의 왕이다" 라고 외치는 제임스 카메론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 으로 전 세계 관객들과 오스카를 휩쓴 지 1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제임스 카메론은 극중 잭의 대사를 인용하여 시상대에 올라 이렇게 외쳤죠.

"I'm the king of the world!"

그의 이 말은 어찌 보면 오만한 대사처럼 들릴 수도 있겠습니만, 어쨌거나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의 영화 '타이타닉' 은 미국내, 그리고 전세계 박스오피스에 있어 여전히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타이타닉의 17주 연속 미국 박스오피스 1위의 기록은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키며, 타이타닉에 도전한다고까지 여겨졌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조차 4주 1위에 그친 것을 보면 단지 허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헐리우드에서,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왕' 입니다.

말 그대로 '공전의 히트' 를 기록한 영화, 타이타닉

2009년 12월, 12년만에 영화 'AVATAR' 로 왕이 귀환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딱히 큰 의미는 없지만, '왕의 귀환' 은 장차 타이타닉의 아성을 무너뜨릴 감독이 아닐까 여겨지는, 피터 잭슨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군요. 실제로 타이타닉에 이어 월드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고 있기도 하고요. 예, 쓸데없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피터 잭슨을 언급한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만은 아닌것 같군요. 쉬어빠진 헐리우드의 스타일과, 그 스타일의 유령들.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제임스 카메론 등으로 대변되는 그 낡은 스토리텔링과 연출을 혁신시킬 새로운 피는 누구일까. 새로운 감독은 누구일까.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하지만 그 역할을 마이클 베이가 감당하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찮습니다. 그는 헐리우드가 쌓아온 옛 영광의 끝자락에서 이전의 공식들을 충실히 재현해 나가고 있는 '클래식한' 감독이 아닐까 합니다. 새로운 변혁과, 신선한 흐름을 이야기할때, 그래도 사람들은 피터 잭슨을 많이 언급하고, 저도 동의합니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그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신선한 스토리텔링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져다 주었고, 그 변화의 물결을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라고 외치듯이 제임스 카메론이 '아바타' 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반향은 결코 조용한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세계는 그가 들고 온 한 편의 영화에 적지 않게 소란해졌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머릿속에 훨씬 오래전부터 그리고 있었다는 세계관과 스토리. 그는 그 모든 상상의 세계를 구현해 놓고, 12년 후 단지 그것을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마치 모차르트가 머릿속으로 이미 작곡해 놓고 단지 오선지에 옮겨 적었다 했듯이.


영화의 줄거리

'아바타' 의 포스터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자면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몇 개 있습니다. '원령공주', '포카혼타스', '라스트 사무라이' 등. 사실 이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특별한 말 없이 이런 영화들이 언급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영화 '아바타' 의 줄거리는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래, 지구는 환경이 오염되고 자원이 고갈되어 갑니다. 이 때, 지구인들은 외계 행성 판도라와, 그 판도라 행성에 묻혀 있는 어마어마한 대체 자원을 찾아냅니다. 허나 이 외계 행성 판도라에는 정체모를 외계 생물들과 함께 외계인 종족 '나비' 족이 살고 있습니다. 나비족은 비록 발달된 과학문명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연과 호흡하며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종족으로 그들 나름의 신앙 체계와 문화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이들과 접촉하기 위하여, 나비족과 인간의 유전자를 결합시킨 '아바타' 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사람의 신경을 아바타에 접속시켜, 이들과 만나고 이야기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영화는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쌍둥이 형의 죽음으로 인해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주인공 제이크 설리(샘 워싱턴) 는,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미 해병대원입니다. 그는 지구군(軍) 지도자인 마일즈 대령(스티븐 랭)으로부터 몰래 군사적으로 유용한 정보를 빼내올 것을 지시받습니다. 그 대신, 충실하게 임무를 이행하면 두 다리를 고쳐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말이죠. 제이크는 그렇게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아바타에 접속하게 됩니다.

파괴적 인간으로 대표되는 마일즈 대령

아바타의 몸을 입게 된 제이크는 우연히 나비족 추장의 딸 '네이티리'와 만나게 됩니다. 원래 제이크를 죽이려 했던 네이티리는 그가 대지의 신 '에이와' 의 알수 없는 선택을 받았음을 알고, 그가 정말 자격이 있는 자인지 알아보기 위해 자신의 종족 곁으로 데려옵니다. 나비족은 지구인들을 '하늘의 사람' 이라 부르며, 그들의 아바타 프로젝트 또한 알고 있기에 자신들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제이크를 적대시하고 멀리합니다. 제이크는 그들 안에서 함께 어울리며,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문화와 관습, 신념을 배워 나갑니다. 처음에는 충실한 정탐꾼 역할을 하지만, 점차 제이크는 자연과 함께하며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속에 어우러지는 나비족의 삶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모든 시험을 통과해 내고 멋지게 성장한 제이크와, 그 성장을 곁에서 도왔던 네이티리는 사랑에 빠집니다.

제이크와 네이티리 눈맞는장면

그러나 탐욕에 빠진 인간들은 끝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나비족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합니다. 인간들의 강력한 최신 무기 앞에서 물질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나비족은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어갑니다. 제이크는 자신이 이 모든 인간의 파괴를 도왔다는 책임감과, 나비 족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정체성을 증명하기 위해, 나비족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는 통제 불가능의 괴수를 조종하는 전설의 용사 '토르크 막토' 에 도전하여 성공하고, 나비족 뿐만 아니라 판도라 행성 전체 종족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성공합니다.

마침내 목숨을 건 최후의 전투. 하지만 여전히 화력에서 열세인 판도라의 원주민들은 처참하게 스러져 갑니다. 제이크를 도왔던 그의 지구인 동료들 또한 하나 하나 죽어갑니다. 그러나 절망이 가득하던 이 때, 판도라를 관장한다는 '에이와' 의 도움으로 판도라 행성 전체가 인간들을 공격합니다. 인간 군대는 패퇴하고, 자신들의 행성으로 쓸쓸히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제이크는 에이와의 도움을 통해, 더이상 아바타가 아닌, 진짜 나비족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입니다.

인간들의 판도라 침공

인간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서로 다른 종족간의 화합과 이해를 다룬 전체적인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나쁘지 않고, 오히려 훌륭했다고 평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도 몇 가지 있었습니다. 딱 3가지만 이야기하면, 제이크와 네이티리의 사랑이 특별한 계기 없이 너무 쉽게 이루어졌다는 점, 제이크가 '토르크 막토'가 되는 과정이 너무 쉽게 처리되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영화의 가장 큰 위협이나 적은 주인공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스토리텔링의 암묵적인 룰이 존재하는데, 마일즈 대령을 죽이는 것이 제이크가 아니라 네이티리였다는 점. 이 세 가지가 제가 생각하는 영화 아바타에서 아쉬웠던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또 각각의 요소에 대해서 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름의 이유를 들어 보니 그것들 또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고 납득되어, 이것들은 저만의 아쉬움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습니다.


"I see you"

누가 누구의 꿈이고, 누구의 아바타인가.



영화에서, 아바타에 접속하는 것은 마치 꿈처럼 묘사됩니다. 아바타에 접속해 있는 동안의 제이크는 진짜 자신이 아니지만, 두 발로 뛰어다니고, 나비족과 함께 어울리며 오히려 '진짜 자신' 을 찾아갑니다. 마치 꿈 속의 일들처럼 판도라 행성의 삶은 아름답고 신비롭게 그려집니다. 그러나 접속을 해제한 제이크는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과, 탐욕에 물들어 있는 인간들을 보며 점차 혼란스러워합니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그리고 진짜 자신은 누구인지. 정말로 '인간답다' 는 것은 어떤 것인지. 숱한 질문이 제이크와, 영화를 보고 있는 저를 괴롭혔습니다.

"i see you" 는 나비족의 서로에 대한 인사입니다. 이 인사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철학적 논의들이 영화팬들 가운데 분분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I see you" 는 말 그대로 "나는 당신을 봅니다" 입니다. 그리고 굳이, 그 인사의 의미를 담는다면, 우리들이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면서 상대방의 평안함을 묻는 것을 중요시 하듯이, 나비족에게 있어 눈앞의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존재와 나의 교감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인삿말에 '나' 와 '너' 그리고 '본다' 가 함축적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름다운 네이리티.

아바타에 접속해 있는 제이크는 처음에는 네이티리와 교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나비족의 철학과 생활을 이해하며 거기에 동화되자, 네이티리는 제이크가 가지고 있는 본래 성품을 알게 되고, 그 존재의 주체와 깊이 교감하게 됩니다. 사랑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 존재의 주체는 그 껍데기가 '인간' 이든 '나비족' 이든 상관 없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인간 모습을 한 제이크를 네이티리는 만나게 됩니다. 작고 초라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지만, 네이티리는 그를 향해 손을 뻗으며 부드럽게 말합니다.

"I see you."

끝을 모르고 발달하는 물질 문명의 폐해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과 파괴 본능. 나와 다른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함. 그 모든 인간들의 '너무도 인간다운', 또는 '너무도 인간답지 못한' 면을 꼬집으면서, 제임스 카메론이 제시한 해답은 "I see you" 입니다. 서로의 존재를 진지하게 인정하고, 껍데기에 신경쓰는 것이 아닌 그 내면의 존재 자체에 주목하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라면 반목과 갈등, 차별과 억압은 해소될 것이며, 그것이 인간과 자연 사이라면, 자연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의 무분별한 파괴와 살육은 해소될 것이라는 것. 그가 12년동안 머릿속에 들어있던 모든 스토리를 응축시켜 빚어낸 단 문장의 답변입니다.



제임스 카메론, 몰입감의 야망을 드러내다.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 에 반대하여, '외계를 침공하는 지구인' 이라는 상상력은 아마 누구나 한번쯤 해볼 수 있을 법한 상상입니다. 그러나 전자보다 후자 영화를 실현시키기가 아마도 훨씬 어려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 '낯선 세계' 전체를 통째로 만들어서 영상에 담아야, 사람들로 하여금 저것이 지구 어딘가에서 세트를 지어놓고 연기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임스 카메론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의 머릿 속에 담긴 세계 전체를 '믿을 만한' 영상으로 담아낼 만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력을 12년동안 기다린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건 일종의 자신감이었을수도 있겠죠. 내가 아니면, 이런 스케일의 상상력을 나보다 먼저 실현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단지 제임스 카메론이 의도한 '몰입감'은 최첨단 CG를 통해 실제와 같은 세계를 만들어, 그것을 화면에 가득 채워,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진짜처럼 여기게 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타이타닉' 을 통해 그는 관객이 기존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몰입의 끝을 보고, 속된말로 '뽕을 뽑았다' 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 컴퓨터 그래픽 기술력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어디까지나 관객이 '진짜같은' 영상을 보고 즐긴다는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관객이 '진짜같은' 영상을 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관객이 '진짜' 를 보기를 원했습니다.

3D 입체로 펼쳐지던 판도라 행성

지금 한번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바로 이 세계가 '진짜' 입니다. 그리고 모니터 안을 들여다 보십시오. 바로 '진짜같은' 영상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궁극적으로 영상이 가야 할 방향은 '진짜' 라고 믿었습니다. 사실상 그는 2D 평면상에서 컴퓨터 그래픽이 가져다줄 수 있는 몰입감의 한계를 예견했고, 때문에 그는 관객이 '진짜' 에 완벽하게 몰입하도록 만들고 싶다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3시간 짜리 3D 영화로 제작된 '아바타' 입니다.

다음 세대의 영상 매체를 보통 우리말로 지칭하기를 '실감미디어' 라고 부릅니다. 실감미디어는 단지 3D 영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촉각, 후각 등을 포함한 오감을 만족시키는 미디어 컨텐츠를 말하며, 단방향 전송이 아닌 사용자와의 인터랙션을 포함하고, 지금보다 더욱 큰 화면에 고화질의 영상, 더욱 큰 대역폭의 전송기술 등의 개발 또한 함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안경이 필요없는 입체 영화, 가정에서도 볼 수 있는 3D TV, 들고 다닐수 있는 모바일 3D 기술 등등이 벌써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고, 관련 표준 제정에 각국이 열을 올리고 있으며, 눈치채셨겠지만 게임 산업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진짜' 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실감미디어의 개발은 결국 궁극적으로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체의 통합을 의미한다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 '입체영화' 가 가야할 길도 멀다.

물론 아직까지 3D 기술은 부족합니다. 당장 영화 '아바타' 만 하더라도 몰입감있게 충분히 즐기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습니다. 특수 안경을 착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고, 화면의 어디를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눈이 피로하며, 디테일이 뭉개진다던가 색감이 흐려지는 단점등이 남아 있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관련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즉, 아직까지는 3D 입체 영상 기술 하나만 해도 갈 길이 멀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인간이 몰입감을 느끼는 이유가 단지 영상, 기술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훌륭한 배우의 연기나, 흡입력있는 스토리 전개가 더욱 인간을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3D 기술력이 오히려 영화의 감상을 방해하고, 집중력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저는 '아바타' 가 그랬습니다. 아바타의 3D 기술력은 저에게 영화를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 요인중의 하나였고, 입체 영상들은 저에게 약간의 호기심을 가져다 주었을 뿐이지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또는 영화적 장치들에 있어서 그 어떤 눈에 띄는 장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세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화가 흑백에서 컬러 영화로,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바뀌어 왔을 때,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반발했습니다. 바로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어리석어 보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진지했을 것입니다. 영화의 3D 로의 진화도 비슷한 진통의 시기를 겪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3D 기술력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신봉은 경계하여야 할 일이지만, 그 곳으로 영상으로의 대세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는 그 시대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은 2D 영화 시대를 정복한 정복자이면서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영화의 또 다른 세대를 열어젖히는 데 선봉장에 서고 싶다는 끝없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CG 를 하는 사람들로서는 참 할 게 없어지기도 했고, 참 할 게 많아지기도 했습니다. 그저 씩 한번 웃어주며, 오른손을 들고 읊조릴 뿐입니다.

"I see you."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0. 20. 23:43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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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만족스러운 영화.

일단,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만족스러운 영화를 보았다는 말로 리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만족스럽다는 기준은 참 주관적이고 애매모호합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총평' 인지라, 무언가 명확한 기준들을 하나 하나 내세워 구별짓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디스트릭트 9> 은 참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슴 어디엔가가 묵직한 것이 느껴지는 영화. 내가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내 삶이 해석당하는 느낌의 영화. 그런 일종의 감성적 포만감을, 디스트릭트 9은 주고 있습니다.

District 9 의 포스터



요하네스버그, 그리고 디스트릭트 9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거대한 외계 우주선이 멈추어 섭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랍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겠죠. 그런데 우주선 내로 강제 진입이 이루어지고,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외계인들의 실체가 밝혀집니다. 인간이 외계인을 보살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외계인 수용 시설이 만들어지고, 외계인들은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바로 디스트릭트 9 입니다.

호기심이 사라지고 난 후, 인간의 태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공존하게 된 외계인의 존재는 귀찮고, 거추장스러울 따름입니다. 외계인에 대한 혐오. 배척. 차별은 삽시간에 확산되고, 그들을 지능낮은 벌레라는 '프런' 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프런들은 물도, 음식도, 의약품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쓰레기 더미 속을 뒤지며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이에 외계인에 대한 강제적인 이주 정책이 실시됩니다. MNU(Multi-National United) 는 군 병력을 투입, 디스트릭트 9 의 외계인들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명목상은 더 나은 환경의 제공이지만, 귀찮은 외계인들을 한켠으로 '청소' 해 버리기 위한 수단이지요.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요하네스버그 상공의 거대한 우주선



이야기의 배경이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인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겠죠. 사전 지식 없이 보아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들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남아공 정부는 1904년 요하네스버그의 도시 빈민가인 쿨리타운스(Coolietowns) 에 거주중인 유색인종들을 도심으로부터 남서부 20km에 위치한 클립스프룻(Klipspruit) 으로 강제 이동시킵니다. 대외적인 이유는 빈민층 주거환경 개선이었지만, 움푹 파인 분지 지형에 하수도 시스템으로부터 3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클립스프룻은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죠. 사실 진짜 목적은 요하네스버그에 유입된 백인들에게 주택 부지를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로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로 불리우는 소수 백인과 다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인종분리 정책이 법제화되면서, 남아공은 인종차별문제의 가장 대표적인 국가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록 92년에 인종분리정책 폐지 이후 17년동안 남아공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뿌리깊은 인종 문제는 남아공의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아공 출신 감독인 닐 블롬캠프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이 인종 차별 문제를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파고듭니다.



평범하게 사악하고, 보통으로 착한, 비커스.

영화의 주인공은 MNU 소속의 '비커스'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사무실에서 펜대나 굴리고 있을 법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무직 직원입니다. 그가 디스트릭트 9 이주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의 애인이 바로 MNU 국장의 딸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낙하산 인사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인간 비커스


그는 외계인들을 디스트릭트 9에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한 합법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해, 거주중인 외계인들에게 형식적인 서명을 받으러 다닙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숨겨진 목적은 외계인들이 숨기고 있는 외계인 무기들을 찾아내어 압수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착실하게도 수행하는 그는 평범하게 악합니다. 외계인들의 알을 불태울 때 팝콘 터지는 소리가 난다며 낄낄대고, 외계인의 자식을 가지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커스가 지독한 외계인 혐오주의자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는 그냥 평범할 뿐이죠.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고로 외계 물질(유동체)에 감염되면서 상황은 바뀝니다. 그의 팔이 외계인의 팔로 변하게 되자, 외계인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외계인 뿐이기에 MNU는 그를 가지고 갖가지 생체 실험을 하기에 이릅니다. 해부당하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한 비커스는 디스트릭트 9 으로 돌아갑니다. 우월하고 우등하던 지배와 억압의 위치에서, 삽시간에 비커스는 인간의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욕망의 희생자로 전락합니다. 쓰레기를 뒤지고, 움막에서 잠들고, 고양이 먹이를 게걸스럽게 손으로 집어먹으면서, 평범했던 비커스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변모해갑니다.

영화의 주인공, 외계인 크리스토퍼

그리고 디스트릭트 9 에서 비커스는 또 한명의 주인공, 외계인 크리스토퍼를 만나게 됩니다.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지구에 머무르던 20년동안 '유동체' 를 모았는데, 이것으로 지하의 수송선을 띄운 뒤 모선으로 복귀하여 고향 별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동체는 바로 비커스를 감염시켰던 그 물질이고, 때문에 이 유동체는 MNU 본부로 압수당해 버린 상태입니다. 크리스토퍼는 비커스에게, 이 유동체를 구해 오면 모선에 있는 의료기로 비커스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비커스와 크리스토퍼는 둘 다, '인간다운 삶(?)' 의 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MNU 에 침투해서 유동체를 가져오기로 결심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MNU 지하 4층에서 유동체를 발견해서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그 곳에서 크리스토퍼는 끔찍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인간들이 자신의 동족을 붙잡아 생체 실험을 한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실험대 위에서 잔인하게 파헤쳐져 있는 동족의 시체를 보고 심한 충격을 받은 크리스토퍼는 분노합니다. 디스트릭트 9 으로 돌아온 뒤, 크리스토퍼는 낮게 중얼거립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군대를 불러 올 것이다."


비커스를 잡으려는 MNU, 그리고 비커스를 잡아 먹어서 그 힘을 가지려는 남아공 갱단 두목, 그리고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비커스와 크리스토퍼간의 피과 살이 튀기는 잔인한 싸움이 디스트릭트 9 에서 펼쳐집니다. 크리스토퍼와 함께 목숨을 걸며 탈출하던 비커스는, 결국 자신이 희생하고 크리스토퍼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선택을 합니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보통 사람이던 그가 다른 종족, 다른 존재를 진심으로 위하고, 공감하며, 헌신하는 영웅으로 변모합니다. 끝내 크리스토퍼는 모선으로 복귀하게 되고, 거대한 모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모선은 떠나가고, 남은 외계인들은 디스트릭트 10 으로 이주하게 되자 인간들은 기뻐합니다. 훗날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아종에 대한 차별. 무시. 포악. 약한 상대에 대한 폭력. 우월의식. 탐욕. 그것으로 인류는 멸망하리라.

<인디펜던스 데이>, <우주 전쟁>, <화성침공> 등 외계인의 인류 침공에 대해 그렸던 영화는 많습니다. 그러고보니 저 또한 그런 소재로 소설을 쓴 적도 있군요.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외계인의 이유없는 정복욕과 사악함을 전제로 하여, 그에 대한 인류의 저항을 숭고하게 그립니다. 아무 죄 없이 침공받는 인간들은 억울한 희생자이며, 그들의 싸움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 의 접근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들보다 조금 못해 보인다고 해서 인류는 외계인을 학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대한 욕심으로 외계인을 생체실험하며,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외계인을 해부합니다. 그 잔인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능으로 인해, 크리스토퍼는 분노하고, 군대를 데려와 복수할 것을 다짐합니다. 외계인의 본래 과학기술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아마도 <디스트릭트 9> 의 세계관에서, 인류는 얼마 못 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영화의 포스터. 다른 종에 대한 '차별' 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이 비유는 직유법처럼 명백합니다. 여전히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집단' 에 대해 선을 긋고, 배척하며, 심지어 한없이 잔인해집니다.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러지 못한 집단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은 너무나도 흔한 일입니다. 피가 튀기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폭력 또한 세계 도처에 여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멸시와 차별로 다른 이를 상처주고 좌절하게 하는 일은 우리 바로 곁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다고, 현명한 일이라고 학교와 선배들은 가르치며, 도덕과 윤리, 희생과 헌신은 고리타분하고 어리석은 한심한 소리로 치부됩니다.

정말로, 인류는 이로 인해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대는 가고, 피터 잭슨의 시대가 오다.

영화의 원작은 같은 감독, 네일 브롬캠프의 6분짜리 단편 'Alive in Jobug'(2005) 입니다. 이것을 눈여겨 본 피터 잭슨의 제작으로 <District 9> 은 탄생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았던, CG를 하는 친구들끼리 형성된 공감대는 이제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대는 가고, 피터 잭슨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인물의 이름은 직접적이기보다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전자가 미국 중심의 가족적이고 오락적인, 소위 우리가 알고 있던 '전형적인' 헐리우드 상업영화를 말한다면, 후자 즉 피터 잭슨의 영화는 그 주제와 스토리텔링, 영화적 기법에서 새로운 할리우드의 방향성을 제시해 나가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잭슨... 은 아니고 둘다 피터잭슨. (응?)


기법 이야기가 나왔으니, 영화의 CG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은 거의 흠잡을 데 없이 매우 훌륭하지만, 정작 영화는 3천만불이라는 헐리우드 영화치고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러닝타임 상당부분을 TV 뉴스 화면, 인터뷰, CCTV 화면 등으로 현실감과 현장감있게 구성함과 동시에, 정교한 CG 에 대한 부담감을 대폭 줄인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린 것입니다. CG를 하는 입장에서, CCTV와 같이 낮은 화질 안에 그럴듯한 CG 캐릭터를 넣는다는 것은 부담이 확 줄어드는 일입니다. 이제 CG 물량으로 쏟아부어서, 관객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영화는 한계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결국 영화가 돌아갈 곳은, 얼마나 그럴듯하고 심금을 울릴 만한 '이야기' 로 관객을 설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헐리우드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가장 미국적인' 상징 중의 하나인 헐리우드 영화가, 과연 인류의 차별과 억압을 해소시키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지 그것조차 이미 경제적, 문화적으로 우월함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의 참신한 오락거리, 새로운 재밋거리로서의 소재일 뿐일까요. 그러나 적어도 <디스트릭트 9> 은 우리 가운데 그러한 자그마한 논쟁거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만한 영화였습니다.

좋은 영화를 원하신다면, 한번쯤 보세요.

ThEnd.


p.s. 감독의 6분자리 단편 'Alive in Jobug' 의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