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09. 11. 20. 23:13
로드(THE ROAD)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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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세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온 세상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소설 'The Road' 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이미 온 세상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이유도, 원인도 모릅니다. 산도, 강도, 도시도, 인간의 영혼도 불에 타버린 세계. 태양이 가리워져 온기를 찾을 수 없고, 재가 섞여 검은 눈이 내리는 무채색의 세상.

그 잿더미 속을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갑니다.

그 가는 길의 목적지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남쪽'으로  향하지만, 그 곳에 도착할 곳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걷습니다. 걷고, 또 걷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는 무덤덤한 표정의 살인자이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밤은 하루도 어김 없이 두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영혼없는 인간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먹습니다. 어린 아들은 사람을 먹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로,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로 부릅니다. 불타버린 세상에서 인생의 화두와 인간의 가치는 단순히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책장 가득 쌓인 인류의 거짓말들

불타버린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약한 자들의 꿈틀거림을 코맥 매카시는 정밀하게 묘사합니다. 그 소묘는 연필선 한줄 한줄이 불편할 정도로까지 정밀해서,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표현 중의 하나는, 주인공이 불타버린 도서관을 거닐면서 말한 '책장 가득, 인류의 거짓말들이 쌓여 있었다'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멸망과 생존이라는 단순한 글자 앞에서 인류의 많은 것들이 껍데기가 벗겨진 채 실체가 드러납니다.  소설 'The Road' 는 그 거름종이을 통해, 이제껏 부풀려진 인간의 허세를 받쳐 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남은 찌꺼기들을 묵묵히 보여줄 따름입니다. 마치, 수술 후 보호자에게 적출물을 보여주는 의사의 직무처럼.


길을 걷는 것.

소설을 읽고 나서, 가게에 들러 보았습니다. 가게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먹을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먹을 것 가득한 진열대가 황량하게 텅 비어버린 세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어둠의 공포를 형광등이 몰아내지 못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The Road' 의 불타버린 세계처럼, 인류가 더이상 삶에 풍족을 쌓아두지 못한다면, 인간이 시도해 볼 만한 것은 무엇인가. 고민해 보았습니다.

'The Road' 의 아버지와 아들은 길을 걸어갑니다. 물론 음식을 찾아서, 따뜻한 곳을 찾아서, 끊임없이 걸어가지만, 그들이 목표로 한다는 '남쪽' 의 실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남쪽을 향해 걷는 것이 옳다고 믿으며 걷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소설 'The Road' 는 가치 판단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나면 누구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모습과 닮았다 여겨집니다. 보통 살아가는 삶도 똑같이, 먹지 않는다면 죽고, 온기 없이 땅에서 자면 죽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구하고 잠자리를 마련하면서도, 어떻게든 '남쪽' 을 향해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쪽에 가면 뭐가 있나? 그냥, 뭐가 있을 것 같아. 그렇게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썩을 것을 비축하지 못하는 발걸음 가벼운 인류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ThEnd.



p.s. 퓰리처상을 수상한 코맥 맥카시의 소설 'The Road' 는 2010년 1월에 영화로 개봉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The Road' 의 불타버린 세계를 영상으로 옮긴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대되면서도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