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10. 8. 16. 15:25

악마를 보았다
감독 김지운 (2010 / 한국)
출연 이병헌,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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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도 아쉬운 참에, 안 좋은 것을 구태여 보고 듣고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헌데 영화 ‘악마를 보았다’ 는 참 보기 안 좋은 것들로 가득하고, 또한 그러기로 이미 소문난 영화이지요. 그럼 그 보기 안 좋은 것들을 불편함 참고 봐야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 이유라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복수의 통쾌함을 맛보고 싶은 이도 있겠고, 복수의 허무함을 확인하고 싶은 이도 있겠죠. 인간의 잔혹한 단면을 엿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을 것이고, 거기로부터 삶의 가치를 재확인하려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악마를 보기 원했습니다. 감독이 제목에서부터 자신 있게 호언장담해 놓은 악마를 정말로 눈앞에 가져다 놓아 주기를, 그래서 영화관을 나섰을 때 입에서 저절로 '아, 내가 악마를 보았다’ 라고 말하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제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 연출력, 구성, 그리고 인간 내면의 기괴한 어두움에 정면으로 접근하는 감독의 독특하고 탁월한 시각이었습니다. 영화 ‘세븐’ 에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그려냈던 연쇄 살인범이나, ‘다크 나이트’ 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들어낸 조커와 같은 괴물을, 과연 김지운이라는 감독은 어떻게 살아 숨쉬게 만들었을까, 궁금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나 봅니다. 두시간 반 가까이, 악마가 되었어야 할 영화의 두 주인공은 그 탁월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악마를 흉내내기에 급급했고, 그들의 뒤에 서서 그들을 만들어 낸 감독 또한 인간의 그 악마적 본성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해 허둥대다가, 그저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이미지들로 영상을 채워 나가는 방법에 머물렀습니다.

결국, 영화를 보고 난 후 관객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밤길에 택시 타면 위험하다, 다른 사람의 친절은 받아들이지도, 친절을 베풀지도 마라, 여자들은 돌아다니지 말고 그저 얌전히 집에 있는 게 상책이다 따위의 기분 더러운 교훈들만 무겁게 가슴에 얹혀집니다. 영화관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곁에 서 있는 모르는 사람이 짜증스럽게 불편해지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불신의 벽만 두터워집니다. 바로 그것이 감독이 원래 의도하던 목적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관객이 얻고 돌아가기보다는 깎여 나가는 것이 많은 영화였습니다.

‘악마를 보았다’ 의 불편함

영화 ‘악마를 보았다’ 는 한국의 소위 ‘메이저’ 영화 중에서 유래 없이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들로 입소문을 타고 있고, 과연 그렇습니다. 너무 잔혹해서 심의에 의해 편집되었다고 하는데도, 신체 훼손이나 폭력 장면이 정말 이전에 한국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선정적입니다. 고어 영화를 본적 없는 분이라면, 이런 영화가 고어 영화구나, 할 정도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가 정말 가만히 앉아서 보기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그 잔혹함의 묘사 수준 보다는, 그 폭력의 ‘반복’ 에 있습니다. 어림 잡아 헤아려봐도, 영화에서는 7명 정도의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강간, 살해 등 잔혹한 폭력을 당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여성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유린당하며, 그것이 일곱 번 정도 계속된다면 좀 피곤해지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만은 아닙니다. 경철(최민식)과 수현(이병헌)에 의해서, 영화에서는 7명 정도의 남성이 잔인한 폭력을 당합니다. 감독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여성에 대한 폭력 횟수와 비슷하지요. 러닝타임이 140분 정도이니, 영화는 거의 10분마다 한 번씩 화면을 둔탁한 파열음, 찢어지는 비명, 선홍색 피로 물들입니다. 그 정도라면, 그냥, 영화 전체가 피칠갑이라고 해도 무방할 수준이지요.

그 단순 반복적인 폭력이 악마를 창조해 내는 김지운 감독의 방식이었습니다. 잔인함과 불편함의 물량공세. 그로 인해 자칫 무뎌질 수 있는 감각을 남성과 여성을 적절히 번갈아 배치하면서 상쇄시키는 기법.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이지만, 말 그대로 단순하기만 하고, 효율적일 뿐입니다. 살과 피는 살아 번뜩일 지 몰라도, 악마로 자리잡아야 할 캐릭터들은 오히려 살아나지 못합니다. 연쇄살인범 장경철도, 그에게 복수하는 수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없는 괴수는 악마가 되기에는 과분하다. 연쇄살인범 장경철.



영화에서 원래 악마를 맡아야 할 인물. 당연하겠지만 연쇄살인마 장경철입니다. 정말 아무 거리낌 없이, 탐욕스러운 성욕과, 피해자가 ‘살려주세요’ 라고 말할 때 느끼는 권력욕 둘에 따라서 행동하는 인물입니다. 죽지 않을 만큼 때려서, 자신의 아지트로 끌고 온 뒤, 강간한 다음 토막냅니다. 그 어떤 계획이나 목적 없이, 너무도 단순하고 무지하게 보이는 대로 납치하고 죽이기에, 오히려 그의 폭력은 현실감이 떨어집니다.

어쩌면 그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순수한 본성이 진짜 인간 내면의 악마 같은 모습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너무 똑똑하고, 치밀하고, 섬세한 악마들을 영화에서 만나왔고, ‘악마라면 이래야 해!’ 하는 선입견 같은 것이 있으니까요. 장경철은 다르다,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불분명한 그 원천적인 광기.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을 법한 심연 깊은 곳에 존재하는 탐욕의 결정체이다.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장경철에게 진짜 ‘악마’ 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에는 과분해 보입니다. 미친놈. 나쁜 XX. 개 같은 자식. 갖은 욕설이 어울리지, 그에게 악마같다는 표현은 아깝습니다. 아마도 감독이 장경철을 진짜 악마로 만들고 싶었던 장면은, 수현에게 붙들려서 단두대에 묶여 있을 때,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은 두려움이나 고통 따위 없다고 뱉아내는 장면이었던 것 같습니다. 피에 젖은 장경철의 얼굴도, 그 얼굴을 비추는 조명도 그러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장면에서 섬뜩하게 소름 돋는 무서움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모습은, 사람을 밟아 죽이고 물어 죽이던 ‘고질라’ 나 ‘아나콘다’ 가 영화 마지막에 죽기 전 발악하는 모습과 더 비슷했으니까요. 두려운 존재라기보다는,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할 해충에 가까웠습니다.

배우 최민식은 그의 표정, 눈빛, 목소리를 통해서 장경철이라는 인물에게 무식하고 천박한 괴수영화의 괴수 이상의 캐릭터를 부여하려고 무던히 노력했지만, 이미 그 장경철은 악마로 불리우기에는 자격미달이었습니다. 인격을 잃어버린 악마에게, 우리는 비록 그가 사람의 탈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미친 개나 해충, 질병 이상의 두려움을 부여하기 힘듭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장경철은 악마로 불리기에는 과분했습니다.

튀어 보려고 애썼지만, 악마가 되기에는 모자랐다. 복수에 미쳐버린 남자 수현.



사실 영화에서 진짜 악마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인물은, 사랑하는 애인을 잃어버리고 복수에 미쳐버린 남자인 수현이었습니다. 국정원 경호요원이란 번듯한 신분. 잘생긴 외모. 그러한 그가, 사랑하는 이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자신도 모르던 악마 같은 모습으로 변모해 간다면, 진짜 악마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한 그것이 진짜 우리 안에 있음직한 악마적 본성의 실체라고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영화의 플롯은 수현이란 캐릭터의 향방에 대해 엇비슷하게 의도한 듯 보이지만, 수현이 보이는 모습은 악마같다는 정체성을 부여하기에는 끝내 모자랐습니다.

일단 그가 살인마 장경철에 대해 선택한 복수의 방식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방식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토막살해한 살인범을 잡았다가 손목 하나 부러뜨리고 풀어주고, 잡았다가 발목 끊어놓고 풀어주기를 반복합니다. 수현은 그가 선택한 방식이 장경철을 두렵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진정한 복수가 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장경철의 말대로 “이거 완전 싸이코네” 라고 할 만큼 독특하고 튀는 방식이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 방식은 장경철에게 어떠한 두려움이나 어려움도 심어주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을 뿐입니다. 추적장치 하나를 먹여서 그를 감시한다는 생각은 너무도 위태로운데도 그것 하나만 믿고 그를 놓아주는 수현은 어리석기 짝이 없었고, 팔을 부러뜨리고 발목을 끊어놓아도 장경철은 별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여자를 강간합니다. 결국 수현은 위기에 처한 여자들을 구해주는 영웅놀이를 위해 장경철이 또 다른 피해자들을 만드는 것을 방조한 꼴이 되었고,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사랑하던 여자의 가족이 몰살당하는 것을 유도했습니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요.

결국 장경철을 손에 넣은 이병헌이 택한 방법은 장경철의 가족이 그를 죽이도록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이 멋모르고 문을 열어서 단두대가 장경철에게 떨어진다는, 좀 유치할 정도의 사형 장치가 악마로 변모한 수현의 모습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었을까요. 과연 그것이 수현이 마지막에 말했던 대로 장경철이 죽은 다음에도 고통받는 일이었을까요. 물론 아들을, 아버지를 자기 손으로 죽인 부모와 자식의 삶이란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자식이 죽음에 대해 보험금의 수령을 묻는 부모와, 아버지에 대해 물을 때 ‘시발’ 하고 먼저 내뱉는 아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괴로워할까요.

수현이 진짜 악마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면, 정말 악마가 되고 싶었다면, 그렇게는 하면 안 되었을 텐데요. 장경철이 자기 애인의 가족들을 죽였다면, 수현 또한 그와 평행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장경철의 눈앞에서, 그의 부모나 그의 아들을 고통스럽게 죽였다면, 그의 어리석은 사냥방식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장경철을 분노하고 두렵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왜 거기까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는 않았던 것일까요. 대체 그에게 ‘아냐, 거기까지는 안 돼’ 라고 할만한 인간적인 경계선은 어디까지였고, ‘아직 이 정도로는 모자라’ 라고 했던 악마적인 상상력은 어디까지였던 것일까요.

또한 그 모든 일을 이루어 놓고 머리를 감싸쥐며 흐느끼고 울부짖는 수현의 모습은, 악마를 흉내냈다가 오열하는 평범한 사람의 결말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그는 처음부터 악마일 수 없었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허우적대다가,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자멸합니다. 만약 마지막 장면에서, 수현이 울지 않고 웃었다면 어떨까요. 훨씬 어려웠겠지만,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가, 미친 듯이 낄낄댔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악마를 흉내내 본 데 그치지 않고, 정말 악마가 되어 버렸다면 어땠을까요. 자신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이나, 고통받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복수에 대한 허무함, 모두 잊고, 단지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에 대한 만족으로 웃었다면, 정말 악마처럼 변모한 그를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악마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사를 보면 몇몇 잔혹한 장면들이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인육을 먹는다던지 개에게 던져 준다던지 하는 장면 말이지요. 제 생각에는 수현의 처제가 살해당하는 장면도 편집되지 않았나 합니다. 납치된 것으로 보아 원래 스토리상에 어떤 역할을 담당해야 할 것처럼 보였는데, 그냥 시체로 발견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잘려나간 장면들이 다 붙는다고 해도, 영화가 별다른 가치를 더 부여받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단지 관객은 좀더 불편해지고, 좀더 짜증스러워질 뿐이겠지요.

사실 글의 처음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일부러 극장에까지 찾아가서 악마를 보려고 하는 것은 악취미입니다. 이미 충분히 우리네 삶에는 악마 같은 이들의 진짜 이야기가 널려 있으니까요. 그렇게 안 좋게 보려면 한없이 안 좋게 보여서, 마치 미쳐버린 듯한 이 세상에서, 굳이 악마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대체 왜 악마를 보려 할까요. 정말로 우리 내면의 숨겨진 본성이 느끼는 카타르시스일까요, 아니면 왜곡된 본능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 의미일까요.

...어쨌든, 이 영화 좀 별로네요.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