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10. 1. 19. 08:19

더 로드
감독 존 힐코트 (2009 / 미국)
출연 비고 모르텐슨, 샤를리즈 테론, 가이 피어스, 로버트 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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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첫 영화.

그러고 보니 2010년의 첫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보러 가자고 하기에는 영화의 재미에 대한 거의 확고한 마이너스적인 보장이 있었기에 그냥 혼자 보러 갔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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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d' 를 극장에서 본 이유는 80% 정도 의무감에서였습니다. 지난 학기에 진행했던 'Robot on the Road' 라는 프로젝트가 바로 이 영화의 원작 소설 'The Road' 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만 아니라면, 사실 소설로 이미 보았던 작품을 다시 영화로 본다는 것은 저에게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입니다. 한국 영화는 퇴마록이 그랬고, 외국 영화는 해리포터가 그랬군요. 금방 떠올려 보아도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던 기억들입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세계가 훨씬 재미있습니다. 영상으로 옮겨진 소설의 세계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준 좋은 면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실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뭐, 저의 상상력이 소설 원작 영화의 감독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그런 주제넘은 이야기는 아니고, 그냥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가 제한되어 버리는 듯한 느낌이 싫습니다. 그래서 원작 소설을 이미 본 작품을 영화로 감상하는 것은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The Road' 는 우려하던 것 보다는 괜찮았습니다. 재미는 없었지만, 기대하던 것 보다는 훨씬 나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얻지 못했던 것도 얻었고요.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습니까?

영화에 대한 내용은 이미 한번 책을 리뷰하면서 언급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다시 언급하지는 않도록 하겠습니다.


<소설 'The Road' 리뷰 보러가기>


하지만 이번에는 영화를 보면서, 소설에서는 그다지 감명깊게 와닿지 않았다가 영화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슴에 있는 불을 꺼뜨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원작 소설에서는 소설이 시작되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것을 이미 말했었고, 아들이 중간 중간에 아버지에게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이지요?" 라고 묻는 장면으로 나오죠.

가슴에 가지고 있는 불.

주위의 사람을 둘러 보았습니다. 의외로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기가 쉽다고 느껴졌습니다. 딱히 무엇이라고 말로 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리고 정말로 그 사람이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는가 아닌가 제가 함부로 판단내릴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비슷한 자리에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어떤 사람은 가슴에 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무언가 다릅니다. 그런 사람은 참 멋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이와 가늠하기 어려운 높이가 있습니다. 불이란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그 사람에게는 온기가 있고 주변 사람조차 따듯하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그냥 그 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소모됩니다. 너무도 얕아서 손만 뻗어도 그 바닥이 만져질 것 같은 사람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기만의 생각과, 꿈과, 노력들이 없습니다. 텅 비어있는 내면을 감추기 위해 겉 껍데기를 그럴듯하게 보이기에 애씁니다. 하지만 그 바스라지기 쉬운 위태로운 포장지는 스스로도 알고, 남들도 이미 모두 알고 있습니다. 단지 모른 척 하고 있을 뿐.

제 자신을 보며, 과연 나는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물어보았을 때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불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모습만을 골라 가지고 있는 듯 하여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하루 하루 꾸역 꾸역 버텨 낼 뿐이면서,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해 화려한 미사여구로 내 삶을 치장해보지만, 결국 실속과 실체가 없는 허깨비같은 삶 같습니다. 그리고 불을 가지고 있으면서 뜨겁게 하루 하루를 태워 나가는 내 주위의 영웅들을 볼 때마다, 부러움과 함께 시샘이 듭니다. 이 옹졸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나약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나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던, 그 불꽃의 온기들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 나의 삶을 진짜 삶처럼 만들어 주었던 것.

흩어져가는 자아를 추스리고, 부스러기 조각이 되어버린 꿈들을 한 조각 한 조각 정성스레 모아 봅니다. 언젠가 나의 삶의 온기가가 회복되어, 다시 한 번 불꽃이 타올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따듯하게 만들어 줄 그 날을 그려봅니다.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게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한번 걸어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도 함께 딛어봄직한 'The Road' 가 아닐까 합니다.

ThEnd.

p.s. 마지막으로 영화에서 정말 인상깊었던 것은 노인 역할로 등장하는 로버트 듀발의 연기력이었습니다.

그가 흘리는 눈물이 주는 감동은 소설에서 제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posted by cimple 2009. 11. 20. 23:13
로드(THE ROAD)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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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세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온 세상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소설 'The Road' 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이미 온 세상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이유도, 원인도 모릅니다. 산도, 강도, 도시도, 인간의 영혼도 불에 타버린 세계. 태양이 가리워져 온기를 찾을 수 없고, 재가 섞여 검은 눈이 내리는 무채색의 세상.

그 잿더미 속을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갑니다.

그 가는 길의 목적지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남쪽'으로  향하지만, 그 곳에 도착할 곳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걷습니다. 걷고, 또 걷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는 무덤덤한 표정의 살인자이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밤은 하루도 어김 없이 두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영혼없는 인간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먹습니다. 어린 아들은 사람을 먹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로,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로 부릅니다. 불타버린 세상에서 인생의 화두와 인간의 가치는 단순히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책장 가득 쌓인 인류의 거짓말들

불타버린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약한 자들의 꿈틀거림을 코맥 매카시는 정밀하게 묘사합니다. 그 소묘는 연필선 한줄 한줄이 불편할 정도로까지 정밀해서,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표현 중의 하나는, 주인공이 불타버린 도서관을 거닐면서 말한 '책장 가득, 인류의 거짓말들이 쌓여 있었다'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멸망과 생존이라는 단순한 글자 앞에서 인류의 많은 것들이 껍데기가 벗겨진 채 실체가 드러납니다.  소설 'The Road' 는 그 거름종이을 통해, 이제껏 부풀려진 인간의 허세를 받쳐 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남은 찌꺼기들을 묵묵히 보여줄 따름입니다. 마치, 수술 후 보호자에게 적출물을 보여주는 의사의 직무처럼.


길을 걷는 것.

소설을 읽고 나서, 가게에 들러 보았습니다. 가게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먹을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먹을 것 가득한 진열대가 황량하게 텅 비어버린 세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어둠의 공포를 형광등이 몰아내지 못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The Road' 의 불타버린 세계처럼, 인류가 더이상 삶에 풍족을 쌓아두지 못한다면, 인간이 시도해 볼 만한 것은 무엇인가. 고민해 보았습니다.

'The Road' 의 아버지와 아들은 길을 걸어갑니다. 물론 음식을 찾아서, 따뜻한 곳을 찾아서, 끊임없이 걸어가지만, 그들이 목표로 한다는 '남쪽' 의 실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남쪽을 향해 걷는 것이 옳다고 믿으며 걷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소설 'The Road' 는 가치 판단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나면 누구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모습과 닮았다 여겨집니다. 보통 살아가는 삶도 똑같이, 먹지 않는다면 죽고, 온기 없이 땅에서 자면 죽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구하고 잠자리를 마련하면서도, 어떻게든 '남쪽' 을 향해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쪽에 가면 뭐가 있나? 그냥, 뭐가 있을 것 같아. 그렇게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썩을 것을 비축하지 못하는 발걸음 가벼운 인류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ThEnd.



p.s. 퓰리처상을 수상한 코맥 맥카시의 소설 'The Road' 는 2010년 1월에 영화로 개봉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The Road' 의 불타버린 세계를 영상으로 옮긴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대되면서도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