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09. 11. 13. 07:27

2012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 (2009 / 미국, 캐나다)
출연 존 쿠색, 아만다 피트, 치웨텔 에지오포, 탠디 뉴튼
상세보기

영화 2012 포스터.



스타게이트, 인디펜던스 데이, 고질라, 투모로우.

이 정도의 영화 제목만 나열하더라도, 롤랜드 에머리히라는 감독이 우리에게는 꽤나 친숙한 영화들의 감독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영화들에게서 느껴지는 어떠한 '공통적인' 느낌들도 우리는 알고 있지요. 화려한 예고편을 보거나, '출발! 비디오 여행' 과 같은 프로그램에서 소개해 줄 때 '저 영화 좀 끌리는데?' 하는 느낌을 주게끔 만드는 그런 영화들. 그런데 직접 영화를 보고 나면 드는 느낌이, 그러니까 굳이 그 느낌을 개인적으로 비유하자면 김치 없이 라면을 먹는 듯한(?), 뭔가 좀 진짜 맛있는 음식 먹었다는 느낌은 안 드는, 그런 영화들. 차분하게 집에서 DVD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왠지 좀 께름칙하고, 오히려 극장에 앉아 쏟아지는 물량공세를 눈과 귀로 즐기는 것이 경제적으로 느껴지는 영화들. 아닌가요?

<2012> 는 바로 그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영화를 보는 도중,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느낌, 그 컨셉. 정말로 그동안 겪었던 그 공식 그대로 충실합니다. 왠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 영화 이러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준비했다가, 정말 정직하게도 예상하던 딱 그대로의 느낌을 주는 영화. 영화를 볼 때 으레 따르는 운이나 복불복의 느낌 없이, 자판기에 동전 넣으면 그 가격에 맞는 상품이 튀어나오는 식으로 돌려주는 영화. 그런 면에서 롤랜드 에머리히는 자신의 분명한 스타일을 구축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아, 그렇다고 정말 제가 <2012> 의 AtoZ 를 모두 예상하고, 영화 전체가 모두 제 손바닥 위에서 놀았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지레짐작하고 아무리 가늠해도, 도저히 제가 예상하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 밖을 보여준 것도 있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엄청난 CG 였습니다.



<2012> 의 CG, 태풍 메치기.

뜬금 없이 만화 이야기를 아주 잠깐만 할까요? '신 공태랑 나가신다 - 유도편' 에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유도편의 주인공 격인 샌님 '시로' 는 환상의 필살기 '태풍 메치기' 를 선보이는데, 라이벌인 '대오' 가 이 태풍 메치기를 하지 못하게 원천봉쇄합니다.

신 공태랑 나가신다 - 유도편 이야기.



그 때, 시로가 이 봉쇄를 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엇박이나, 변칙적 기술이 아니라, 그냥 '더욱 더 큰 힘' 으로 메다꽂아버립니다. 그러면서 무도는 '강'도, '유'도 정답이 아닌 '강유일체' 라는 멋진 말이 나오죠.

영화 <2012> 에서 느꼈던 CG도 이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CG? 당연히 예상 했지요. 대놓고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에다가 대놓고 재난영화. 어차피 스토리텔링이야 할리우드 답안지 그대로 베꼈을 테고, 처음부터 끝까지 CG로 끝장을 볼 영화 아니냐. 게다가 같은 CG 를 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스펙터클한 CG로 러닝타임을 채워 넣었는지, 어디 한번 너희가 만든 것 보여줘 봐라. 조금이라도 흠잡을 데 나와만 봐라. 하는 일종의 억하심정 잔뜩 가지고 극장에 들어섰습니다.

헌데, 그런 저를 어떠한 변칙도 없이, 영화 <2012> 는 그냥 순수하게 CG의 힘만으로 메쳐버리더군요. 영화의 초반부, LA 전체가 말 그대로 '땅이 꺼져버리는' 씬에서, 저는 정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정말로요. 땅이 제멋대로 갈라지며 춤추다가 끝도 없이 무너져내리고, 빌딩이 산산히 바스라져 붕괴되고, 지하철이 공중을 날아다니며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버리는, 정말로 세상이 망해버리는 듯한 아비규환. 단지 그 씬 하나만 가지고도, 이제까지의 모든 재난영화의 그것과 맞먹는 듯한 스케일이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엔 놀랐고, 그 다음엔 질렸으며, 그 다음엔 '이제 이런것까지 나왔는데 CG로 뭘 더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숨조차 쉬지 못하게 만드는 CG


사실 영화의 CG는 그 이후로 디크레센도(decrescendo)의 느낌입니다. 러닝타임도 제법 길고, 워낙 전지구적 스케일의 지각변동이어서 감각이 무뎌진 것도 있겠지만, 일단 초반부의 도시 붕괴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은 확연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거의 흠잡을 데 없이, <2012> 의 CG는 무척 훌륭합니다. 디크레센도의 느낌이 난다는 것은 뒤로 갈수록 별볼일 없어진다는 건 아니고, 영화의 후반부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오는 쓰나미 같은 것을 보면서 사실 좀 '해도 너무한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지요. 좌우지간 CG에 쏟아부은 1500억원이라는 제작비가, 천문학적 돈의 액수가 아닌 그 결과물로 피부에 와 닿았습니다. 100억짜리 영화 한편 찍는것도 큰일이나 난것처럼 떠들썩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데에 '넘사벽' 이라는 표현을 쓰는거구나, 싶었죠.

 

이혼한 가족, 젊은 과학자, 미국 대통령, 돈, 성경, 희생.

 
위의 키워드들만 나열해 놓으면, 대충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도 2012 의 스토리 라인을 구상해보실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참 신기하죠?) 존 쿠삭이라는 배우는 영화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서, 누군가 한 사람정도 주인공은 있어야 하기에 존재하는, 그 정도 무게감을 제공하기에 적절한 배우였던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존 쿠삭이 맡은 이혼당한 남편, 그리고 전 부인, 반항기 있는 아들, 그리고 귀여운 딸로 구성된 가족. 그리고 재앙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대처할 젊은 과학자가 등장하고, 숭고한 가치를 신념으로 삼는 헌신적인 리더인, 미국 대통령. 그 대통령의 딸. (캐릭터들이 전형적이어도 너무 전형적이네요; 어쨌든.) 그들이 적절하게 얽혀 만들어 나갈 이야기라는 것이 사실 별거 있겠습니까. 멸망하는 지구를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도망다닐 수 밖에요.

그 다운 연기를 했던, 존 쿠삭.

2012년으로 끝나 있는 마야인(재미있게도 Maya 는 영화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3D 컴퓨터 그래픽 소프트웨어이기도 하죠)의 달력에서 착안한 이 영화의 스토리 라인은, 전체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2012년 태양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핵이 들끓게 되고 그로 인해 지표면이 계란껍질처럼 바스라져 버린다는 과학적 고증(!)을 가지고, 그 재앙 속에서 인류는 어떠한 모습일까, 알아보는 것이 영화의 주된 목적이지요. 영화에는 말씀드렸다시피 정말로 '노아의 방주' 가 등장합니다. 다행히도 소설 '파피용' 처럼 우주로 도망가는 우주선을 만들지 않아서 영화 전체가 코믹스럽게 변해버리는 것만은 막았는데, 그렇다고 히말라야 산속 한 가운데에 만든 커다란 방주에 코끼리, 기린 등을 날라다가 싣는 장면까지 설득력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이 외에도 브라질의 거대 예수상이 무너지고, 바티칸에서 인류 최후의 미사를 드리다가 성 베드로성당이 무너져서 사람들을 깔아뭉갠다거나 하면서, 감독은 거대 재앙 앞의 종교와 신앙이라는 부분을 대해 빈번하게 툭툭 건드립니다. '지구가 멸망하는데 무슨 종교 타령이냐' 하는 식의 까칠함이 묻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비하라거나 조롱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적당히 까칠합니다.

문제는 '누가 방주에 타느냐' 겠죠. 글쎄요. 누가 타야 할까요? 영화의 답안은 꽤나 현실적입니다. 돈 내고 타라는 거죠. 영화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는데 지불해야 하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 의 뱃삯은 10억 유로입니다. 1조 7천억정도 되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겨우 손가락을 헤아릴 정도일 것 같습니다.
인류에게 귀중하다고 느껴지는 학자, 예술가 등을 선별해서 태워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별 거 없이 마지막 인류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돈이라는 게 좀 어이없습니다. 하지만 나름 납득할 만한 이유는 있습니다. 그 돈을 받아야 그 정도 방주를 제작할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10억 유로를 내고 탑승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딸은 그냥 미국 대통령의 딸이어서 탄 것 같고, 미국의 관료들, 방주의 승무원들은 그냥 관료이고 승무원이기에 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살고, 밖의 사람들이 죽어야 할 마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 <2012> 에서 한번 깊게 생각해 볼만한 주제, 화두는 바로 이것뿐이었습니다.

 

누가 살아야 하고, 누가 죽어도 될 것인가.


영화는 의외로, 우리에게 쉽지 않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나를 희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질문은 오히려 간단한 편이죠. 당신에게 삶의 선택권이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어야 할 때, 당신은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당신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살게끔 할 것입니까?

만약, 다른 사람을 살게 한다면, 어떤 사람을 살릴 것입니까? 왜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까?

비슷하지만, 반대로, 누군가를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면, 어떤 사람을 죽게 놔둘 것입니까? 왜 그 사람은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까?

누가 살아남은 자가 될 것인가.

영화는 이 문제를 건드리고는 있지만, 진지하게 다루고 있지 못합니다. 아니, 진지하게 다루기는 하지만, 전혀 그 방법이 틀려먹었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룬 장면에서, 그 어긋난 표현 방법은 몹시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중에, 여러 대의 방주중 한 대에 문제가 생겨서, 수많은 사람들을 태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섣부르게 문을 열어 주었다가는 그 과정에 무언가 차질이 발생해서 전체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영화는 이 장면을 엄청나게 부풀립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사랑과 존엄, 인륜을 운운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을 굉장히 거룩하고 숭고한 결정인 것처럼 포장합니다. 자식들에게, 후대에게 무엇이라고 할 것이냐 하면서 말이죠. 결국 방주에 탑승하고 계시던 각 나라 국가 원수들이 (그것도 G8 국가들) 하나로 뜻을 모아서 문을 열어 주자는 고귀한(?) 결정을 내리고, 문을 열어 주고, 밖에서 바둥거리던 사람들이 추가로 방주에 탑승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당시에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감동은 커녕 지독한 위화감을 느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위화감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먼저 일단 밖에서 동동거리던 그 사람들은 전 세계 모든 인류가 어떻게 되든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 자신들만 생존하겠다고 10억 유로를 내고 비밀리에 방주 탑승권을 구입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네 마네 하면서 고뇌에 차 있다가 인간다운 인간을 위해서 문을 열어준다는 결정을 내린 사람들 또한 방주 안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자식들, 후손들 운운하면서 뭐라 하기에는 그들은 벌써 전세계 수십억의 인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자신들만 살겠다 도피한 비겁한 이기주의자들입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 도처에 남겨져 있는 '보통 사람들' 과, 방주 주위에서 옥신각신 하는 '선택받은 사람들' 간의 차이는 이미 극명합니다. 영화 내내, 그들은 그 돈없고, 힘없고, 이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인간적인 공감도 보내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도 알 권리가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다독여주고, 아버지는 딸에게 사과를 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라며, 그들이 죽음을 준비하면서 맞이할 수 있도록 하자. 라는 식의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이 방주 바깥의 사람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감독의 태도이기도 하지요. 삶과 죽음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라면서 영화는 어물쩡 넘어갑니다. 그래, 하긴 그렇긴 하지. 지구가 망한다는데 뭘 어쩌겠어. 하면서 그냥 수긍해 버릴 수도 있지만,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요? 방주 안에 있는 자와 방주 밖에 있는 자. 그 괴리에저 빚어지는 깊은 고뇌. 이러한 고민과 감정들을 정말 진지하게 다루었다면, 이 영화는 정말 인간 본성과 가치의 심연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있는 영화로 탄생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였고, 그것이 롤랜드 에머리히 영화의 결정적인 한계입니다.

답은 물론 없습니다. 삶과 죽음의 선택에 어떤 정답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어차피 답 없으니까 많이 생각할 거 없어' 라고 스리슬쩍 넘겨버리는 것이 아니라, 답 없는 문제이지만 지독히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결코 그 문제가 쉬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 만큼은 분명하게 각인시켰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아둥바둥 한다고 해서 인생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자식을 방주 위에 던져넣고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억만장자 아버지의 모습에서 거룩한 희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공평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주어지는 '삶의 자격'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모습에서 인간 존엄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방주 안에 안전하게 살아남은 입장에서 방주 밖의 절규를 보며 슬프다 눈물짓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악어의 눈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아파하고 어떻게든 그들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서 '하나된 인류, 진짜 인간' 이라는 공감을 줄 수는 없었을까요?

그런 면에서 어떤 부분에서는 <2012> 는 불쾌함마저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아니, 어쩌면 저는 그 안에서 제 안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했을런지도 모를 일이죠. 그래서 불쾌함보다는 불편함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고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는 순간. 과연 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 때의 저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래도 다행인 건, 오늘도 아침 해는 조용히 떠오르고 있고, 우리가 딛는 땅은 변함없이 건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는 고민과 소통을 통해 서로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가슴 선뜩하도록 안도하게 만드는, 영화 <2012> 였습니다.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