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09. 2. 1. 20:44

지금은 온게임넷 해설자로 맹활약중인 프로게이머 김정민 선수... (저에겐 언제나 선수라는 ㅡ_ㅡb)

한때 열심히 팬질(;;) 을 했더랬습니다.

수능시험 끝나고, 친구와 함께 강원도에서 삼성동 아셈 메가웹까지 달려가서 목쉬어라 응원했던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김정민 선수를 위해 만들었던 치어풀을 모아봤습니다.

몇 개는 방송을 탄 것도 있고... 간만에 보니 재미있네요. 후훗.






제가 만든 치어풀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치어풀이 아닐까 하네요. 방송에서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그랬어?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뭐 나름 인기있었다구요.)
질레트배 스타리그 16강 변은종 선수와의 경기에 치어풀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오랜만에 스타리그에 올라온 김정민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서,
많은 이들이 '김정민의 부활이다' 라고 말했을 때, 저는 웬지 그 말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치어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정민 선수는 아쉽게 패배...
이때부터 제 치어풀이 걸리면 김정민 선수가 패배하는 징크스가 생겼... ㅡ_-a;;




경기에 사용될 목적이 아닌, 순전이 응원하는 팬심(ㅡ_-a;; 허헉)으로 만들었던 치어풀입니다.
치어풀에 씌여진 문구 '야, 임마...' 는 약간의 사연이 담겨 있는데,
김정민 선수 팬카페 'TheMarine' 에는 회원들이 자기자신을 소개하는 자기소개 게시판이 있습니다.
여기에 김정민 선수도 자기소개 글을 올렸는데,
30문 30답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자기소개 맨 끝의 문항이 'To. 정민' 이었거든요.
결국 김정민 선수는 'To. 정민' 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저게, 그 문항에 대한 김정민 선수의 답이고요.
김정민 선수 자기 자신에 대한 격려와 채근을 일깨우고, 더 열심히 하길 바랬다는...
(저게 언젠데 그때 팬심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




치어풀이 한창 인기를 끌자 온게임넷 사이트에서 '베스트 치어풀' 이라는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주장원을 하면 MMgear 3D 헤드폰을 주고, 월장원을 하면 최신형 핸드폰을 주는 행사였죠.
첫 주에 이 치어풀로 주장원을 차지했습니다. ㅇ_ㅇ/~
MMgear 3D 헤드폰은 손에 넣었는데, 그 이후로 월장원 이벤트는 온겜측에서 진행을 안하더군요...
호응이 별로여서 그랬나...
보기보다 만들기 어렵지 않은 치어풀이었습니다;;
그래도 '콜럼버스의 달걀' 아닐까요? 후훗...




어느 대회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듀얼 토너먼트 1라운드 A조에 김정민 선수와 임요환 선수가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같은조가 김정민-임요환-문준희-박성준(삼성준 선수) 였었죠.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이라, 먼저 김정민-문준희 선수 , 임요환-박성준 선수 경기가 있었는데,
임요환-김정민 선수 경기가 성사되었을 경우 이 치어풀이 걸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김정민 선수는 2패 탈락, 임요환 선수는 2승으로 듀토 2라운드에 진출했습니다.

사실 지금은 많이 희미해졌지만,
임요환 선수의 최대 라이벌은 김정민 선수였지요. 테란이라는 종족, 전략과 정석이라는 대비, 준수한 외모로 인한 인기, 황제와 귀족이라는 닉네임...
하지만 임요환 선수는 두 번의 우승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김정민 선수는 중요한 길목에서 고배를 마시고 비운의 테란, 눈물의 테란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저는 그 비운과 눈물의 주인공에게 왜 그렇게 끌렸던 것일까요.
한 사람은 지금 최고 기량의 해설자로 변신하여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30대 프로게이머라는 약속을 지키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멋진 청년들입니다.



우주배 MBC 게임 스타리그 박정석 선수와의 경기에서 사용되었던 치어풀입니다.
군대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제작한 치어풀이고, 이후에 김정민 선수가 은퇴하면서
정말로 '마지막' 치어풀이 되어 버렸죠...


어찌 보면 좀 철없는 짓이기도 했던 치어풀 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뭐, 그 때도 제 인생이니, 소중하게 추억하려고 해요.
누구에게나 즐거워서 몰두했던 일들은 행복이라 말할수 있을 테니까요.

ThEnd.
posted by cimple 2009. 2. 1. 19:47

발전사라고 할 수도 없지만, 일단 보유하고 있는 옛날 자료들을 긁어모아 올려봅니다.

언젠가는 즐거운 추억이 될 수도 있겠지요...


 


꽃입니다. 마야를 처음 접한 2005년 1학기, 컴퓨터 애니메이션 시간에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나네요.




2007년, 전역하고 다시 열심히 마야를 해보겠노라 의욕에 불타서 책보며 그대로 따라 만들었던 로봇이네요.



2007년 겨울, 얼굴 모델링에 도전해보고자 뚝딱거렸던 얼굴입니다.
코가 왜저래?

ThEnd.
posted by cimple 2009. 2. 1. 19:31

괴물의 탄생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우석훈 (개마고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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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에 대한 나의 무식함.

‘경제’ 를 아시나요? ‘경제’ 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신가요?

당신은 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박식한 수준의 경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경제에 대해 몹시도 무지하고 미련한 일자무식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저와 같은, 좋게 말해서 관심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할 수도 있겠지요. 글 처음부터 무식하다 어쩌다 해서 기분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툭 터놓고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뭐, 누가 보나요. 당신과 저만 아는 비밀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석훈 씨가 쓴 이 책, 「괴물의 탄생」은 저에게는 저의 무식함을 책망하지 않고 경제와 경제학에 대해서 알려준 고마운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대체 경제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한창 세계 경제가 어렵다, 국가 경제가 어렵다 하는데 대체 무엇이 ‘경제가 어렵다’ 는 것이고, 대체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들이 있는가 알 수 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아직까지 ‘밝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어렴풋이, 윤곽을 잡고, 무언가 아는 것 같기는 하다, 그 정도입니다. 책 한권 읽었다고 제가 미네르바처럼 국가 경제에 대해 수준 높은 예견을 한다던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지는 못하겠지요. 단지, 그 ‘무언가 아는 것 같기는 하다’ 라는 사실이 즐겁고, 또 누군가에게 그런 즐거움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이제껏 저에게 경제란 그저 입에 올리기 꺼려지는 돈 이야기, 그리고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갑자기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올라 먹고살기 힘들어진다는 것 정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면 극복할 수 있다. 하는 정도였지요. 나라의 정책이 어떻고, 국제 정세가 어떻고, 이런 것은 그저 TV 뉴스에서 떠드는 저와는 먼 이야기였습니다. 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것이 물가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몰랐다면, 저의 무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책, 「괴물의 탄생」에서 저는 경제와 경제학의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 강의 식으로 구성된 책의 구조와 문체도 제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강의가 있었다면 열심히 듣고, 과제도 하고, 레포트도 쓰고 하면서, A+ 받을수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공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말이지요.


세계 경제와 경제학의 역사,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야기

지금부터 제가 책에서 배울 수 있었던 유익한 점들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물론 책에서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을 가르치고, 또 말하고 있으니 저자인 우석훈 교수님께서 혹시라도 제 글을 읽으신다면 “뭐야, 이거 헛읽었구만” 하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네요. 단 한번 읽어서는 경제학의 유치원생인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힘들었던 부분이 많습니다. 나중에, 경제학적 소양이 더 쌓이고 난 다음에 읽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도요.

먼저, 이 책을 통해 세계 경제와 경제학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 경제는 어떠한 흐름으로 발전하고 발달해왔는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그것을 유통시키는 방법에 대해, 학자들은 어떻게 연구하고 또 말해왔는가 알 수 있었지요. 역사를 통해, 경제학은 두 가지 힘의 충돌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그 두 가지 힘이란 바로 ‘국가’ 와 ‘시장’ 이지요. 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데,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가, 아니면 시장에게 맡겨 둘 것인가. 국가의 주도적 개입이 극에 달하면 사회주의이고, 시장의 힘이 강한 것이 바로 현대에 득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고 하겠습니다. 역사를 거쳐 오면서 많은 국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시장과 국가의 주도권 싸움을 풀어 나갔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요?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유익한 점이라면, 바로 경제학적 시각으로 바라본 역대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정책과, 그 의미,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온 영향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박정희는 무슨 정책으로 발전을 이룩했고, 전두환은 물가를 잡기 위해 무슨 짓을 했으며, 김영삼은 대체 왜 IMF 라는 환란으로 나라를 밀어넣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은 그 이후에 어떤 식으로 나라를 몰아갔고, 이명박은 왜 욕을 먹어야만 하는가,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그 ‘정책’ 들과 그 정책이 가지고 온 파장,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지고 온 고질적인 문제점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등을 소상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지금 이 글에서 설명하기는 무리일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싶으시다면 책을 보시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 그랬구나. 무언가 알 것 같다’ 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안목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큰 자산입니다. TV 뉴스를 볼 때, 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한다, 할 때 저것이 앞으로 어떠한 파급 효과를 가지고 올 것인가 판단하고, 이해하고, 그것에 찬성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되겠지요. 무조건 “한나라당이 하는 거니까 안 봐도 뻔해” -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더러운 똥이라고 침 뱉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팔을 걷어 붙이고 삽으로 떠서 밭에다 가져다 버리는 노력이 있어야겠지요. 앎의 노력, 판단의 수고로움이 나라를 사는 우리들에게, 특히 저와 같은 청년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라는 질문에 글쓴이 우석훈 교수님에게도 참 어려운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제까지 있던 일을 분석하기는 쉽지만, 한치 앞의 미래를 예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자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서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대안을 내놓아봐라’ 하는 요구만큼 막무가내도 없습니다. 논쟁할 때에도 되도록 이 말은 피했으면 합니다. 좌우지간, 우석훈 교수님은 대안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이 사실 제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제 3부문’ 이라는 대안입니다.

‘제 3부문’ 이란, 앞에서 언급했던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는 강력한 두 주체, 즉 국가와 시장이 아닌 다른 주체를 말합니다. 국가를 ‘제 1부문’, 시장을 ‘제 2부문’ 으로 본다면, 이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완충하고, 자생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제 3부문’ 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럽 등 국민소득 4만불을 넘어서는 선진국가, 복지국가에서는 이러한 ‘제 3부문’ 이 하나의 당당한 경제 주체로서 자리잡아 일자리를 창출해 내고, 돈을 돌게 하고, 문화를 생산하고, 복지를 실현시키는 등 긍정적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제 3부문’ 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또 세계 경제학에서도 이 ‘제 3부문’ 이라는 개념은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역사회의 생활협동조합, 특산물 및 전통공예산업 등의 지역적 특화상품 생산, 대기업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조성되어 정부나 시장의 간섭없이 운영되는 복지 기금 등이 있습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제 3부문’ 이 경제에서 어떠한 역할을 가지고 있고,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돌파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설명하고 있지만, 제가 지금 그것을 다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단지, 이러한 ‘제 3부문의 활약’에서 제가 받을 수 있었던 뉘앙스는, 단순한 법률 한 조각, 정책적으로 지원되는 돈 한 다발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경제의 문제를 경제논리로 풀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요점입니다. ‘윤리경영’, ‘호혜성’ 과 같은 단어들의 논의되고,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정상적인 경제 활동으로의 회복. 이것이 바로 책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경제대안의 요체가 아닐까 합니다.


흐름, 흐름.

저는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문화만 잘 알면 돼,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문화가 뭔지도 잘 모르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은 경제입니다. 내가 먹고, 쓰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가 만들고, 키워낸 것입니다. 모두가 혼자 살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도움을 받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갑니다. 이 더불어 사는 삶이 경제의 참 모습이고, 경제학의 참 목표일 것입니다. 보다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보다 빨리 커나가는 것이 집중했던 경제가 이제 서서히 그 목표를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키우고, 거대해지면, 그것을 독점하는 몇몇이 생기고, 차별과 차이가 심화되고 박탈감과 사회적 우울이 커져가는 것이 도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시대가 지날 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시된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신자유주의의 등불도 이제 쇠락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보고, 그 흐름을 알고, 그 흐름에 발맞추어 현명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지금 2009년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고,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 29. 07:03
군생활의 끄트머리 무렵, 한 번쯤은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고 싶어 적어내린 소설입니다다.
스스로도 다시 읽을 엄두는 잘 나지 않습니다. 민망하고 무안해서...
그래도 쓸 당시에는 마음 속에 담긴 사랑을 생각하는 언어들을 잘 표현하려 애썼고,
그 때에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진 언어였을 테니, 추억하는 의미에서라도 보관의 가치가 있겠지요?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 28. 11:51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유재덕 (브니엘,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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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은 성경 안에 있는 시대 -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의 연결점을 찾는 일이 주가 되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줄곧 이해해왔다.
비단 나 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크리스쳔들은 성경이라는 text 와, 그 text 에 담긴 context 를 이해하고, 삶으로 내면화시켜서 손끝과 발끝에서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크리스쳔의 삶이라고 알고 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면서,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 공격적인 전도 활동, 거대화되고 기업화되는 교회조직 등으로 사회로부터 비난과 비판의 뭇매를 얻어맞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쳔들은 그들의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왜냐 하면, 그들 스스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성경 말씀에 있는 거룩한 도덕 지침들을 제시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성도들은 기독교 안에서 성경이라는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현재 교회라는 조직의 직제가 어떤 이유로 구성되었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대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가 어떠한 길을 거쳐 왔는지 그 역사를 알아보아야 한다. 성경의 시대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를 연결하는 법은 알지만, 그 중간을 채우고 있는 시간들은 소홀하기 쉽다. 마치 중세가 흔히 암흑기로 불리우는 것 처럼, 초대 기독교 교리와 직제를 정립하고, 신앙의 대상과 방법, 원리를 세워가던 시기를 우리는 흔히 까맣게 잊고 지낸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틀' 로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를 보며, 마치 아이가 자신의 혈육을 찾아 나가면서 자신의 뿌리와 근원을 알아가듯, 나는 기독교가 생성되고 발달해 온 역사를 되짚으면서 나 자신의 정체성 또한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가 공격받고 있는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 또한 스스로 얻어낼 수 있었다.

기독교가 욕을 먹고, 비판을 받는 일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 유별난 일이 아니라, 기독교가 처음 생성되던 시기, 즉 1세기부터 줄곧 계속되던 일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은 1세기부터 있어왔고, 그 말을 듣기 싫어 귀를 막고 비판하고 욕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돌을 던져 죽여버리던 이들도 1세기부터 있어왔다.
예수믿는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는 일도 21세기에 들어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1세기부터 그리스도인 위정자들은 탐욕과 권력에 눈이 멀어 세상에 수많은 악을 행해왔다. 초기에는 핍박받고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 이었지만,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이래 기독교 사제들은 돈과 권력에 맛들어가고 교회는 세속화되었다.
교회와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시작된 이 문제는 오랜 기독교 역사를 걸쳐 끊임없이 대두되었고, 유별난 것도 아니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기독교 인들은 조롱당했고,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는 비판받았으며, 비대하고 부패한 교회와 성직자들은 손가락질당했다. 2천년 역사 중에 그러지 않은 시기는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만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 참된 의미를 밝혀 나가며 사회와 인류에 공헌하기 위해 헌신했던 등불같은 사람들도 끊임없이 있었다. 썩어가는 환부를 도려내고, 과감히 개혁하며,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 또한 기독교 역사와 함께 해 온,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기독교 역사를 증거할 명백한 증인들이다. 2천년 역사 중에 그로써 기독교는 숱한 사람들을 살리고, 인생을 바꾸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무수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현대에 들어 기독교의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논리, 이성, 과학조차도 그 태동은 스토아 학파, 르네상스 시기 학자들의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면, 그 어떤 학문이라도 아주 깊이 연구하면 결국에는 그 근원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역사는 계속되고, 되풀이될 뿐이다. 무엇은 발전하는 듯 하나, 어떤 것은 있는 그대로이다. 기독교의 본질과, 그 가치에 대한 논쟁도 결국은 1세기나 21세기나 마찬가지이다. 분명한 것은 결국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신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이다. 성경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삶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을 때, 기독교는 참 의미를 부여받고 교회는 진정한 제 모습을 찾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를 좀더 제대로 알고 싶다면 기독교 역사를 먼저 잘 알아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렇다면 대체 자신이 믿는 것이 왜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권위를 부여받고, 진정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그 근거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알면 대답할 수 있다.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는 그래서 더욱 의미있는 책이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 23. 17:43

다가오는 81회 아카데미 시상식을 맞이하여
역대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수상작/후보작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시상(Acardemy Awards For Best Animated Feature)은 2001년에 신설되어, 현재까지 모두 7편의 작품에게 수여되었습니다.



2001년

<수상작>  
슈렉 Shrek (DreamWorks SKG) – Aron Warner


드림웍스의 슈렉이 원년 수상의 영예를 안았군요.

<후보작>
지미 뉴트론 Jimmy Neutron: Boy Genius (Paramount Pictures & Nickelodeon Movies) – Arsalan Ahmed, John A. Davis and Steve Oedekerk
몬스터 주식회사 Monsters, Inc. (Pixar Animation Studios & Walt Disney Pictures) – Pete Docter and John Lasseter



2002년

<수상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pirited Away (Toho-Japan/Walt Disney Pictures-USA) – Hayao Miyazaki


일본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오스카를 거머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후보작>
아이스 에이지 Ice Age (20th Century Fox) – Chris Wedge
릴로 앤 스티치 Lilo & Stitch (Walt Disney Pictures) – Chris Sanders
스피릿 Spirit: Stallion of the Cimarron (DreamWorks SKG) – Jeffrey Katzenberg, Mireille Soria
보물성 Treasure Planet (Walt Disney Pictures) – Ron Clements


2003년

<수상작>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 (Pixar Animation Studios & Walt Disney Pictures) – Andrew Stanton


픽사 최고의 흥행작 니모를 찾아서가 2003년 오스카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의 주인공.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도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작품입니다.
 
<후보작>
브라더베어 Brother Bear (Walt Disney Pictures) – Aaron Blaise and Robert Walker
벨리빌의 세 쌍둥이 The Triplets of Belleville (Diaphana Films-France/Sony Pictures Classics-USA) – Sylvain Chomet




2004년

<수상작>
인크레더블 The Incredibles (Pixar Animation Studios & Walt Disney Pictures) – Brad Bird


경쟁상대 드림웍스의 야심작 두 편과 맞붙어 승리를 거둔 인크레더블.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합을 벌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보작>

슈렉 2 Shrek 2 (DreamWorks SKG) – Andrew Adamson
샤크 Shark Tale (DreamWorks SKG) – Bill Damaschke





2005년

<수상작>
윌레스와 그로밋 : 거대토끼의 저주 Wallace & Gromit: The Curse of the Were-Rabbit (Aardman Animations & DreamWorks SKG) – Nick Park, Steve Box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는 유일하게 수상한 윌레스와 그로밋 콤비.

<후보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 Howl's Moving Castle (Toho-Japan/Walt Disney Pictures-USA) – Hayao Miyazaki
유령신부 Corpse Bride (Warner Bros.) – Mike Johnson, Tim Burton




2006년

<수상작>

해피 피트 Happy Feet (Warner Bros.) –George Miller


탭댄스 추는 귀여운 꼬마 펭귄, 해피 피트가 2006년 오스카 수상.

<후보작>
카 Cars (Pixar Animation Studios & Walt Disney Pictures) – John Lasseter
몬스터 하우스 Monster House (Columbia Pictures) – Gil Kenan




2007년

<수상작>
라따뚜이 Ratatouille (Pixar Animation Studios & Walt Disney Pictures) – Brad Bird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픽사 최고의 애니메이션. 라따뚜이. 한편 후보작인 페르세폴리스는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에서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단순한 그림체이지만 정말 수작이었던 애니메이션입니다.

<후보작>
서핑업 Surf's Up (Columbia Pictures) – Lydia Bottegoni and Chris Buck
Persepolis (Sony Pictures Classics) – Vincent Paronnaud and Marjane Satrapi



...그리고, 2008년. 세 편의 경쟁작.

월-E WALL-E (Pixar Animation Studios & Walt Disney Pictures) – Andrew Stanton
볼트 Bolt (Walt Disney Pictures) – Byron Howard and Chris Williams
쿵푸팬더 Kung Fu Panda (DreamWorks Animation) – Mark Osborne and John Stevenson


픽사-디즈니-드림웍스의 적절한 삼각구도.
개인적으로는 월-E 의 손을 들어주고 싶지만, 흥행 성적에서 앞서는 쿵푸팬더가 드림웍스에 오랜만에 오스카상을 안겨줄 수 있을지요.

ThEnd.


p.s. 바로 아래에 숨겨진 '더보기' 버튼이 있습니다.

posted by cimple 2009. 1. 22. 22:43

(즐겨 찾는 PGR 이라는 커뮤니티에 올렸던 글입니다.
이 커뮤니티에서는 최근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과 관련,
시위에 화염병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격한 논쟁이 붙었습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폭력은 용인될 수 없다 vs 폭력을 사용하게끔 한 부조리함이 문제이다.
이 팽팽한 주장에 맞서, 졸필이나 글을 올려 보았고, 달린 댓글들도 함께 옮겨 보겠습니다.)





<영상은 EBS 지식채널 e의 '블랙' 이라는 영상입니다>

아래에 벌어진 '화염병' 논쟁에 대한 리플을 달다가,
리플이 길어지기도 하고, 또는 저의 의견을 한번 PGR 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보기도 해야겠구나 하여 글로 쓰게 되었습니다.
'도마' 라는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공감하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PGR 의 글쓰기 버튼은 상당히 무거우며, 빈약한 논거로 논쟁을 벌이기가 무섭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씀드리고, 또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은 듣기 위하여 한번 말씀드려 봅니다.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벌이면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비폭력 저항 운동을 주장했고
말콤 X 박사는 "폭력에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은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성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지금 아래 글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가만히 살펴보니,
이 두 사람의 생각의 차이와 같은 맥락에서 벌어지는 토론이라 생각됩니다.


부조리에 저항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독립 투사들처럼 매국노들과 원흉들을 암살하고 폭탄을 던지는 방법도 있겠고,
마하트마 간디처럼 비폭력의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둘 다 나름의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렇게 힘써 저항한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또한 그 저항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고 있는 후세대로서 그 방법의 가부를 함부로 잣대질하는건 주제넘은 짓거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만약에, 제가 어떤 저항의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마하트마 간디가 택했던 방법을 택하겠습니다.

미국의 경우, 아직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큰 문제임에는 분명하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 박사가 저항하던 시대와 비교할 때
이제 흑인이 대통령이 될 정도로 흑인의 인권이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 원동력은 흑인들의 폭력적 저항 운동보다는, 조용하지만 꾸준하고 평화롭지만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흑인들의 인권에 대한 변호와 투쟁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별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바꾸기 위해 영향력있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 공부하고, 그 곳에서 차별을 뚫고, 또 버티어내고, 법안을 통과시키고, 후대를 교육시키고...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지루합니다. 변화가 있는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얻어낼수록, 더욱 견고해 진다고 확신합니다.


글을 쓰는 저도 강원도의 한 탄광촌에 살면서, 석탄 산업 합리화라는 정책의 명분하에 보상도 없이 직장을 잃은 숱한 가장들과 그들의 가정의 눈물을 보며,
또 낙후되어가는 지역 사회에 살아가면서, 공권력과 정부의 눈먼 정책에 대한 원망을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살 터전을 잃고 주저앉아 눈물흘리는 철거민들에게 비폭력이나, 꾸준하고 점진적인 사회의 개선은 헛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궁지로 몹니다. 사람을 극단으로 몰아갑니다. 도망갈 곳도 없는 데 숨통을 죄어 옵니다.
하지만 어찌 그 억울함과, 분통함과, 권력의 오만한 부조리함을 모르고 간디나 킹 목사는 비폭력을 부르짖었을까요? 정말 멋모르고 하는 배부른 소리였을까요?

화염병으로 대변되는 폭력의 방법은 즉각적으로, 눈에 확연히 보이고, 충격적이고, 신속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실로 역사상 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자유와 독립을 위해 폭력의 방법을 사용하고 그것을 쟁취해 냈습니다.
또한 말콤 X 박사의 주장처럼 자신과 가족을 위협하는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폭력으로 사회가 본질적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신속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폭력이, 기존 권력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더 큰 억압과 부조리한 상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다들 이미 알고 계신 사실이겠지만, 바로 이것이 비폭력 운동을 하게 된 이유겠지요.
또한 폭력으로 이룩해낸 일들은 우리 사회에 안좋은 영향력을 심어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폭력이었지만, 폭력이 문제를 해결하면, 폭력의 힘을 알게 되고, 결국 그 힘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폭력'의 변질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번 문제에 대해 한번 다른 묘안을 제시해보라고 하신다면, 솔직히 말씀드리면 없다고 대답해야 겠네요.
어떤 법안이 필요할까요. 어떤 사람을 갈아치우고, 어떤 정당을 없애고, 어떤 교육을 실시하고, 어떤 곳에 돈을 투자해야 이 문제가 시원스레 해결될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했던 '점진적인 사회의 발전' 을 위한 대안이라는 것은 많은 시간을 들여,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일구어져야 할 결실이니까요.
문제의 책임을 사회 구성원 전체에게 돌려 버리는 듯 하여, 말씀드리고도 무책임하게 느껴지지만, 일단 그게 무책임한 발언이 되지 않기 위해 제가 스스로 할 일은, 오늘 하루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올바른 판단을 위해 열심히 보고 듣고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중점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몇몇 사람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들은 바삐 단죄되어야 하고 국민에 의해 심판받아야 합니다.
촛불 시위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성숙한 비폭력 시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촛불 시위마저 무시하고,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미친 이 나라 위정자들은, 사실 내키는 대로 말하면 그네들이 죽어야합니다.
그러면 국민들도 그들을 심판할 힘이 있어야겠지요.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잘못된 그들을 몰아낼 힘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해야 합니다.
잘못된 대통령을 뽑은 것은 국민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국민이라는 존재에 대해 실망도 많이 했습니다. 잘못된 대통령을 세우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지금 국민들은 삶으로 뼈저리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한 '성숙한 국민' 으로, '무서운 국민' 으로, '아는' 국민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이제 달라져야죠.
국민의 선택이 드러나는 선거에서 달라지고, 바른 생각을 가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가 늘어가고,
그렇게 모두가 꾸준히, 점진적으로, 동반하여 성장할 때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들이 하나 하나 깨어져 가리라 확신합니다.


글쎄요.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한번 "큰 충격" 이 필요할 정도로 정치는 썩어 있고, 경제는 망가져가며, 교육은 답이 없고, 문화는 초라합니다.
꾸준한 노력도 좋지만, 때때로 조금 자극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무언가를 일깨울 필요가 있다고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물론 투쟁해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킹 목사도 "자유는 절대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역설하셨더군요.
비폭력은 저항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만큼 더 적극적으로 저항하라는 이야기겠지요.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부조리한 사회가 현존합니다. -> 이로 인해 폭력적인 방법의 저항 운동이 발생했습니다.
부조리한 사회가 먼저 존재하므로 그로 인한 폭력은 정당성을 획득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어느 한 명의 영웅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 처럼 뚝딱 해결할 수도 없고,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방법이라 여겨집니다.
하지만 폭력적인 저항 방법이 가져올 수많은 악영향을 생각했을 때,
저는 차라리 이 방법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분개하며 폭압적인 경찰에 항의하는 의미로 경찰서에 돌을 던질 수도 있겠고,
길거리 시위에 참여해서 촛불을 들고 묵묵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선택한 방법은, 저는 미디어를 통해서 좀더 많은 사람에게 올바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기 때문에
그런 영향력 있는 사람이 하루 빨리 되고자, 오늘 하루도 학생의 신분으로 최선을 다 해서 공부를 할 것입니다.
각자가 선택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ThEnd.


///댓글들


    
 

posted by cimple 2009. 1. 13. 23:35
세상을 탐하다 : 우리시대 책벌레 29인의...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장영희 (평단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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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데 무슨 책부터 읽는 것이 좋을까? 고민이라면, 일단 책을 칭찬하는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이 맞는 듯 하다.

책을 칭찬하는 책을 읽으면, 일단 책을 읽을 맛이 난다. 독서의 가치에 대해 칭찬을 하고, 책 읽는 사람에 대해 칭찬을 한다. 책을 읽는 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칭찬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니, 괜스레 내 머리를 누군가 쓰다듬어 주는 듯 하여 뿌듯해지고 내가 무언가 그럴 듯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 마련.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일단 '독서 입문서' 로는 독서 예찬, 독서 방법 등에 대한 책을 한두 권 정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렸을 적 부터 나름 책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되듯, 나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서는 책을 멀리하게 되어 버렸다. 군대에 있을 때 - 또한 그 때도 누구나 그러겠지만 - 잠시 책의 감칠맛에 빠져서 잠시 책을 폭식하듯 읽어 나가면서, 내가 읽은 책의 목록을 수첩에 적어 나가는 것이 지루한 군 생활을 이겨 나가는 하나의 재밋거리였다. 하지만 전역한 이후에 다시 책을 붙들자니 왜 그렇게 눈과 귀를 빼앗가는 볼거리, 놀거리들이 많은지.

나름 영상을 전공한다는 것은 핑계일까, 책 읽을 시간이 나도 영화 한 편을 보거나, 게임 한 판을 즐기는 데 시간을 사용해 버리고,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손에 든다는 것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일단 책을 열고 나면, 그 속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과 놀라운 지식들은 얼마나 매혹적이고 매력적인지. 일단 시간을 만들고, 책을 손에 쥐고, 그 첫 장을 펴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시작을 하면 책은 여간해서는 실망시키거나 거짓말하는 법 없이 그 나름대로 각자 가지고 있던 가치로운 보물들을 내 앞에 펼쳐 보인다.

다시 한 번, 책과 독서에 대한 소중함과, 책 읽는 사람에 대한 아름다움을 되새기고저 고른 책이 우리 시대의 애서가 29인이 함께 펴낸 <책, 세상을 탐하다> 였다. 책을 사랑하고,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가치를 역설하는 이들의 짧지만 호소력 있는 메시지들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글은 이문재 시인의 '척추로 읽읍시다' 였다.

살고 있는 집 자체가 의자가 별로 없는 좌식 문화이다 보니, 어렸을 적 부터 책을 책상에 바로 앉아서 읽는 습관보다는 벌렁 드러누워, 그러다 팔이 아프면 옆으로 드러누워, 그러다 옆구리가 결리면 엎드려, 이렇게 뒹굴거리면서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이 되고 도서관에 다니면서도 삐딱하게 기대어, 아니면 허리를 푹 숙여, 그렇게 구부정하게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문재 시인의 '척추로 읽읍시다' 는 책을 읽는 새로운 방법과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르쳐주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별 특별한 내용이 있지는 않다. 바르게 등을 세우고 책을 읽는 올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기도 하고, 그만큼 정신을 집중하고 정독해서 책이 가지고 있는 깊은 가치를 정갈하게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대목을 읽을 때 내 자세가 삐딱했었고, 때문에 자세를 고쳐 잡았던 것이 뇌리에 남아서일까.

책을 읽다 보면 책을 읽기보다는 글자를 읽고 있고, 책을 읽고 나서 정보를 얻기 보다는 또 한권의 책을 읽었다는 자기 만족을 얻기 급급한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있다. 이것은 눈으로 읽는 책이고, 한쪽 눈으로 읽고 한쪽 눈으로 내버리는 책이다.

하지만 척추로 읽는 책은 다르다. 단어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고, 행과 행, 그리고 그 행간의 보이지 않는 여백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읽으며, 내가 이제껏 축적해 온 지식과 내 손에 들려 있는 한 권의 책이 서로 힘겨루기도 하고 이리저리 맞대어보며 들어올 것은 들어오고 내칠 것은 내친다. 책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슷하다. 문학이 아니어도 줄거리는 있다.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 까지, 잘 만들어진 책은 하나의 소설과 같아서, 나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 들이고 웃고 울리다가 결국에는 감동을 준다. 결국 감동은 척추로 읽는 책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많은 양의 책을 읽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이 자그마한 산골 도서관에서 쌓여 있는 장서도 내가 다 읽을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아마 세상에는 이 도서관에 쌓여 있는 모든 책보다 더 많은 책이 하루만에 쏟아져 나올 것이다. 결국, '내가 읽은 책' 목록표에 빈 칸을 채워 나가는 산술형 독서보다는, 내 척추 한칸 한칸에 새겨놓을 의료적 독서가 나에게 정말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 정신과 마음을 회복시킬.

마지막으로, 같은 글에 소개된, 이면우 시인의 <빵집> 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 하는 아이가 함께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