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09. 9. 6. 03:57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감독 켄 콰피스 (2009 / 미국)
출연 제니퍼 애니스턴, 스칼렛 요한슨, 드류 배리모어, 제니퍼 코넬리
상세보기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답니다. 정신 차리세요!"

라고 일단 영화는 외칩니다. 그 산뜻한 충고를 던져주는 영화 제목 만큼이나, 쟁쟁한 출연진들이 전해주는 이야기 또한 맛깔나는 멋진 사랑 이야기 영화였습니다. 그럼 한번 각 커플의 이야기들을 엿보면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을 공유해보도록 할까요?



그래,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어. 근데,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건 아니겠지?

지니퍼 굿윈(지지) - 저스틴 롱(알렉스)


영화의 '주인공 커플' 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바로 지지(지니퍼 굿윈) 과 알렉스(저스틴 롱) 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제일 흥미롭고, 두 사람이 서로 엮어지는 과정이 제일 재미있습니다. 지지는 아리송한 남자의 태도에 대해 알렉스에게 질문하고, 알렉스는 남자의 솔직한 마음속 생각에 대해 여과없이 대답해 주니까요.


영화를 보고 새삼 알게 된 사실 중의 하나는, 여성들은 남성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여성들은 그들의 커뮤니티 가운데에서, 자신의 친구가 남성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들을 좀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장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요. 사실 이런 것은 남자들의 커뮤니티에서는 좀 낯선 일이긴 합니다. 남자들은 친구들의 연애에 관련해서 그렇게까지 시시콜콜한 감정의 미묘한 줄다리기에 간섭하려고 하지도 않고, 그것을 굳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해 주려 하지도 않습니다. 남자들이 자기 친구의 연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시기는 연애 초기의 "이쁘냐?" 정도가 전부이니까요.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남자의 심리상태들은 대체로 맞습니다. 전화 안하고, 만나자고 안하면 관심 없는거 맞냐고요? 네, 맞습니다, 맞고요, 사실 남자는 자기가 진짜 관심있어 하고, 가슴 두근거리고, 반해버린 여자라면, 먼저 전화하거나 만나자고 하지요. 물론 쑥스럽고 머뭇거리면서 이야기 못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남자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근거없는 용기 같은게 생기는 것 같긴 합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들이댔다가 차여본 경험이 쌓이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첫 눈에 반했다면, 그리고 정말로 매력적인 상대를 만났다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자가 별 반응이 없이 그저 미적지근하다면, 열에 아홉은 이 남자가 나한테 반하지는 않았구나 하고 생각하는게 맞긴 합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남자의 애매모호한 태도. 즉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안 좋아하는 건지 모르게끔 행동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짜증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애매모호하게, 솔직하지 못하게 행동한다고 굳이 남자들을 욕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럼

"야, 넌 내 스타일이 아냐. 난 널 안 좋아해. 너한테 전화할 일도 없고, 다시 만날 일도 없을테니 괜한 환상 품지말고 신경 꺼."

라고 말하는 남자를 원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 어중간하고 아리송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장 관리' 라고 대표되는, 자기 주위의 남자들에게 이리저리 먹이를 주면서 맴돌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영화에서는 애나(스칼렛 요한슨) 가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이를테면 이런 거죠. 사실 이성으로서 별 관심도 없고, 사귀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 남자가 내 주위에 있으면서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감정을 계속 누리기 위해서, 여자는 가끔씩 모이를 줍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 보고싶다" 라던가, "나 요즘 힘들다" 등등. 그럼 남자는 혹시 이 여자가 나를? 하면서 양식장 안에서 파닥이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남자, 내 호감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 라는 감정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일 외에도, 밥을 얻어 먹는다던지, 과제 도움을 받는다던지 하는 부가서비스들도 받을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남자의 애매 모호한 태도는, 이 여자가 상처받지 않고 조용히 나를 떠나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기인하는, 어찌 보면 일종의 배려입니다. 물론 남자가 진짜 쓰레기같을 때는 따로 있습니다. 적절한 감언 이설로 여자를 꼬드긴 다음 원나잇 스탠드만을 원할 때이죠. 하룻밤만 즐기고 싶다, 책임감과 무게감에서 해방된 채 쾌락만 즐기고 싶다. 그런 목적으로 여자에게 접근해서 하룻밤 즐기고, 그 다음에 "나는 네가 과분하다" 이딴 식으로 나온다면 그건 몹쓸 수법이죠. 앞서 말했던, 여자가 상처받지 않고 나를 떠나게끔 만든다는 '배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파렴치한을 경계시키는 목적이라면 영화의 공익성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을 '배려' 하면서 떠나 보내려는 남성의 애매모호함까지 싸잡아 비난받는 것은 좀 억울한 일이 아닐가요.

그리고 영화에서 말하는 남녀의 만남과 호감, 그리고 그에 대한 남자의 표현 등은 너무 순간적인 만남과, 극적인 감정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즉, 누군가를 처음 만나서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나에게 반했느냐 반하지 않았느냐, 여기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거죠. 누가 나한테 '반했다'. 상상하면 참 즐거운 일입니다. 누군가 나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서성이며, 내 생각을 하느라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하다면. 참 끝내주게 기분 좋은 일이긴 합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반하기를' 기대하고 상상하는 자체가 영화적인 상상이고 헛된 바램은 아닐런지요?

사실 남녀가 알고 지낸 기간이 꽤나 오래 되었다면 이러한 법칙들은 힘을 잃게 되죠.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거나 만나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일단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호감은 증명된 셈이니까요. 서로에게 반해서 어쩔줄 모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신뢰를 하나 하나 쌓아가고, 서로의 장점을 하나 하나 발견해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을 다른 커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 진짜 남자가 봐도 너무 멋있다.

제니퍼 애니스톤(베스) - 벤 에플렉(닐)

사랑과 연애에 대한 좀더 솔직한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이야기하며, 영화의 어조는 전체적으로 현실적면서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영화는 닐(벤 에플렉) 과 베스(제니퍼 애니스톤) 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면서 세상 어딘가에 있을 숭고한 진짜 사랑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는 것 또한 보여줍니다.

닐은 남자가 봐도 참 진짜로 너무 멋있습니다. 항상 사랑하는 사람을 챙겨주고, 작은 것 하나 하나 배려하고, 따뜻하게 대화를 나눕니다. 물론 벤도 잘못이 있다면, 괜한 고집을 부려서 베스를 오해하게 만듭니다. 벤은 결혼이 싫습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억지로 다른 사람들 앞에 내보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증명받아야 하는 절차가, 그에게는 마치 두 사람의 사랑을 훼방받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베스는 그런 벤의 속마음을 믿기 어렵습니다. 이 남자가 나를 책임지기 싫어서,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아서 나와 결혼하지 않으려 하는구나. 오해합니다. 물론, 벤이 결혼이란 게 여자에게 가지고 있는 큰 의미를 알아주지 않은 채, 자신의 신념과 생각을 밀어붙인 것은 잘못이지만, 어쨌거나 베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둘만의 것으로 고결하게 지키고 싶은 벤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랑과 삶에 대한 확고한 신념까지 있는 남자. 어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힘든 마음과 지친 몸을 기댈 대 없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버티던 베스를,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찾아와서는 조용히 안아 주는 벤의 모습은 눈물 맺힐 정도로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세상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지만 단 한 사람의 품에만 안기고 싶은 베스와, 그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말 않고 조용히 끌어안아주는 벤의 사랑. 오랫동안 주고 받은 서로간의 깊은 신뢰와 이해 속에서 다져진 사랑. 그런 사랑이, 어떤 시련에 흔들리겠으며, 어떤 유혹에 굴복할까요?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소망했습니다. 때문에 닐이 베스에게 반지를 주며 청혼하는 장면에서는 '아, 이건 영화 속의 일이어도 좋아!' 라고 마음껏 흐뭇해지며 행복해졌습니다. 괜스레 제가 말입니다.

 


세상엔, 사랑이 좀더 손쉬운 사람들이 있지.

스칼렛 요한슨(애나)



세상엔 사랑이 좀더 손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애나(스칼렛 요한슨) 처럼 반경 100m 내의 남자들을 모두 빨아들여 버릴 것만 같은 매력의 소유자라면 더욱 그렇고 말이지요. 적어도 그런 사람들은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일단 호감을 주는 데에는 타고난 재능을 가졌잖습니까. 1.3초 만에 결정된다는 그 첫인상 말입니다.
세상은 공평한 일이라, 그런 사람들에게도 고뇌와 고민이 있겠지? 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나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니, 그런 고뇌와 슬픔에 공감한다는 것은 사실 좀 어불성설입니다. 그들을 가엾게 생각해 봤자 나의 자기위안에 그치는 것 같아서 못나 보이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볼멘소리가 다 배부른 투정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다음 크레딧이 나올 때, 애나의 마지막 대사는 무언가를 알려준 것 같습니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 건, 나를 찾는 거에요. 친구와 몇 달간 여행을 떠날 거에요. 인도로."

예쁜 얼굴과, 멋진 몸매의 나. 그런 나 자신은 쉽사리 거울 속에서 확인할 수 있고, 쉽게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자아였을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관심받고 사랑받으면서 살 수 있었고, 딱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중하게 돌아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겉껍데기 자아' 는 불안정해서, 그것을 보고 사랑인 양 달려드는 남자들과의 관계도 불안정할 수 밖에 없을 터입니다. 그래서 거울로는 확인할 수 없는, 진짜 내 안에 담긴 자아를 찾을 시간이 필요했겠고, 자신의 겉모습이 아닌 그 '진짜 자아' 를 볼 수 있는 상대. 그것을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가요? 외면적 매력에 있어 출중한 사람들이, '진짜 자아' 를 찾는데는 오히려 우리들보다 좀더 멀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역시 인생은 공평하군' 이라는 결론에 데려다주는 것 같나요?

(아니. ㅡ_ㅡ)

 

모든 남자는 짐승이야. 하지만 모든 남자가 짐승처럼 살지는 않는다구.

제니퍼 코넬리(제나인) - 브래들리 쿠퍼(벤)



벤(브래들리 쿠퍼) 는 요즘 인기있다는 대표적인 '짐승남'인 듯 합니다. 나쁜 남자이긴 한데, 여자를 잘 압니다. 그래서 참 여자 다루는 일에 능숙하죠. 아내인 제나인(제니퍼 코넬리) 와 애인인 애나(스칼렛 요한슨) 사이를 능수능란하게 오갑니다. 무언가 특별한 사람인 것 처럼 보이는 나름의 재능이 벤에게는 있었던 모양입니다.

뭐, 벤이 뼛속까지 쓰레기같은 바람둥이는 아닌 것 같긴 합니다. 그도 나름대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들어 주려고 노력하니까요. 하지만 벤에게 아내를 향한 그런 노력들은 제나인이라는 한 사람을 향한 순수한 애정이 아니라, 여자를 대하는 그의 재능의 연장선상에 있었을 뿐입니다. 즉, 그가 제나인을 위해 따스한 말을 해주고,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담배 끊는 척이라도 했던 것은, 제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자를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자리에 다른 누구여도 상관 없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벤에게 결혼이란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속박의 굴레일 뿐입니다. 결혼은 한 사람에 대한 의무와 헌신을 요구하니까요. 벤은 멋모르고 그 테두리 안에 들어가서 제나인과 결혼 생활을 하지만, 그는 제나인을 '제나인' 으로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의 곁에 있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 사랑했습니다.

제나인은 그것을 뒤늦게 알게 되지요. 둘 사이에 트러블들이 생길 때, 처음엔 상대방을 탓하다가, 다음엔 자신에게 문제가 있나 돌아봅니다. 그러다 다시 상대방을 탓하게 됩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에서 자꾸만 잡음이 발생하는 진짜 본질적인 문제는 모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투영시켰던 모습은 겉껍데기 뿐이였던 것입니다. 제나인은 벤이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깊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껍데기를 덧씌웠고, 벤은 제나인에게 편하게 대할 수 있는 보통 여자라는 껍데기를 덧씌웠습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라는 것은 가식과 위선으로 지탱될 수가 없지요. 벤은 제나인이 보통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책임감있게 사랑해야 할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부담감과 속박의 굴레를 견디지 못합니다. 제나인은 벤의 껍데기가 벗겨지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더이상 견딜 수 없습니다. 출발부터 어긋나있던 두 사람의 사랑은, 아무리 서로가 노력하려고 한다 해도 더이상 좁혀지지 않을 만큼 엇갈린 먼 길을 와버렸습니다. 결국 헤어지는게 더 나은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죠.

사실 벤과 같은 바람둥이 성향은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열 여자 마다할 남자 없고, 예쁜 여자가 방에서 옷 벗고 달려든다면 초연하게 버텨 낼 수 있는 남자는 아마 한명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자가 벤과 똑같다고 오해하는 것은 곤란하죠. 마치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두가 돈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할까요. 모든 남자는 짐승이지만, 모든 남자가 짐승처럼 살지는 않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도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라는 사실을 알고 싶은 이유는 뭘까요? 만약에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면, 불필요한 고민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잊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에 나한테 반했다면, 그래? 그럼 한번 생각해 보겠어. 이런 잣대질은 얼마나 이기적인가요. 왜냐하면, 이렇게 이리저리 재고 있다는 자체가, 당신이 그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라는 사실은 별반 쓸모없는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반하지 않았지만, 나도 그 사람에게 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감정의 크기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으로, 서로 공평한 입장입니다. 당신이 그에게 느끼는 감정만큼이나, 그가 당신에게 느끼는 감정도 불확실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랑은 개인 감정이 아니라 함께 하는 거죠. 마치 핸드폰을 세상 아무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나 혼자 가지고 있으면,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핸드폰은 서로 가지고 있어서 통화를 해야 그 가치가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고 받아야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렵습니다. 나 혼자 머릿속으로 굴리고 생각해서 노력하면 잘 할수 있는, 다른 여타 인생일과는 좀 종류가 다릅니다.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지요.

정답 없는 삶과 사랑에,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무엇인가를 붙들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랑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내가 사랑해야 할 그 사람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당신, 지금 당신의 그 사랑을 축복합니다.
그런 사람이 없는 당신, 당신에게 곧 정말 멋진 사랑이 찾아오기를 소망합니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9. 5. 15:48


해운대
감독 윤제균 (2009 / 한국)
출연 설경구, 하지원, 박중훈, 엄정화
상세보기


영화 <해운대>가 천만 관객을 넘어섰습니다. <실미도>(1108만), <태극기 휘날리며>(1174만), <왕의 남자>(1230만), <괴물>(1301만) 에 이어 한국 영화사에 새겨질 5번째 대기록입니다. 천만 관객이란 생각할수록 경이로운 수치입니다. 전 국민의 4분의 1 가까이 하나의 영화를 보다니요. 천만이라는 숫자를 넘을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 조그마한 나라의 국민들이 이렇게까지 영화를 사랑하는 국민이었나, 참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어지는 관객 수입니다.

영화관을 찾은 것은 그 이후였습니다. 천만 관객이라는 수치적인 검증이 이루어지자 그제서야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사실 개봉 전부터 그다지 매력이 느껴지는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가 훌륭한 영화를 사전에 알아보는 안목은 굉장히 낮은 편이지만 (흑...;;) <해운대> 는 뭔가 석연찮았습니다. 뭔가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별 거 없을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뚜껑을 열어본 다음 튀어나온 천만이라는 수치는 사실 놀라웠습니다. 그 수치는, 단순한 입소문 이상의, 영화적인 재미와 감동을 보유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는 <실미도>와 <왕의 남자>도 천만 관객의 영화답지는 않았다고 봅니다만.) 그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해봐야겠다 싶었습니다. 대체 2009년 여름, 우리나라 국민들이 원하는 그 어떤 것을 영화 <해운대> 가 충족시켜 주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감상을 한 단어로 정리하면 '갸우뚱' 입니다. 일단 영화가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과연 천만명이라는 관객이 볼 정도로 대단한 작품인가, 라는 질문에는 즉각 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천만이라는 팩트 또한 실제입니다. 그래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영화 보는 눈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저만 재미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해운대> 에서는 천만 관객의 명백한 요소를 찾기가 정말 어려웠는걸요. 자세한 이야기는 뒤이어 하게 되겠지만, 어쨌든 이번 결과는 기이하다 싶을만큼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형 재난영화' 해운대.

'한국형 재난영화' 에 동조하기 어려웠다.

헐리우드의 재난영화 공식에서 벗어나, 재앙 앞에 선 우리의 모습,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기에 앞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헐리우드의 재난영화 공식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의 영화들이 떠오릅니다. 가장 비슷하다고 볼수 있는 <투모로우> 부터, <볼케이노>, <단테스 피크>, <트위스터> 와 같은 옛날 자연재해 영화들, <딥 임팩트>, <아마게돈>, <코어> 와 같은 인류를 멸망시킬 재난에서부터 <포세이돈 어드벤쳐>, <타워링>, <데이라잇> 등과 같은 단일 사고로 인한 재난 영화까지. 이러한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공식들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 물량공세. 스펙터클.
2. 극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
3. 희생과 헌신, 사랑.

이 공식에서 벗어나서, '한국식 재난 영화' 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연출력과 기술력의 부재로 인한 불가피함이었는지, 아니면 감독의 확고한 의지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벗어나긴 벗어났습니다. 해운대에 밀어 닥치는 메가쓰나미는 영화 후반부에 잠깐 등장할 뿐이므로 물량공세를 벌이는 1번 공식을 탈피했고, 대신 영화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한국적인 정겨운 캐릭터들이 벌이는 코믹하고 즐거운 드라마에 할애했습니다. 또한 등장인물들은 밀어닥치는 메가쓰나미로 인한 상황을 극복한다기보다는, 그저 그 속에서 허우적댈 뿐이므로 2번 공식에서도 탈피했습니다. 신기한 것은 3번 공식인 희생과 사랑은 매우 억지스럽게도 충실합니다. 하여간 한 두가지가 아니었던, 그 '한국식 재난영화' 에서 느꼈던 위화감을 하나씩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력한 주인공, 만식(설경구), 연희(하지원)

이 영화가 재난영화인가 아닌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끔 만든 것은 바로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었습니다. 영화는 해운대 토박이 어부 청년인 만식과 횟집 아가씨 연희, 이 둘의 이루어질듯 말듯한 사랑 줄다리기를 큰 관심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TV 앞에서 자주 보던, 드라마 속에 나오는 두 명의 남녀 주인공들의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여기에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라는 설정이 추가되고, 연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가 만식 때문이었다는 비밀 하나쯤 덧붙이면 완벽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코드,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들입니다. 이걸 '한국식' 이라고 부른다면, 나름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영화 속에서는 여러 가지 갈등 구조가 존재합니다. 연희와 만식과의 갈등, 연희와 만식의 어머니와의 갈등, 지역 유지인 억조(송재호) 와 만식 사이의 갈등. 쓰나미는 이들의 이야기에 있어서, 갈등을 해결하거나 상황을 반전시키는 그 어떠한 필연이나 개연도 마련해주지 못합니다. 단지, 메가쓰나미가 밀어닥치고, 그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재앙 속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스리슬쩍 갈등이 해소된다는 식입니다.

억조(송재호)와 해운대 사람들간의 갈등을 봅시다. 무엇이 해소되고, 해결되었을까요? 억조가 돈/권력 때문에 해운대 사람들과 마찰이 빚어졌고, 이는 굉장히 골이 깊은 갈등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재앙이 닥치고, 팔 한번 내밀어 만식(설경구) 한번 붙들어주면 화해가 되는 것이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버리는군요? 문제의 중심에 있던 억조(송재호)가 흘러가는 간판에 맞아 안타깝게 죽어가는 것으로 그 모든 문제를 덮어버리고 해결하려는 영화의 문제해결방식은 납득하기 어려운 방법이었습니다. 어떠한 감정적 회복도, 진심의 공개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말입니다.

다른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나미가 끝난 다음에 특별한 이유 없이 연희는 다시 만식과 함께하기로 결정하고, 만식의 어머니는 결혼을 승낙합니다. 큰 일을 함께 겪으면 '사는게 다 그런거지 뭐' 하고 그렇게 좋게 좋게 살게끔 되는 것일까요. 뭐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것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 진행인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인가 여전히 난감합니다.

두 사람은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사실상 하는 일은 없습니다. 물론 그게 우리의 진짜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대재앙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무력한 모습. 그저 도망치고, 매달리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전부인 모습.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영화의 주인공 아닙니까. 그들이 무엇인가 보여주기를 바랬습니다. 쓰나미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 가운데 특별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예를 들면 만식은 영화 초반의 사고 때문에 폭풍에 대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면, 쓰나미가 밀어닥쳤을 때 자신의 공포를 이겨내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모습을 그려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우리는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끝까지 평범하게 끝나는 것이 아닌, 평범 속에 담긴 우리 안의 영웅을 생각해봄직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무능한 전문가, 김휘(박중훈) 박사와 그의 가족.

다른 모든 인물은 그렇다고 치고, 영화에서 유일하게 쓰나미와 관련있는 인물은 김휘 박사(박중훈) 입니다. 따라서 그는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가 재앙에 맞서서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없었을까요? 아주 약간, 먼저, 쓰나미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 또한 쓰나미가 일어나자 마자 허둥대고,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죽어가는 그냥 보통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런 무력한 모습을 인간미라고 포장해 버리기에는, 그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던 전문가 아니었을까요. 사고가 발생하자 마자 자신의 자리를 비워버리고 딸을 구하러 갔다가, 아내하고 죽는 것이 전부인 전문가. 이것이 재난에 대처하는 우리네의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모습이라는 데에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김휘의 아내인 유진(엄정화)의 마지막 모습들은 억지 감동, 억지 설정의 결정판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딸과 전화통화를 하다가 서서히 물이 차올라 죽어가는 유진의 모습은, 우리들 마음에 충격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나 싶었고, 그 노골적인 안타까움 조장에 사실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괄시하던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죠.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물론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대체 이 대목에서 유진을 살려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옥상에 올려 보내서 남편과 함께 한번 더 죽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려는 것인가, 좀 불쾌하게까지 여겨지더군요. 딸을 구조 헬기에 태워 보내면서 외치던 김휘(박중훈)의 "내가 니 아빠다!" 는 딱히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 밀려 오는 쓰나미 앞에서 남편의 넥타이를 고쳐 매어주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안타깝기는 하지만, 너무 억지 감동을 짜내려 애쓰는 모습 아니었던가요. '딥 임팩트' 에서 혜성이 떨어지는 순간에 서로를 부둥켜 안고 있던 아버지와 딸의 상황만큼 절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지요. 김휘 박사라면,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거나, 아니면 어떻게라도 살아남을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리얼리티를 원했다면, 오히려 그 쪽이 낫지 않았을까요.

 

신파의 희생자들, 형식(이민기) 와 동춘(김인권)의 어머니.

구조대원 형식(이민기) 와 서울아가씨 희미(강예원) 의 사랑이야기는 '헐리우드의 공식'에서 벗어나는  대신 '대한민국 연애소설의 공식'을 판박이 해놓습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에서 본듯한 아가씨가 해운대에 놀러 와서는 돈 많고 재수없는 준하(여호민)의 꼬임에는 넘어가지 않고 구조대원과 눈이 맞아 졸졸 쫓아다니는데, 이를 질투한 준하(여호민)는 친구들을 불러 형식을 때려주고, 형식과 희미 사이에서는 오해가 생기고 뭐 어쩌구 저쩌구...

그러다가 쓰나미가 일어나자 형식은 준하와 희미를 구하기 위해 출동해서, 몇 번이고 헬기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고, 결국 로프가 고장나자 <버티컬 리미트> 나 <투모로우> 에서 보았던 것처럼 로프를 잘라 자기를 희생합니다. 유진(엄정화) 의 죽음만큼이나 억지 감동을 짜내기 위한 불필요한 희생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차라리 두 사람을 안전하게 구해 내기만 했으면 어땠을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평범하고도 사실적인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를 잘 드러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요.

동춘(김인권) 이라는 캐릭터는 잘 살려냈으면 훌륭한 캐릭터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동춘이 쓰나미 이후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것으로 보아, 평소에는 괄시받고 무시받던 얼간이 이미지였던 동춘이 정작 사고가 일어났을 때에는 순수한 의도로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그러한 '의외의 영웅' 이라는 면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러한 이미지와 전개가 잘 드러나지 않았죠. 또한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동춘의 어머니로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비중이 낮았고, '어머니' 라는 단어를 영화 안에 황급히 집어 넣은 무리한 설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천만인가.

하지만, 결국 영화 <해운대> 는 천만 관객을 넘겼습니다. 이는 분명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인정하고, 높게 평가했다는 증거입니다. 수십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영화를 만들기도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수백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천만의 관객을 모으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실로 경이적인 일입니다. 이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죠. 아무리 저 혼자 '해운대 재미없더라. 그런데 대체 왜 본거야?' 라고 떠들어봤자 소용 없는 일입니다. 천만이라는 팩트는 저같은 일개 개인의 평가를 짓누릅니다. 왜 천만 관객일까요? 무엇이 천만 관객을 만들었을까요?

일단 '웃음이 있는 영화' 라는 요소를 들고 싶습니다. 해운대는 참 웃긴 장면이 많은 영화입니다. 설경구가 겔포스 대신 샴푸를 집어삼킨 장면은 그 중에서도 백미이고, 심지어 쓰나미라는 대재앙이 일어난 다음에도 코믹한 요소를 삽입했습니다. (부산대교 위에서 이리저리 도망치는 동춘의 장면) 한국 사람들은 심각한 것 보다는 웃긴 것을 좋아합니다. 웃을 일 없이, 가슴 먹먹하고 답답한 일 많은 요즈음엔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2009년은 참으로 우울한 한 해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적당한 볼거리와 함께 적절한 웃음을 던져주는 해운대는 마침 가벼운 마음으로 보러가기 알맞은 영화가 아니었나 합니다.

두 번째로, '익숙함' 입니다. 드라마에서 보았을 법한 캐릭터, 연애소설에서 본듯한 스토리, 다른 영화에서 보암직한 장면들. <해운대> 는 우리에게 익숙한 코드들을 이리저리 끌어모아 모자이크처럼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신선하지는 않지만 친숙하고, 식상하다 싶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고 나왔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지만 손해보지도 않았다는 기분. 그 '본전치기' 를 <해운대> 는 보장합니다. 그리고 천만의 사람들이 그 안전한 본전을 약속받고서는 극장을 찾았습니다. 마치 최고의 명품은 아니지만, 빨간 색으로 Hit 라는 딱지가 붙어 있는 인터넷 쇼핑몰의 상품과도 비슷합니다. <해운대> 는 관객과의 그런 합리적인 상거래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나중에야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만, '부산' 과 '해운대' 라는 지역 자체의 요소입니다. 818만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친구> 의 경우에도, 부산을 배경으로 하여 강렬한 부산 사투리를 사용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나이드신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극장을 찾도록 만드는 공감대를 형성했습니다. 여전히 부산은 우리나라 제 2의 도시이고,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부산 효과' 가 이번 <해운대> 에서도 작용하지 않았나 합니다. 열기 넘치는 해운대 해수욕장, 횟집에서 신선한 생선회와 함께 들이키는 소주 한잔. 걸쭉한 부산 사투리. 사직 구장에서의 야구 응원 등등, 영화는 부산이라는 도시의 지역적 공감대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킵니다. 여기에 동조하게 될 부산에 살고 있는, 또 부산에 살았던 사람들만 극장을 찾더라도 이미 어느 정도의 흥행 수치는 보장된 것이었죠. 따라서 그들이 느끼는 '재미' 란 것은 사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100% 공감하기 어려운 것이라 해도, 영화 자체의 재미인 것으로 포장되고 재생산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 나갑니다.
또한 영화 <괴물> 의 한강과 마찬가지로, 부산의 해운대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상당히 친숙한 장소이라는 것이 좀더 <해운대> 의 입소문이 신속하게 온국민으로 퍼져 나갈 수 있는 요인 중의 하나였겠죠. 따라서 그 곳에서 일어나는 대재앙이라는 설정에 대해 좀더 호기심이 들고 현실감있게 받아들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 정도가, <해운대> 가 천만이라는 관객을 넘길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해운대> 가 남긴 것들.

부산 해운대에 쓰나미를 일으킨다. 그런 컴퓨터 그래픽이 화제가 되는 영화라는 사실만으로, CG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해운대> 의 성공은 무척이나 반길 일입니다. 비록 해외 CG 회사에 거액의 돈을 지불해서 외주를 맡기고, 또 실제 작업은 국내 CG 팀이 소스를 받아 와서 새롭게 진행하는 등 이런 저런 잡음도 있었지만, 어쨌든 한국 영화의 CG 산업에 훌륭한 성공 사례를 남긴 것은 맞습니다. 이를 통하여 국내 CG 업계가 새로이 주목받고, 또한 이번 경험을 통해 시뮬레이터 개발 등 원천기술을 보유하려는 R&D 기반의 CG 회사들이 더욱 늘어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영화에 대한 안좋은 평을 잔뜩 써 놓았지만, 어쩌면 이것은 헐리우드의 스펙터클한 재난영화에 길들여진 제 탓일 수도 있습니다. <해운대> 는 경험 부족과, 예산 부족 가운데, 우리 손으로 직접 도전적인 시도를 통해 만들어진 훌륭한 수작임에는 분명합니다. 수천억원의 제작비를 자랑하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비해, 우리나라는 100억의 예산을 들인 영화를 만들기에도 버거운 것이 현실이니까요. 천만 관객은 그러한 한국 영화의 끊임없는 도전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이자,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더욱 과감한 시도들, 더욱 과감한 도전들이 이어져서, 경험이 축적되고, 노하우가 쌓여,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퀄리티와 스토리텔링으로 무장한 영화들이 끊임없이 제작되기를 바랍니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8. 13. 16:06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감독 스티븐 소머즈 (2009 / 미국)
출연 채닝 테이텀, 시에나 밀러, 레이 파크, 이병헌
상세보기


이병헌!!!

생일을 맞아 참 신나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난데없는 생일강조;; ㅡ_ㅡ;)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아주 어렸을 적에, 낙하산이 달린 '지 아이 유격대' 장난감을 밥상 위에 올라가서 던지며 놀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하지만 그 이상의 기억은 없습니다. 좋아하는 캐릭터나, 생각나는 만화의 에피소드도 전혀 없다는 거...;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이야기인 것 같으니, 어쩌면 당연할런지도요. 

어지간하면 영화의 줄거리도 옮기고, 느꼈던 점을 이야기해야겠는데, 참 그러기가 힘든 영화입니다. 영화에 대한 한줄 평은, 정말 하나 하나가 예술입니다.

뉴웍 스타-레저의 스티븐 휘티는 “아마도 2009년에 나온, 가장 자신감있게 정신줄 놓은(proudly mindless) 서사극.”이라고 직격탄을 날렸고, 타임의 리차드 콜리스는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자신의 아이큐가 매 분당 뚝뚝 떨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으며, 릴뷰스의 제임스 베랄디넬리는 “눈 외에는 어떤 신체기관도 즐겁게 해주지 않는 영화.”라고 혹평을 가했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크리스 나샤와티는 “이 영화를 보고나면 <트랜스포머 2>가 매우 수준높은 예술작품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빈정거렸다. 또, 할리우드 리포터의 프랭크 쉑은 “각본가이기도 한 소머즈 감독이 고옥탄가 CGI 액션 씬을 연달아 보여주는 것에만 주력하기로 결심한 탓에, 영화속 캐릭터들은 하나도 중요치 않게 되었다.”고 불평했고, 버라이어티의 리차드 퀴퍼스 역시 “시리즈 론칭을 희망하는 영화라기 보다는 오랫동안 이어진 시리즈의 하이라이트 씬만 모아놓은 것 같은 이 영화에는, 엄청난 양의 CGI 액션 포격과 최소한의 캐릭터 개발이 있다.”고 고개를 저었으며, 뉴욕 포스트의 카일 스미스는 “영화속 재난씬은 마치 (감독의 전작인) <미이라>에서 재생한 것처럼 보인다.”고 강한 불만감을 나타내었고, 뉴스위크의 라민 시투드는 “눈가리개를 하고 불꽃놀이를 보는 것 같은 영화.”라고 공격했다.


신랄하네요; 제가 생각하는 영화평은 이겁니다. 영화 상영 시간을 117분이라고 했을 때, 15초짜리 TV CF라면 1분에 4편, 그러니까 약 400편 정도 주우욱 이어 붙인 모음집을 보고 난 듯한 느낌입니다. 그 짤막짤막한 CF 끼리는 개연성도 없고, 별다른 의미도 없으며, 단지 보는 사람에게 '너는 지금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 라는 사실만 주입시킵니다. 여기에 생각이나 추리가 개입하면 난감해집니다. 관객은 15초 전의 장면을 기억하거나 15초 후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거나 할 필요 없이, 그냥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그 순간만 소비하면 되는 거죠. 다행히,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건질 것은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남는 것은 딱 이것뿐이었습니다.

이병헌!!!

정말 이병헌 아니었으면 리뷰를 쓸 일말의 의지조차 꺾이지 않았을지...;; 하지만 다행히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안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은 이병헌의 존재감은, 영화를 보는데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할리우드 첫 데뷔작인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에서, 이병헌이 맡은 역할은 '코브라 군단' 의 닌자 용병, '스톰 쉐도우' 역할입니다. 그는 이번 역할에서, 할리우드 그 어떤 배우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카리스마 풀풀 풍기는 역할을 소화해 냅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구도는 원래 지.아이.조의 컨셉이 그렇듯이, 테러리스트 군단 '코브라 군단' 과 최강 특공대 '지 아이 조' 의 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서로 열심히, 충실하게 싸우는 것이 영화의 전부입니다. 관객에게 따로 무언가를 생각할 필요를 없게 하고, 그런 여지도 주지 않으니 친절하다고 해야 할까요;;;??

따라서, 그러한 영화의 전체적인 구도를 볼 때 같은 맥락으로 형성된, 실질적으로 양쪽 세력을 대표하면서 중심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바로 '코브라 군단' 의 스톰쉐도우와 '지 아이 조' 의 스네이크 아이즈 입니다. 물론 진짜 주인공인 듀크(채팅 테이텀)와 그의 애인 배로니스(시에나 밀러) 가 서로 다른 군단에 소속되어 있고, 그 둘의 갈등이 영화의 중심 스토리를 이끌어 나가긴 하죠. 그렇지만 어차피 둘은 사랑하는 사이고, 그렇게 못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둘이 결국 말도 안되게 급 가까워져서는(ㅡ_ㅡ;;) 함께 코브라 군단을 대적한다는 방향으로 여차저차 흘러가는 보면, 듀크와 배로니스의 대결구도는 단지 미남미녀 주인공간의 로맨스를 뭔가 있어보이게 포장한 포장지에 불과합니다.

스네이크 아이즈


그에 반해, 진짜 라이벌 대 라이벌의 느낌을 풍기면서, 코브라와 지 아이 조의 대립 구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캐릭터는 스톰 쉐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 이 둘 뿐이죠. 일단 옷부터 서로 흑백으로 입고 나오며, 최첨단 무기가 난무하는 와중에서도 고집스러운 장인정신으로 현란하게 일본도 칼싸움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것이 이번 영화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에서 스톰 쉐도우라는 캐릭터가 비중 큰 무게감을 가진 이유이며, 또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역량이 더욱 빛나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무너지는 에펠탑과 CG, 그리고 캐릭터들.

세계 3대 컴퓨터 그래픽 회사인 Digital Domain 이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의 CG를 담당했습니다. 정말 영화 전체적으로 물량을 엄청나게 쏟아부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화 전부터 예고되던 에펠탑이 무너지는 장면과, 그 이전에 파리에서 펼쳐지는 추격씬은 영화에서 사용된 CG 기술의 백미죠.



특히 에펠탑이 붕괴되는 장면 하나만을 보려고 사람들이 극장을 찾을 정도로, 이 장면 하나만큼은 높은 퀄리티를 보여 주었습니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이렇게 맘대로 무너뜨려도 되냐? 근데?) 그렇지만 Digital Domain CG 팀 안에서도 1군, 2군이 나누어서 작업을 했는지, 이 파리의 추격장면 외에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수준의 CG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군데 군데 있었습니다. 특히나 전투기가 이착륙 할 때의 움직임 자체가 난감한 장면도 있었고, 쉐이딩과 이착륙시 발생하는 연기의 파티클 효과 등등이 가장 눈에 띄던 부분이었습니다. 길이도 꽤나 긴 영화에 CG를 빈틈없이 채워 넣다 보니 생겨난 어쩔 수 없는 한계였을까요. 아니면 워낙 편집 속도가 빠른 영화이다 보니 관객이 뭐라 할 틈도 없이 장면을 돌려버릴 테니, 효율성과 사실성의 중간 정도 부분에서 접점을 찾은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1인 히어로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닌, 많은 수의 캐릭터가 함께 싸우는 영화이므로 각 캐릭터들의 개성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은 영화를 산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스톰 쉐도우와 스네이크 아이즈 외에는 다들 별 개성 없이 비슷비슷한 군인들입니다. 다행히도 영화의 많은 시간동안 등장하는 히로인 배로니스(시에나 밀러) 가 캐릭터 자체보다는 배우의 매력을 발산해서 어느 정도 커버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불행 중 다행.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같은 영화를 보면, 정말로 '산업' 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영화 한편 만들어야 CG 하는 사람들 할일 많아지고, 촬영하고, 연기하고, 그 외에 관련되어 종사하는 사람들이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제가 생각하는 영화의 본질과는 좀 동떨어져 있지만, 산업의 유지를 위해서 이런 영화가 기획되고, 소모된다는 거대한 시스템. 그 순환구조 자체가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게 한, <지. 아이.조 : 전쟁의 서막> 은 그런 영화였습니다.

ThEnd.

p.s.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Paramount Pictures Corporation. 에 있습니다.)

posted by cimple 2009. 7. 30. 16:50

감독 피트 닥터, 밥 피터슨 (2009 / 미국)
출연 이순재, 에드워드 애스너, 크리스토퍼 플러머, 조던 나가이
상세보기



78세 노인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일단 그동안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장난감, 개미, 물고기, 괴물, 자동차, 쥐, 슈퍼 히어로, 로봇 등등... 여러분이 생각했던 '가장 참신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는 어떤 캐릭터였나요? 다들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그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영화의 매력을 설명하고도 남는 주인공들이었지요.
때문에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영화처럼 크리스쳔 베일이나 메간 폭스를 주연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매번 캐릭터를 새롭게 창조해 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새로이 그 존재를 납득시키고, 매력에 빠져들게끔 해야지요. 모두들 앞다투어 흥미로운 캐릭터, 감동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려 애씁니다. 

그런데, '78세 노인' 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생각해 보셨나요?




PIXAR의 10번째 애니메이션 <UP>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기 힘든 캐릭터를 가지고, 또 한번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 냄으로써, PIXAR 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그리고 왜 PIXAR 인지를 다시 한 번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UP>의 줄거리

영화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모험과 탐험을 좋아하던 칼. 그는 자신과 같이 모험을 좋아하던 왈가닥 여자아이인 엘리를 만나게 되고,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록 자녀는 없지만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늙게 되고, 마침내 엘리가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도시 재개발의 열풍 속에서도 엘리와 살아왔던 집을 지키며 혼자 살아가던 어느 날, 칼은 건설 직원을 폭행했다는 이유로 양로원으로 퇴거 조치를 받습니다. 그래서 칼은 마지막 수단으로, 수천개의 풍선을 집에 달아 집을 통째로 하늘로 띄워 올립니다. 그리고 아내인 엘리가 그토록 가기 원했던 남아메리카의 폭포를 향해 날아갑니다.

그런데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그의 여정에 예기치 않은 불청객들이 찾아옵니다. 꼬마 탐험가 러셀, 강아지 더그, 도요새 케빈. 그리고 칼이 어린 시절 우상으로 여겼던 탐험가 찰스 먼츠까지. 이들과 얽혀들며, 칼은 남아메리카의 오지에서 펼쳐지는 갖은 모험을 펼칩니다.

PIXAR 애니메이션은 항상 그렇지만,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들 나름대로 영화를 해석하고, 즐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어린이들이 봤을 때에는 집이 풍선을 타고 날아다닌다는, 그리고 야생에서 두근거리는 모험을 즐긴다는 즐겁고 유쾌하며 환상적인 상상력에 빠져들 수 있도록 합니다. 또한, 어린이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은 어른들이 영화를 볼 때에는 그들 나름대로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무게감 있는 철학적 질문들을 던집니다.

그리고 이번 <UP> 이 던진 질문은, 그 동안의 PIXAR 애니메이션이 던졌던 질문 가운데에서 가장 녹록치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UP>, 아름다운 보수를 이야기하다.

UP 이 추구하는 가치는 사실 난해합니다. 그동안 PIXAR 애니메이션이 보여주었던 뚜렷한 가치관의 제시에 비해, UP 은 조금 어려운 두 가지 가치를 동시에 저울질합니다.

영화는 단순히 '한 노인이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오던 꿈을 끝내 이룬다' 라는, 어떠한 '숭고하고 지켜져야 할 것을 지키는 것에 대한 예찬' 에만 몰두하지 않고,
또는 '낡아빠진 옛것에 매달리지 말고, 새롭고 가슴 떨리는 모험에 도전해라' 라는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메시지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약속했던 자신의 오래된 신념을 지켜 나가는 '보수적' 가치와, 새로운 이들을 만나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다양한 삶의 양상을 받아들이고 또 바꾸는 데 주저하지 않는 '진보적 가치'. 영화는 이 두가지 가치를 동시에 제시하고, 그 가운데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관객들로 하여금 칼과 함께 고민하게 합니다. 그 고민은 쉽지 않습니다.



칼은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과, 자신이 고수해온 가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사랑하는 아내 '엘리' 와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온통 사방이 공사중이어도 고집스레 자신이 살아온 터전을 지켜 나가는 인물입니다. 영화에서 점프컷으로 짧게 표현되지만, 칼과 엘리가 서로 행복하게 사랑하면서 늙어 가는 모습을 그려 낸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만큼 칼에게 자신의 추억과, 자신이 추구해온 가치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칼은 진심으로 엘리를 사랑하며, 그녀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고 싶어 합니다. 엘리는 아주 어렸을 때 부터 항상 남아메리카의 아름다운 폭포에 가서 그 곳에서 가슴 떨리는 모험을 하면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보물처럼 여기는 탐험 일지에 '내가 앞으로 할 일들' 이라는 제목을 적어놓고, 그 뒤로는 백지로 남겨둔 채, 바로 그곳에 찾아가 '가슴 떨리는 모험들' 을 적어 나가겠다 소망했습니다. 칼은 꼭 그곳에 같이 가자는 엘리와의 오래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천개의 풍선으로 집을 통째로 들어 올려서 날아갑니다.

수천 개의 풍선으로 집이 떠오르는 장면은 단연 <UP>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예고편이 등장하는, 다행히도 저는 '진짜' 보고싶은 영화는 예고편조차 보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는데 가장 최고의 준비는, 그 영화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상태 아닐까요? 때문에, 이번 <UP> 도 참 다행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한 할아버지가 아내와의 아름다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적지에 도착하고, 어릴적 탐험의 꿈을 이룬다. 끝.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간단한 답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칼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예기치 않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동행하게 됩니다. 천진난만한 아이 러셀과, 강아지 더그, 도요새 케빈.

칼은 그의 삶에 새로이 개입한 것들을 거추장스러워 합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아내 엘리와의 약속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남아메리카의 아름다운 폭포로 떠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인데, 러셀과 그 친구들은 자꾸만 그의 발걸음을 더뎌지게 만듭니다. 때문에 칼은 그들과, 그들과의 관계를 애써 밀어냅니다.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강아지 '더그' 도 싫고, 까악거리면서 졸졸 쫓아다니는 도요새 '케빈' 도 귀찮을 따름입니다.

칼이 보수를 대표한다면, 천진난만한 아이 러셀은 진보의 상징과 같습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데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을 꿈꾸는 아이. 그 또한 항상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은 줄 알지만, 실제로 그것에 뛰어들면서 그게 생각처럼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들을 배웁니다. 그 아이로 인하여 보수로부터 기꺼이 배움을 마다하지 않는 아름다운 진보의 모습을 엿볼 수도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남아메리카의 오지에서 그들과 이미 얽혀버린 칼.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불편한 칼은 다른 이들과의 동행을 거부하고 혼자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걷습니다. 풍선에 매달린 집을 끌고 걷지만, 그 때 그의 모습은 오히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처럼 어둡게 그려집니다. 날으는 집을 타고 행복을 찾아 두둥실 떠오르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사랑하는 아내와의 아름다운 약속은 굴레가 되어 그를 얽매고 있습니다.

칼은 마침내 아내와 약속했던 그 곳, 그 폭포에 닿는데 성공합니다. 그토록 원했던 일을 달성해 낸 후, 그는 조용히 집 안에 들어와 앉습니다. 그토록 원했던 일,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약속을 지켜낸 후인데, 기쁘지 않고, 즐겁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칼은 조용히 엘리의 탐험 일지를 펴듭니다.

그때, 칼은 당연히 백지여야 할 '내가 앞으로 할 일들' 의 다음 페이지들이 백지가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그 곳에는 엘리와 칼이 함께 했던 사진들이 붙어 있습니다. 엘리에게는 칼을 만나고, 그와 함께 사랑하면서 살아왔던 모든 날들이, 마치 꿈꾸던 이상향에 다다른 것 같은 행복이요 아름다움이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칼은 비로소 발견합니다. 오랫동안 숙원해 온 목표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목표라는 것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는 것 보다, 매 순간 순간의 삶을 통해 행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진짜 이상향이었다는 사실을.



칼은 자리를 딛고 일어섭니다. 엘리가 칼에게 지켜달라 원했던 것은 '약속' 이 아니라, '행복' 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삶의 매 순간을 밀쳐내지 않고 포용하고 받아들임에 있다는 것. 그래서 칼은 오랫동안 살고 있었던 집의 정든 물건들을 하나씩 내버립니다. 고집스레 붙들어 왔던 그 오래된 집착들로부터 벗어나자, 칼의 집은 다시 두둥실 떠오릅니다. 진짜 행복을 찾기 위해서.

쉽지 않은 질문들을 던지지만, 이면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더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며,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나와 가치가 다르지만,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고, 함께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의 메시지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바로 칼의 어릴적 우상인 찰스 먼츠입니다. 그는 광기어린 극도의 보수주의의 상징입니다. 도요새를 잡아서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그는,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또한 원래는 순수했던 탐험가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다른 이의 침입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며, 이미 배타적인 욕심이 그의 삶을 삼켜 버린 후입니다. 그로 발생하는 폭력과 억압은 보수주의의 가장 안좋은 단면을 드러냅니다.



다양한 가치를 가진 수많은 사람이 한데 얽혀 살면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고,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아간다는 것.
날아다니는 집을 타고서 도착한 꿈같은 장소에서조차 그것을 찾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 여정 속에서 해답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영화는 말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닿을 수 없는 이상향처럼 여겨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유쾌한, 그러나 평가는 엇갈릴 수 있는.

<UP> 은 충분히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입니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개' 를 이용한 여러 가지 개그 코드 (개에게 테니스 공을 던지면 열심히 물어 온다던지, 개가 다람쥐에게 신경이 온통 쏠린다던지 하는) 들은 사실 미국 문화에 익숙한 것이라서 100% 공감하고 웃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억지스럽거나 저질스럽지 않은 유머를 잃지 않고, 끊임없이 관객들로 하여금 유쾌함을 선사합니다. 또 일단 영화 내내 '풍선을 매달아 집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또 끈으로 집을 묶어서 손에 들고 다닌다' 라는 재미있는 설정은 동심을 자극하고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의 무게감 때문에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보시고, 즐거움을 만끽함과 동시에 진지한 질문들을 던져 볼만한 영화로 생각됩니다.

또, 매번 PIXAR 장편 앞에 방영되는 PIXAR 단편 애니메이션이 이번에는 정말 '대박' 입니다. 멋진 상상력과 기막힌 호흡으로 만들어진 이번 단편 애니메이션은 또한 한국인 2세 감독이 연출했다고 해서 더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또한 놓칠 수 없는 재미이지요.



언제나 PIXAR 작품을 볼때마다 되풀이하는 말은

"아, 우린 언제 저런거 만들어보나?"
"우와, 진짜 이런거 한번 만들면 진짜 소원이 없겠다"

...이번에도 어김 없었습니다.

벌써 열 번이나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 <UP> 을 보며, 또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한없는 부러움을 가져 봅니다. 하지만, 우리도 할 수 있겠지요?

네, 할수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할 일들"

아직 제 모험 노트는 그 뒤가 백지로 남겨져 있으니까요.



ThEnd.


p.s. 모든 사진의 저작권은 PIXAR animation studio 에 있습니다.

posted by cimple 2009. 7. 29. 06:00

초콜렛
감독 프라차야 핀카엡 (2008 / 태국)
출연 야닌 비스미타난다, 아베 히로시, 퐁팻 와키라분종, 암마라 시리퐁
상세보기


무려 '미소녀' 의 달콤, 살벌한 액션 감상하기.


일단,

각설하고,

이 영화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은 예고편 부터 감상합시다.

 


예,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초콜릿> 이라는 원제보다 <옹박 4> 라는 제목으로 좀더 입소문을 타고 알려진 이 영화는,
<초콜릿> 이라는 달콤한 제목만큼이나 달콤하고 가냘프게 생긴 미소녀가 펼치는, 살벌할 정도로 화려한 무에타이 액션 영화입니다.

정말 이 아가씨가 주인공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에이, 그래봤자 여자애가 얼마나 하겠어' 라는 생각은, 이미 위에서 예고편을 보신 분들이라면 벌써 떨어내셨겠지요? 영화 자체도 정말 '고맙게도' 액션에 완벽하게 충실한 영화라, 상영시간 거의 내내, 이 가냘퍼 보이는 소녀가 몸빼바지를 입고 펼치는 화려하고 현란한 발차기, 몸놀림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순발력에 입을 다물지 못함은 물론이고요.

이쯤 되면, 저 멋진 노와이어 액션 장면들을 대역 없이 소화해낸 이 아가씨가 누구인지 궁금해집니다.

이름 : 지자 야닌(Yanin Vismitananda)
생년월일 : 1984년 3월 31일
국적 : 태국
신장 : 162cm



영화 <초콜릿> 은 2003년부터 기획이 시작되었고, 2005년에 주연 배우로 이 아가씨, 지자 야닌을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3년여의 제작 기간을 거쳐 2008년 2월 태국 전역에 걸쳐 개봉했습니다. 정확한 흥행 성적을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센세이널한 작품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곧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다른 국가에서도 개봉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영화의 감독은 토니 쟈와 호흡을 맞춘 옹박 1의 감독, '프라차야 핀카엡(Prachya Pinkaew)' 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영화 마지막의 NG(라고 쓰고 잔혹한 부상장면들 이라고 읽습니다) 모음을 보고 있노라면, 이 감독의 무자비한 액션 연출과 그 기획 의도에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입니다.)

물론 지자 야닌의 미모에도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스토리? 그거 먹는건가요?

무언가 영화를 봤으면 내러티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할텐데,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그나마 한 줄로 요약하면 "자폐증 소녀의 사채업 이야기" 랄까요?

대략적인 줄거리를 말씀드리면 (스포일러성 100%나, 이 영화로부터 얻어지는 재미를 느끼는 데에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옛날 옛날에 태국 폭력조직의 보스격인 No.8 - 이것도 공홈에 들어가서 알게 된 것이지만 -  과 , 그의 애인 '씬' 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건너온 미남 야쿠자 '마사시' 가 '씬' 과 눈이 맞아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질투심에 No.8 은 가슴속 깊이 복수심을 안고 살아갑니다. 한편 '마사시' 와 '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우리의 주인공 '센' 이죠. 어렸을 때부터 자폐아로 자라난 센은 대신에 천부적인 무술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옹박>을 보면서 무에타이를 익히죠.

...뭐?


네;;; 사실입니다. 그렇게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싸움이 벌어지면 천재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지요. 바로 즉석에서 상대방의 기술을 익힌 다음 되갚아주기도 합니다.

좌우지간 각설하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떠나버리고, 어머니 '씬' 은 개과천선해서 열심히 살기 위해 No.8 의 손아귀를 떠나려 합니다. 하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죠. '씬' 은, 아마도 마약 중독으로 생각되지만, 깊은 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굉장한 훈남 아버지 마사시


그 덕에 이랬던 어머니가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어머니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서 센과, 동네 친구 '뚱보' 는 돈을 벌기로 결심하지요. (정말 이름이 뚱보인지는 확실치는 않지만;;; 이름이라도 좀 정해줄 것이지;;;)

이 친구가 뚱보입니다. 나름 멋있다능


두 사람은 씬이 소싯적에 돈을 여기저기 빌려주었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 사람들로부터 돈을 받아내러 다닙니다. 정말 충실한 사채업 영화죠. (ㅡ_ㅡ;;) 당연히 순순히 돈을 주려는 사람들은 없고, 그래서 센은 가는 곳마다 돈받아내기 위해 건장한 청년들과 싸움을 벌입니다. <옹박> 본편같은 숭고한 목적? 그런 것 없습니다. 돈 받아내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죠.

돈 줘.


나중엔 정말 센이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어쨌든 당연히도 그 와중에 결국 인생의 원수인 No.8 과의 대결이 시작되고, 아버지는 뜬금없이 일본에서 태국으로 날아와 칼싸움을 벌여 주십니다. 마무리는 적절하게 마무리된다. 이상 영화 <초콜릿> 이었습니다. 하하.


즐거운 '다름'

참 세상은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다지만, 이렇게 무술을 잘 하는 어여쁜 소녀라니요. 그 소녀가 과감히 몸을 던지고, 떄리고, 맞고, 다치고, 찢어지면서도 결국 영화를 완성해 내는 곳.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제아무리 자본력이 된다는 헐리우드에서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무리 어설프더라도, 남이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것을 완성해 내는 것은 분명 인정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영화로서의 언어가 좀 부족하고, 구성이 미흡하더라도, 아무데서나 볼 수 없는 색다른 맛. <초콜릿> 은 그 즐거운 다름을 만끽할 수 있는 영화였습니다.

ThEnd.


p.s.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하는 하이라이트 장면!

posted by cimple 2009. 7. 8. 22:43

트랜스포머 : 패자의 역습
감독 마이클 베이 (2009 / 미국)
출연 샤이아 라보프, 메간 폭스, 이자벨 루카스, 레인 윌슨
상세보기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감독 맥지 (2009 / 독일, 영국, 미국)
출연 크리스찬 베일, 안톤 옐친, 샘 워싱턴, 문 블러드굿
상세보기




TvT (Transformers 2 vs Terminator salvation)

좀처럼 영화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 영화 갈증에 있다가, 영화 볼 기회가 생겨서 욕심이 났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조조로 <트랜스포머 2>를 보면 보고 나올 때 쯤에 맞추어 <터미네이터:미래전쟁의 시작> 을 볼 수 있겠더군요. 그래서 하루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연달아 보는 사치(?) 를 누렸습니다.

물론 아침부터 그런 짓을 함께 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당당히 '영화는 혼자봐야 제맛이지' 다짐하며 영화관으로.
그런데 처음에 트랜스포머 티켓을 끊으려니, 관람료가 오른 것은 알고 있었지만 티켓 발매하시는 분이 14000원이라고 하는 거에요.
어라? 여기 무슨 아이맥스관인가? 당황해하면서 영화관을 하도 오랜만에 왔기에 어버버버... 값을 치르고 티켓을 확인해보니 '2인' ㅡ_ㅡ;;
"저기요 저 혼자왔는데요."
"네? 아, 죄송합니다. 아, 네."
...그렇게 처음부터 확인사살 당했지요. 물론 제가 갔던 곳은 프리머스라 아직 관람료가 인상되지 않았다는 건 다행이었지만서도. 그렇게 위안했습니다. 그렇게;;

이거슨_인증.jyp


공교롭게도 두 영화의 머릿글자를 따 보니 TvT. 테테전이군요. 그렇다고 해서 양쪽 영화의 메카닉들끼리 싸움을 벌여보고자 하는 공상과학대전식의 이야기를 할 것은 아니고, 나름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영화들. 보면서 이런 저런 궁시렁거림이 많이 떠올라서, 글로 옮겨 보았습니다.



일단, 트랜스포머. 뭐야, 너?

제가 분명히 들은 바로는 <트랜스포머2 : 패자의 역습> 은 1편보다는 스토리텔링아 낫다. 작품성이 있다.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기대했지요. 1편에서는 그 스토리텔링의 단순성이 <디워> 와 함께 엮여서 누가 더 낫네 마네 논쟁이 오갈만큼 정말 눈물나는(!) 전과를 가지고 있었으니, 2편에서는 좀 달라졌구나. 뭔가 이제 흥행성과 작품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나가는 방향으로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진화해 나가는구나. 그렇게 기대했습니다. 아하. 정말로?

작품성은 무슨;;

 

역시나 스토리는 없습니다. 뭐 있기는 있죠. "로봇종족의 원로이자 디셉티콘의 원조격인 '폴른' 이 태양을 파괴해서 에너지를 얻으려 하므로, 막아라." 이 외에도 이런 저런 곁다리 이야기들이 붙지만 뭐 어쨌든 결론은 열심히 싸워서 지구를 지켜라입니다.

사실 트랜스포머에서 이야기를 가지고 말이 되네, 안되네, 왈가왈부 하는 것 만큼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도 없겠지요. 스토리 보려고 이 영화 봅니까? 눈과 귀가 즐거우려고 보는 거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이것 저것 생각해야 하는 수고러움을 덜어주며, 또한 이것 저것 생각할 틈 없게 눈과 귀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자 무기겠죠. (그것도 2시간 30분동안!!! 러닝타임 보고 새어나온 헉! 하는 소리) 영화보기를 CF 보듯 보고싶어하는 현대 관객들 취향에 적합합니다. 짧게 짧게. 개연성은 떨어져도 임팩트있게. 결국 남는 것은 '무언가 화려하고, 시원했다' 라는 임팩트만 있으면 된다는 거겠죠.

헌데 그렇다고는 쳐도, 이 변신 로봇 이야기가 전편부터 없었던 스토리텔링 말고도 이것 저것 많이 없어진 게 많아서, 이제는 그 화려한 첨단 기술력의 싸움구경마저 별반 재미가 없어 보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도 크게 두 가지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변신 로봇이 없다.

으응? 트랜스포머에 변신로봇이 없다니 무슨 소리냐?

너 영화 안봤냐?



물론 봤죠; 또 물론 변신 로봇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전작보다 훨씬 늘었죠. 디셉티콘 측에도, 오토봇 측에도 새로운 변신로봇들이 대거 추가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말 그대로 '변신' 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물론 변신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고, 그 횟수나 시간을 전편보다 적다는 비교 자료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번 <트랜스포머 2> 에서 로봇들은 변신보다는 전투에 주력합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닥치는 대로 부수고, 싸우죠. 너무 과다하다 싶어서 눈이 쫓아가기 피곤한 면도 없지않지만, 어쨌든 좋습니다. 크기도 거대해졌고, 훨씬 박력있어졌지만, 어딘지 모르게 이 친구들이 트랜스포머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저에겐 크게 다가왔습니다. <트랜스포머>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은 바로 '호기심' 아닐까요? 어렸을 적 변신 로봇을 가지고 놀던 그 동심의 호기심. 향수. 추억. 이 트럭이 어떻게  로봇이 될까? 이 포크레인이 어떻게 로봇으로 변하지? 그렇게 장난감 자동차를 굴리고, 포크레인으로 모래놀이를 하다가도, 그것들이 척척 로봇으로 변해서 지구를 지키는 용사들로 변했던 기억들. 우리들이 좋아했었던 것은 '로봇' 자체가 아니라, '변신' 이라는 과정을 좋아했었던 것 아니었나요? 우리들이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탈것들이 사실은 굉장한 변신 로봇일 수도 있겠다는 호기심과 상상력. <트랜스포머> 는 그것을 충족시켜 주었고, 때문에 우리에게 큰 재미를 줄 수 있었습니다.

변신 로봇은 변신을 해야지



영화 내부적으로 봤을 때도 이 '호기심' 의 부재는 안타깝습니다. 더이상 트랜스포머들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습니다. 때문에 자동차로, 비행기로 변신할 필요가 없지요. 단지 이동할 때만 필요할 뿐입니다.(그리고 CG팀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해서) 

영화의 메시지와도 관련있을 겁니다. 아니면 그냥 영화에 맞춰서 메시지를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트랜스포머> 는 뭔가 영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적 메시지 또한 관객들이 찾지 못할까봐, 친절하게도 옵티머스 프라임이 영화 끝에 대사로 전달해 줍니다. 1편에서는 '누구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 안에 감추어진 힘을 깨달아야 한다' 뭐 대충 이런 것이었고, 2편에서는 '자신의 맡은 임무와,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최선을 다 해서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가치로운 삶을 사는 것.' 뭐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1편의 메시지는 변신과 일맥상통하고, 2편의 메시지는 열심히 치고받고 싸우는 것과 일맥상통 하겠지요. 하여간 말이 막걸리라고 끼워 맞추기란...

더이상 트랜스포머의 존재는 남 모르는, 샘과 미카엘라만의 흥미진진한 비밀이 아니라, 대통령도 알고 군인들도 알고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그냥 병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명목은 인간과 협력하여 디셉티콘에 대항하는 것이라지만, 왠지 모르게 미군의 특수부대원(?) 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느낌이 강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트랜스포머의 비밀이 누군가에게 알려질까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고, 그 비밀을 나만 알고 있다고 혼자 즐거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싸우는 거 구경만 하면 됩니다.



캐릭터가 없다.

여기서 말하는 캐릭터는 주요 인물 거의 모두를 말합니다. 샤이아 라보프나 메간 폭스도 마찬가지고, 오토봇들도, 디셉티콘들도 개성을 상살해 버렸습니다. 그 독특한 개성을 잃어버린 캐릭터에게서는 더 이상의 강한 매력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영화 보면서 계속 마음에 떠오르는 궁금증은 '얘가 왜이러지?'

그땐 나도 샘과 같이 오마이갓을 외쳤다



1편에서의 그 도도하던 카리스마 넘치던 미카엘라는 2편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물론 여전히 남성 관객들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메간 폭스의 Hot 한 몸매는 그대로였지만;) 

사랑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건지 사람이 사랑을 변하게 하는 건지... 는 몰라도, 미카엘라는 남자친구 보고 싶어서 웹캠 앞에서 기다리다 바람맞고, 남자친구 걱정되어 부랴부랴 쫓아오고, 사랑한다는 말 듣고 싶어서 영화 내내 졸라대는 여자아이로 변해 버렸습니다. 뭐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미카엘라답지는 않았다는 거죠.


샘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샤이아 라보프가 다른 작품에서(라고 해봤자 이글아이겠지만) 좀더 어른스러워진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몰라도, 이제 아이 티를 완전히 벗었습니다. 영화 중간에 자기 스스로 힘없는 보통 '아이'라고 하는데 좀 낯간지럽더군요.

<트랜스포머> 에서 샤이아 라보프의 매력은 역시나 그 찌질함 아니었을까요. 보통 헐리우드 영웅들의 공식을 깬, 얼빵하고 겁많은 보통 소년 샘 윗위키는 대학 가더니 이미지 변신을 합니다. 다른 여자애가 달려들어도 초연하게 대처하고(!) 방 친구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거대한 디셉티콘에 맞서 겁먹지도 않고 용감히 나서서 싸우는 모습이 진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더군요.

특히나 미카엘라를 여전히 많이 사랑하는 것 같기는 한데 왜 굳이 '사랑한다' 는 말은 못하겠다는 건지... 네가 언제부터 'I Love You' 한마디 쑥쓰러워서 못할 정도로 마초 스타일이었니? 응? 너희들이 <사랑과 영혼>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냐? 하긴 그러고 보니 그때 패트릭 스웨이지 이름도 '샘' 이었구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뭐 그렇게 힘들다고? 이 짧은 인생에서 말이야. 그렇죠?

동감.



캐릭터가 없어진 것은 트랜스포머들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좀더 심하다고 볼 수도 있겠군요. 일단 대사를 하는 트랜스포머들이 몇 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괜히 로봇들에게 페이셜 애니메이션(facial animation)을 넣은 것이 한몫 단단히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벌려서 말하려면 입모양이랑 싱크 맞춰야 하니까 이래저래 작업량이 엄청 늘어나죠) 좌우지간 그래서 우리의 정겨운 로봇 친구들을 하나 하나 반갑게 맞이해야지 하는 벅찬 기대감이 있었던 저로서는 김빠지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샘을 지켜주는 수호신 범블비. 범블비 또한 1편에서는 시크한 매력이 일품이었던 멋쟁이 트랜스포머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 에 등장하는 범블비는 그런 쿨한 매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샘의 애완견(;;)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샘이 대학가서 같이 놀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하고 울고... 샘과 범블비 사이에 좀더 멋진 진짜 '친구'라는 모습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샘은 자기 위험하거나 필요할 때만 찾으니까 영 그렇더라고요. 물론 영화 후반부에 디셉티콘들을 찢어버리는 모습은 정말 멋졌습니다. 옵티머스 프라임의 박력과는 또 다른 카리스마더군요. 나, 멋있을땐 멋있다구. 하면서요.

젊은 피 범블비. 그런데 저번에 목소리 고치지 않았었냐, 너?



우리 대장님 옵티머스 프라임은 원래 멋졌으니까, 지금도 멋집니다. 무엇보다 잘 싸우죠. 그런데 그 무지막지한 진지함 가운데서 풍겨나오는 유머러스함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싸움에 지쳐서 그런지 유머 감각을 많이 상실한 것 같습니다. 다른 오토봇들과의 대화도 많이 줄었고요. (이건 역시나 그놈의 페이셜 애니메이션때문에.. 쿨럭)
그래서 <트랜스포머 2 : 패자의 역습> 에서 유머 담당은 쌍둥이 로봇 - 머드 플랩과 스키즈 (Mudflap and Skids) 라고 하는군요 - 이 담당합니다. 하지만 이 근본도 모르는 낯선 친구들은 어디에서 날아와서 이렇게 시끄럽게 떠들고 돌아다니는지. 별로 재밌지도 않은데 치고 박고 싸움질만 일삼더군요. 저는 Wall-E 와 그렘린이 떠올랐고, 어떤 분은 영화배우 스티브 부세미가 떠올랐다고 하시는데, 좌우지간 표정이나 하는 짓이 좀 밉상이라는 점에서는 스티브 부세미 쪽에 한표 던져주고 싶습니다.

그래, 이분.


좌우지간 그 이외에 아이언하이드, 라쳇 등 관록의 트랜스포머들도 그렇고, 새로이 등장한 여성 로봇인 '알씨' 도 대사 한두마디 외에는 별로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디셉티콘 측에서도 메가트론의 무력함, 스타스크림의 굴욕 등 이런저런 할말이 있지만 (특히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트랜스포머가 스타스크림이어서... 쿨럭. 왜 맨날 메가트론에게 맞고살어?) 어쨌든 트랜스포머 2에서는 많은 캐릭터들의 독특한 색깔을 잃어버리고, 그저 어중간한 위치에서 싸움질만 일삼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물론 "나의 OO 는 이렇지 않아!" 라는 식으로 개인 취향 차이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전작에서 보았던 이미지들과 매끄럽게 이어졌다면 좀더 흡입력있는 영화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전편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그놈의 미군 무기 자랑은 이번에도 눈살 찌푸리게 만들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보여지는 아메리칸 우월주의야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미국의 군사력' 에 대해 홍보하고 광고하는 영화도 드물 것입니다. 뜬금없이 무인 정찰기를 왜 띄우고, 구축함 함포 한 방으로 초대형 합체 디셉티콘인 '데바스테이터' 를 파괴시키고. (아마 이 어이없는 최후에 굉장히 많은 분들이 분개해하셨을듯... 그렇게 크게 합체해서 한다는 일이 고작 피라미드에 삽질하는 거냐. 이 초대형 굴삭기야. 우리나라 오면 할일 많겠네. ...응?) 또한 전편에 등장했던 섹터 7 요원의 코메디도 아니고 뭣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애국심. 여러 모로 봤을 때 이건 좀 아니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트랜스포머 2> 의 미군 관련 부분이었습니다.

그럼 이제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상영관으로 옮겨갈까요?




너무 뻔한 휴머니즘. 그래도 없는것보단 낫다.


많은 SF 영화에서 볼수 있는 공통된 질문이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가?"

<블레이드 러너>, <A.I.>, <매트릭스> 등등 열거하려면 끝도 없습니다.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은 이 닳고 닳은 질문을 다시 관객들에게 던집니다. 때문에 관객들 또한 대충 모범 답안을 뽑아 놓고 있지요. 그래도 이런 짜고치는 고스톱 같은 뻔한 묻고 답하기의 과정이, 그게 아예 없는 <트랜스포머> 보다는 낫게 느껴집니다. 때문에 닥치는 대로 때려부수는 <트랜스포머> 보다, 멸망한 지구를 다루고 있는 <터미네이터> 는 좀더 무게감을 얻습니다. 삶과 죽음, 생명과 가치에 대한 고뇌는 언제나 답없이 우리를 진지해지게 만드니까요.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에서는 '심장' 과 '영혼' 으로 인간성에 대한 문제를 다룹니다. 우리에겐 누구나 심장이라는 몸속 부분에 대한 일종의 로망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요. 사람의 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온 몸에 피를 박동칠 수 있도록 뜁니다. 심박은 곧 생명의 증거지요. 또, 사랑을 표현할 때 쓰고, 생명력을 의미할 때 씁니다. 뜨거운 열정의 상징이며, 따뜻한 온정의 근원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심장이 좀 지나치게 강조되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내부장기일 뿐인 심장을 너무 과다하게 상징화시켜서, 실제로 인간이라는 증거, 인간이라는 상징이 그 근육덩어리인 양 확대시켰다면 영화를 본 제가 너무 비약한 것일까요?

반은 인간, 반은 기계인 마커스가 사실 실질적인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존 코너를 돕고, 존 코너와 대립하며, 존 코너를 살려내죠. 또한 존 코너의 아버지인 카일 리스도 구해내고, 사랑하는 사람도 지켜냅니다. 그 모든 여정에서 스스로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방황하지요.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지만 기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두근거리면서 뛰고 있는 심장입니다. 그의 고민의 무게가 가벼운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영화 최후에 심장을 다쳐 죽어가는 존 코너에게, 자신의 심장을 주라고 하는 장면은 사실 너무 신파적이었습니다. 그 희생은 고귀하지만, 너무나 전형적이었고요.

하지만 정말 마커스는 멋있습니다



물론 그런 의학적인 의미의 심장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겠지요. 남을 위해 나를 값없이 희생할 수 있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이지 않은 마음. 서로를 위해주는 따스함. 바로 그게 진짜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Heart' 이고, 그것이 인간성을 증명한다. 라는 의도였을 겁니다. 마커스는 인간성을 증명하기 위해 기계들과 싸우고, 자기를 희생해서 다른 이를 살려냅니다. 하지만 그 대의를 이해한다손 쳐도 심장이라는 장기에 대한 영화의 집착은 좀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이런 저런 딴지를 걸면...

사실 적당히 진지하게 보기 괜찮은 영화였기 때문에 더 이상 무어라 하기는 민망하지만 (아마도 트랜스포머 2 를 보고 난 직후에 봐서 더 그랬겠죠) 그래도 이런 저런 딴지를 걸고 싶어지더군요. 기계에 의해 멸망당한 세계를 표현했지만, 이 세계가 정말로 기계가 지배하는 절망적인 세계인가. 그렇게 영화 속에 완전히 녹아들기 힘든 부분들이 많이 보여서 공감하고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겠지만,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 은 여러 모로 영화 보는 내내 <매트릭스> 와 비교하게끔 만들죠. 하지만 아직 자체적으로 기술 발전이 덜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스카이넷은 전 인류의 두뇌에 가상현실을 공급하는 아키텍트와 비교한다면 아직 아마추어라고밖에 볼수 없지 않을까 합니다.

왜이래? 아마추어같이.



일단 기계들의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인간의 눈높이와 인간의 시야에 맞추어져 있는 건 아닌가. 의아한 마음이 계속됐습니다. 일단 왜 사람들을 '포로' 로 잡아가는가? 영화에서는 이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습니다. <매트릭스>처럼 연료 전지로 쓰거나, <우주전쟁> 과 같이 식용으로 사용할 목적이 아니라면 대체 왜? 영화 초반부를 볼 때 아마도 일종의 생체 실험을 위한 것 같은데, 그 목적도 불분명하고, 방법도 어리석습니다. 어차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기계들인데, 하나 하나 붙들어 옴짝달싹 못하게 보관하던가, 아니면 사람들 손목 발목이라도 끊어 놔서 도망치게 못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너무 잔인한가; 하지만 상대편은 비인간적이라는 말을 모르는 기계들이잖아요) 의아하죠.

일단 '소프트웨어' 개념인 스카이넷에 왜 본부가 필요한지 모를 일입니다. 물론 '본체' 로 여겨지는 하드웨어는 없다고 전편도, 본편도 이야기하지만, 뭔가 눈에 보여서 파괴시켜야 할 건물은 있어야겠기에 인간도 잡아 가두고 T-800도 생산하는 '본부'를 만들었을 겁니다. 아니 그런대 대체 왜 터미네이터들이 '보초' 를 서는건지;;; 너무도 인간 냄새나는 이 설정에 좀 코믹함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그냥 감시 카메라를 수천개 달아서 사각지대가 없게 할 것이지. 전체적으로 너무 허술하고, 사람이 다니기 좋게 되어있고, 왠지 모르게 기계가 만들었다기 보다는 사람이 만든 것 같은 '인간적인' 건물들과 기계 도시들이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왜 너네가 직접 경계근무를 서냐.



이 모든 것이 존 코너와 카일 리스를 끌어들이기 위한 큰 계획이자 반전이었다. 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질을 잡아둔 이유도, 기계문명이 사람이 드나들기 딱 좋게 건물이나 경비장치를 허술하게 해놓은 것도 그 이유라는 거죠. 실제로 마커스는 '인간성을 가진 기계' 로 만들어진 성공적 터미네이터였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는 참 머리좋게 잘 성공했다고 하는데, 왜 끝마무리가 그모양인지? 기계들 최대의 적인 존 코너와, 그를 태어나지 못하게 만들수 있는 카일 리스가 손아귀에 있는데도 그들을 죽이는 데 구형 T-600 한 대, T-800 한 대 이렇게만 보내다니요. 전병력을 투입해서라도 없애야죠. 아니면 기지를 자폭시키던가. 여전히 탄탄한 몸을 자랑하시며(물론 CG의 도움을 받으셨겠지만) 터미네이터 1~4 전편 출연에 성공하신 아놀드 주지사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좋았지만, 다 잡은 고기도 이렇게 무난하게 놓아주는 스카이넷은 뭐 츤데레인가요? "내.. 내가 너를 좋아해서 놓아주는건 아니야!"




기계에 대한 인간의 야릇한 동경과 공포

'욕망을 가진 기계' 는 인간에게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트랜스포머 2> 의 디셉티콘은 생존이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의 스카이넷은 인류의 절멸이라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포스럽죠. 인간은 연약한 살과 뼈를 가진 존재에 불과하니까 쇳덩이로 만들어진 그것들에게 맞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공포와 함께, 인간은 그 기계들의 막강한 힘에 대한 동경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인격을 가진 기계들이 나를 배신하지 않고 내 친구가 된다면? 내 편이 되어 싸워준다면?

<트랜스포머 2> 의 오토봇과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의 마커스는 그러한 인류의 욕망의 표출입니다.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인격을 가진 기계들은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뼈와 살이 튼튼하니까요. 그들은 헌신적으로 그 단단한 몸을 이용해서 대신 맞아주고, 대신 때려주고, 인간을 구해줍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키려는 인간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좀 답답해집니다.

욕망을 가진 기계도 멀게 느껴지는데, 숭고한 가치를 가진 기계는 더욱 아득하죠. 옵티머스 프라임은 인류에 대한 이유없는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살아있는 것이 소중하다는 이유라기에는 너무 약합니다. 그래서, 사실 그에게 감정 이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대체 왜? 뭐가 이쁘다고? 이 파괴적인 종족이? 옵티머스 프라임의 싸움은 그의 의지라기보다는 인류의 의지입니다. 누군가 우리 대신 싸워줬으면 좋겠어. 인류에게 복종하고,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기계. 그 욕심과 오만함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합니다.

<터미네이터 : 미래전쟁의 시작> 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속 인류가 기계들의 핵공격 날짜를 '심판의 날' 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심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심판당한 것일까요? 인류가 기계로부터 단죄되어야 할 죄목은 무엇일까요?


야, 그만해



뭐 이야기가 쓸데없이 진지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사실 <트랜스포머> 나 <터미네이터> 같은 영화들로 인류의 가치나 의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한다는 것도 넌센스죠. 재미있게 즐겼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좀더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가지고 있어서, 볼거리와 함께 흡입력 또한 겸비한다면 더욱 좋은 작품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상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끔 해준 헐리우드의 자본력과 기획력에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냅니다.

그럼 이것으로 투정 가득했던 두 영화 리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ThEnd.


p.s. 영화 전편을 감상하시고 싶으면 아래 클릭
posted by cimple 2009. 6. 15. 23:49

칠드런 오브 맨
감독 알폰소 쿠아론 (2006 / 영국, 미국)
출연 클라이브 오웬, 줄리안 무어, 마이클 케인, 클레어 호프 애쉬티
상세보기


인류의 출산이 끊겨, 아이의 울음소리가 없는 세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절망적인 인류' 는 영화속에서 그 모습을 다양하게 갖습니다.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 시리즈에서는 각성한 기계와 컴퓨터가 인류를 절망에 빠뜨립니다.
<딥 임팩트> 나 <아마게돈> 처럼 혜성 혹은 소행성이 지구로 날아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칠드런 오브 맨' 에서 인류가 맞닥뜨린 절망은 그 궤를 달리 하는 것 같습니다.
일제히, 모든 여자들의 출산이 끊어져버린 세계.
더이상 우리의 모든 것을 전수해줄 '아이들' 이 없어져버린 세계.
거기에서 느껴지는 허무함과 절망은, 내 몸에 다가오는 질병이나 위협보다 더욱 무시무시하게 느껴집니다.
<칠드런 오브 맨> 은 그러한 절망적인 세계를 과장 없이, 침울하고 조용하게 그려냅니다.

나라의 정부는 이러한 절망적 상황 안에서도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 질서라는 명분 하에, 극심한 폭력이 개입합니다.
배타적으로 외국인들을 멀리하고, 그들을 격리하고, 가두고, 죽입니다.
그들의 폭력적 이기주의는 질서라는 이름 하에 정당화됩니다.

그들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싸움은 싸움을 위한 싸움으로 변질되어가고, 그들 또한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각자 자신의 대의 하에 다른 사람을 죽이는 폭력을 행사합니다.
절망적 상황 하에서의 폭력은, 억눌린 감정의 화풀이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들 수 있던 신념일까요?
<칠드런 오브 맨> 의 세계관은 너무도 비현실적이지만, 그 폭력들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그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체포해서 가두고, 격리해서 수용하고, 학대하고, 학살하는 장면들 말입니다.
마치 현 인류는 희망이 없어 절망에 빠진 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늘의 선물과도 같은 아기가 주어집니다.
총포와 비명이 고막을 찢고, 피와 죽음이 도처에 난무하는 곳에서
그 고귀한 아기는 존재만으로도 모두를 침묵시키고 행동을 정지시킵니다.

각자 서로의 가치를 가지고 미친듯이 죽고 죽이기를 반복하다가
마침내는 그 가치가 무엇인줄 도 모르고 싸움과 폭력만이 생의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진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눈앞에 있을 때, 인류는 침묵합니다.
다음 세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인류는 좀더 나은 것을 만들고, 좀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내 모든 삶의 노력이 나 혼자 누리다 죽어버리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시간들이 아니라,
내 아들과, 내 후손이 살아가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가치롭게 쓰여지도록. 또 그들이 가치롭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로 인해 삶은 의미를 부여받고, 살아볼 만한 것입니다.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볼 만한 것입니다.

극도로 소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가치있게 여겨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
<칠드런 오브 맨> 은 침묵으로 그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4. 30. 22:03


InTru3D 가 대체 뭐야?

  이번에 새로 개봉한 DreamWorks 의 차기작 "Monsters vs. Aliens". 지구에 침략한 외계인들을 지구에 있던 몬스터들이 상대한다는 내용이다. 컨셉 자체는 흥미로운데, 생각보다 북미에서도, 국내에서도 흥행 성적이 썩 좋지는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들어보지 못한 기술 이름이 튀어나왔다. 'InTru 3D'. 대체 InTru3D 가 뭐지?



  InTru3D를 언급하며 "Monsters vs. Aliens" 를 소개한 언론에서 이야기하기를, "최초로 제작 전 과정을 3D로 제작한 애니메이션"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걸 보니, 궁금증은 증폭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면 그동안 Full-3D 애니메이션은 제작 전 과정을 3D 로 제작하지 않았다는 건가? 스토리보드도 3D 로 그리나? 아니면 사운드가 입체 음향 녹음기술 홀로포닉스라도 사용한다는 건가? 
  Intel 과 합작한, 그냥 일종의 기술 브랜드겠지 뭐(아 귀찮아) 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영화 개봉 후, 이런 저런 평이 엇갈리면서, 또 영화를 직접 보러 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다시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결국 답은 직접 물어봐야지, 뭐. InTru3D 를 소개하는 Intel 홈페이지 내용을 소개한다.



Intru 3D 에 대하여


Intel 이 영화 속으로 들어가다

DreamWorks Animation 의 Chief Executive officer 인 Jeffrey Katzenberg 에 의하면, InTru 3D 는 "단순히 영상을 보는 수준이 아닌, 완전히 영상 속으로 들어간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DreamWorks Animation 이 2009년부터 InTru 3D 기술에 주목하고 이를 앞으로 제작하게 될 모든 상업 영화에 적용하게 된 이유이다.

DreamWorks Animation 의 이러한 '극장 안으로 들어가게끔 하는 경험' 을 위한 노력에 덧붙여, Intel 은 차세대 3D 시각 경험 및 테크놀로지를 다른 플랫폼들 - 홈 씨어터, PC, 비디오 게임, 온라인 환경 - 에서도 적용할 수 있도록 개발중이다.

 

이전에는 없었던 3D 퀄리티

관객들은 2009년 3월, "Monsters vs Aliens" 을 보면서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더욱 스토리에 깊이 몰입하고 놀라운 시각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각본 및 기획 단계에서부터 InTru3D 에 맞추어서 제작되었다. 각 영화관의 디지털 영사기술은 이제 3D 화면과 완벽하게 호환되어, 이전 3D 기술에 있었던 눈을 긴장시키고 피로하게 하는 일 없이 관객들이 3D 영화를 관람할 수 있게끔 되었다.

영화관 밖에서도 이러한 3D 영상들을 즐길 수 있다. "Monsters vs. Aliens" 3D 트레일러나, SoBe Lifewater 3D 광고, 또는 Chuck 의 스페셜 3D 에피소드 등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단편 영상들은 ColorCode 3D 라는 신기술을 통해 집에서도 3D 영상을 즐길 수 있다. 집에서도 이러한 3D 영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이전의 3D 영상 기술을 뛰어넘은 매우 고무적인 발전이다.


역사에 남을 경험, "Monsters vs. Aliens"

2009년 3월 27일은 애니메이션 역사에 있어 다음 세대로 뛰어넘어 가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이 날 관객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처음으로 InTru3D 기술을 사용하여 제작된 상업 영화인 DreamWorks Animation 의 "Monsters vs. Aliens" 안에 깊히 빠져들면서 그 도약을 함께 할 것이다. 이 코믹 액션 영화는 Reese Witherspoon, Hugh Laurie, Kiefer Sutherland, Stephen Colbert 등 쟁쟁한 스타 성우들이 연기했다. 그리고 InTru 3D 와 함께하는 기술 혁신과 상상력의 조화는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얻어지는 놀라운 체험과 재미를 한층 더하게끔 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의 역사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짤막하게 보여주는 이 영상은, 상상력과 기술력을 결합하여 캐릭터들을 창조해 내고,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던 그동안의 인간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InTru3D 기술을 통하여, Intel 은 DreamWorks Animation 이 최신, 최고의 기술력으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Intel 의 막강한 프로세서로, DreamWorks Animation 의 아티스트들은 가장 최신의 3D 저작 도구들을 최대한으로 마음껏 이용하면서 더욱 놀라운 영상, 더욱 흡입력있는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입체 영화' 라는 말이다. 뭐야, 그럼 이거?



  놀이공원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양쪽에 파란색, 빨간색 셀로판지가 붙어 있어서 영화를 보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기술. 사실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음 동영상은 윗 글에서도 언급된 <Monsters vs. Aliens> 의 3D 트레일러이다. 약간 흐릿하고 일렁거려 보이는데, InTru3D 안경을 쓰고 보면 입체 영상으로 보이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빨강, 파랑 셀로판지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색상 정보도 그대로 전달되도록 안경 안에 특수한 장치들이 적용되었다고 한다.

  즉, InTru3D 란 제작 단계에서부터 상영까지 이러한 입체 영화 상영을 위해 사용되는 Intel 과 DreamWorks의 합작 기술 이름이자, 브랜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특수한 촬영과 제작, 편집하는 데 사용되는 각종 툴과, 이렇게 제작된 입체 영화를 상영하는 데 사용되는 하이엔드급 프로세서들을 공급하는 일을 Intel 이 하는 것이다.

  설명해놓고 보니 거창하지만, 아직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인 것 같지 않다. 일단 기술력 설명에는 영화업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고 난 지금도 그다지 화제가 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해외에서의 흥행 성적도 두드러졌다고는 보기 힘들고, 국내도 마찬가지이다. 국내에는 InTru3D 안경으로 입체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 것이 원인인지, 어느 정도의 숫자의 영화관에서 <Monsters vs. Aliens> 를 입체로 관람할수 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다. 단지 입체로 영화를 즐기려면 한국어 더빙판을 봐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원어판은 자막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입체로 감상할 수 없다.

  앞으로 많은 영화가 InTru3D 로 제작되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과연 또 한번의 영상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이 시기에, 우리나라는 어떻게 대응하고 또 발전하고 있는지, 기대하고 또 두고 볼 일이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2. 4. 10:02
대한민국을 뒤흔든 연쇄살인범과, 사형 존폐론의 논쟁이 뜨겁습니다.
그 슬프도록 참혹한 현실이라는 문제 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와 세 편의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 덱스터(Dexter)


얼마 전, 인기있는 미국의 드라마 <덱스터(Dexter)> 시즌 1을 봤습니다. 약간 충격적인 내용을 가진 이 드라마는, 주인공인 '덱스터 모건' 이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하는 살인마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덱스터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인데, 그를 입양한 그의 아버지 해리는 그런 덱스터의 본성을 알고 그에게 '살아남는 법', 즉 '마땅히 죽여도 되는 인간'을 죽임으로써 그의 살인 본능을 충족시키게끔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경찰의 혈흔분석가로 일하게 된 덱스터는 자신의 정보력과 수사력을 이용하여 흉악한 연쇄 살인범들을 잡아 묶어 놓고 죽인 다음, 그의 피를 채집하여 프레파라트에 차곡 차곡 보관합니다.

아직까지 사형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집행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만들어진 드라마이기 때문일까요. 법의 테두리 밖에서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여 살인을 '집행' 하는 덱스터 모건의 이야기는 충격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또한 엄연한 연쇄살인범임에도 불구하고 유쾌한 유머 감각, 뛰어난 업무 능력, 보통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에 대한 보호본능 자극 등으로 덱스터는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가장 합당한 방법을 찾아서 가장 죽을 만한 놈들을 죽이는 덱스터의 철학. 사실, 저도 그의 모습이 무척 흥미로우며 드라마 또한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마땅히 죽어도 될 놈에 대한 잔혹한 폭력의 자행. 그것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용인과 수긍. 살인을 참을 수 없기에 살인자를 죽이는 이 덱스터의 철학이 지금 현재 우리의 논쟁과 어떻게 관련지어질 수 있을까요.


2. 라이언 일병 구하기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포함, 앞으로 언급될 영화들은 워낙 유명한 영화들이기 때문에 줄거리나 등장 인물들을 굳이 부연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갑자기 별 관계 없을 법한 전쟁 영화를 들고 나온 까닭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한 인물과, 그가 했던 행동 때문입니다.



예, 바로 '업헴' 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유태인 병사와 독일군의 처절한 백병전 중에 대검이 유태인 병사의 심장에 서서히 밀려 들어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좀 민감한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장면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며칠 동안 몸살 비슷하게 온 몸이 아파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이 상황에서 주저하며 발을 옮기지 못하는 '업헴' 이 미치도록 밉고 싫었지요.

결국,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업헴' 은 이 독일군 병사를 총으로 쏴 죽여버립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말이지요.

"널 살려두는게 아니었어."

이 자는 바로 '업헴' 이 인권을 문제로 놓아 주었던 독일군 포로였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처음 독일군 포로를 놓아 줄 때는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믿었고, 업헴이 독일군 포로를 쏴 죽일 때, 그 때는 그것이 옳은 결정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옆에 서 있는 다른 독일군은 쏴 죽이지 않고 그냥 보내주는가, 원망하면서 말이지요. 영화를 보며, 저는 전쟁이 가져다주는 폭력성에 길들여져 버렸나 봅니다.

지금도 그 독일군 병사를 업헴이 죽인 것에 대해서는 후련함을 느낍니다. 만약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제 머릿속에는 굉장한 불편함과 거북함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라는 영화에 따라붙었을 겁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결부되어 있지만, 이 살인의 판결, 그리고 그 판결의 합당함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3. 공공의 적


'공공의 적' 조규환(이성재)은 연쇄살인범입니다. 그는 부모를 죽이고,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잊을 뻔 했지만 택시 기사도 죽입니다. 사실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죽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더 이상 택시 기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이 뚜렷한 목적을 가진 영화적 장치인지, 아니면 단순히 범인의 잔혹성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인지는 몰라도 좌우지간 의아했습니다. 그도 택시기사이고, 누군가의 가족일 텐데 말입니다.

하여간 <공공의 적> 을 언급한 것은 영화의 결말 때문입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사건을 은폐하고 경찰을 조롱하기 위해 장난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공공의 적' 조규환을, 무식한 형사 강철중이 끝내 궁지로 몰아 넣습니다.

그런데, 강철중이 조규환을 한강 둔치에서 죽여버립니다.

그때, 사실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마약을 뿌리며 사형을 언도하는 강철중의 모습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에서 느꼈던 일종의 후련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왜 강철중이 직접 죽여야 하는가, 왜 저기서 조규환이 죽어버려야 하는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것으로, 사회 정의가 구현된건가, 이것으로 세상은 얼마나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나 가늠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아직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4. 추격자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500만명 이상의 많은 관객들이 함께 보고, 그 참혹함에 몸서리쳤던 영화 <추격자> 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생략하고, 역시 영화의 결말 부분만을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범인을 붙들고, 자기 자신도 거의 죽을뻔한 위기에서 지영민(하정우)의 멱살을 잡고 장도리를 치켜든 중호(김윤석). 그 때 제 마음속으로 '내려쳐라, 내려쳐라, 확 내려쳐 버려라' 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중호는 장도리를 내려치지 않고, 또 치려는 찰나 동료 형사들이 제지하여 범인은 그의 손에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장면을 다시 돌아보면, 그가 그 장도리를 내리쳐, 마치 지영민이 그랬던 것 처럼, 그의 머리통을 피가 사방에 튀도록 박살냈다면, 과연 마음이 후련해졌을까요. 이것은 또 다른 고민을 낳게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 <추격자> 가 그런 결말을 낸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하는 연쇄 살인범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내린 이 결론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권력욕이라는, 그 더러운 이름의 괴물.

이번 연쇄살인 사건과, 다른 연쇄살인 사건들을 접하며, 가장 치가 떨리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던 것은 바로 살인범들의 '권력욕의 충족' 행동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영화 <추격자> 에서 지영민이 미진을 묶어두고, 화장실에서 팬티 바람으로 말을 거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진아. 살고싶어? 왜 살아야 하는데? 네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 - 지영민, <추격자> 中

실제로 연쇄살인범들은 그들이 잡은 여성들을 묶어놓고, 말을 걸고, 그녀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권력욕을 마음껏 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였습니다.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 조차 피해자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저는 살인의 순간보다(물론 살인이 저질러지는 순간을 가벼이 여기는 발언은 아닙니다.) , 그렇게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는 권력욕을 충족시키던 그 순간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그 때 여성이 느꼈을 지옥같은 공포, 고통, 좌절. 그리고 그 틈새에 있는 실낱같은 희망의 고문.

이러한 것들을 생각했을 때, 이런 짓을 일곱 명에게, 일곱 차례나, 재미가 들려서 계속 되풀이했던 살인범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형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연쇄살인범에게서 느끼는 가장 악질의 범죄와 이유가 같습니다.
바로 권력의 획득에 대한 악착같은 욕구와, 획득한 권력을 누군가에게 마음껏 휘두르고 싶어하는 그 폭력적인 욕구에 대한 저항입니다.

저는 국민의 생명의 합법적으로 빼앗고, 말고의 권리를 국가에게 이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만큼 그 집단이 그 권력을 제대로 이용하리라는 신뢰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번 용산 참사를 보면서도, 국민의 생명에 대해서 국가가 바라보는 태도가 어떠한가를 생각할 때 더더욱 그런 권력을 국가에 주고 싶지 않아집니다. 제가 볼 때, 현재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느끼고 있는 권력욕은 연쇄살인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저항할 힘도 없는 연약한 이를 묶어두고, 희롱하고, 조롱하고, 헛된 희망을 품게 하고, 심지어 반성하지도 않고, 이제까지와 같은 쾌락을 영구히 누리려 합니다. 제가 그들을 지나치게 나쁘게 보고 있는 것인가요?

사형제도의 부활, 정확하게 말하면 사형 집행의 부활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폭력적인 권력을 선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심각하고 깊은 수준의 논의는, 이미 많은 분들이 하고 계시고, 훨씬 좋은 의견과 논거들이 존재하므로 법과 인권 문제에 대해 무지한 제가 더 이상 떠들 부분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단지 저는, 죽여버리고 싶은 범죄자가 생겨서, 사형이라는 권력을 선뜻 정부에게 넘겨주는 것은 너무 위험한 결정이 아닌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한 편의 드라마와, 세 편의 영화가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듯이, 이 문제는 정말 굉장히 복잡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 권력욕의 싸움에서 청결함을 주장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권력욕이라는 더러운 이름의 괴물을 마음 속에 키우고 있으니까요.
스타크래프트를 하면서 자신보다 약한 상대를 만나, 재미라는 명목으로 상대방을 희롱합니다. 상대방이 내가 충분한 희롱을 하기까지 계속 게임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이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의 권력에 만족함을 느낍니다. 아니면, 내가 미물이라고 생각하는 존재에 대한 괴로움은 어떻습니까? 군대에 있던 시절, 잔반통에 들어간 쥐에 펄펄 끓는 물을 부어 삶아 죽이면서, 낄낄거리는 동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괴물로부터 자유로우십니까?

저 또한 가식적으로 청결함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다들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정말 더럽고 나쁜 사람이 저이지요. 들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왔던 과거를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 다시는 다른 이의 고통을 즐거워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야 좀더 나은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겠지요.

...휴. 그러고 싶네요.

ThEnd.
posted by cimple 2009. 2. 4. 07:13
해프닝
감독 M. 나이트 샤말란 (2008 / 미국)
출연 마크 월버그, 주이 디샤넬, 존 레귀자모, 애슐린 산체스
상세보기


'어떤 일' 의 과학적이고도 명확한 설명에 대한 인간의 집착, 비판.

명쾌하고, 분명했습니다.
영화를 본 이후, 이렇게 또렷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제 머릿속에 들어오고, 그 메시지가 밝은 것도 오랜만인 것 같네요. 물론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이 제가 받아들인 것과 동일하게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제가 본 영화 '해프닝' 은 그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 구조만큼이나 간결하고 명확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였습니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영화를 보고 난 주위 사람들로부터 주로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대체 뭘 말하려는 지 모르겠다."
"뭐가 어쨌다는 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저는 그들의 이러한 반응들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와 비교하여, 얼마나 기막힌 아이러니인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화는 특별한 이유 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정확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죽어 나갑니다.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자살을 해 나갑니다.
처음에는 테러리스트의 소행인 줄 알았지만, 관찰 분석 및 연구 결과 이 현상은 '자연적인' 일이며, 특수한 화학 물질이 인간의 자기방어기제를 자기공격기제로 바꾸는 현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은 이러한 일들이 '나무' 에서 기인한다고 가설을 세우며, 나무가 집단을 가진 인간을 공격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하고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살아 남습니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메시지는, "인간이 잘 모르는 것도 존재한다" 입니다. 이것을 꾸준히 역설합니다. 끝내 영화는 이러한 현상이 왜 생겼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인간의 파괴적인 행동에 대한 자연의 경고이고, 나무의 공격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어째서 이러한 일이 생겼는지 밝히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밝히 알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고, 어느 정도 그 현상을 분석해 내는데는 성공합니다.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인간이 과학적 사고를 하는 방법이지요.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하는 과정. 인간이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 그리고 특정 크기의 집단이 죽는 이유와, 어떻게 하면 살아 남을수 있는가 등등을 찾아 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잘 모르는 것' 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발달한 현대 과학사회의 사람들은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잘 모르는 것이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즈음, 이번에 일어난 일에 대해 명확한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인간에 대한 자연의 경고라는 전문가의 의견에 대해 시청자들과 아나운서는 굉장히 냉소적인 시선을 던집니다. 그리고, 사건이 미국 북동부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놓고, 사람들은 그 배후에 정부가 존재할 것이라는 음모 이론으로 이것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잘 모르는 것' 으로 방치하는 것 보다는 마음이 편하니까요. 그것이 과학적인 사고이고, 합리적인 이성이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을요.

자연을 분석하고, 인간과 그 주위의 모든 현상을 연구하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아직까지 인간에게는 미지의 영역, 전혀 모르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고, '알 수 없는 것' 으로 남겨진 것들이 무한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지성체이며, 과학적이라 생각하는 인간은 이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잘 모르는 것' 으로 남겨두는 것을 죄악으로 여깁니다. '잘 모르는 것' 을 연구하고 탐구하는 과학이라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비밀도 인간은 모두 밝혀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는 과학의 오류와, 교만함과 오만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불확실성과 미지의 것 투성이일 텐데, 그래서 영화에서 나오는 수학 교사의 말처럼 인간은 근거 없는 62% 라는 숫자라도 제시받았을 때 위안을 받는 존재인데도 인간은 스스로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상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차를 태워달라는 애절한 부탁을 묵살하고 출발해버리는 이기심이고, 꽁꽁 문을 닫아버리고 도움을 청하는 바깥 사람에게 총을 쏴버리는 얼굴 없는 학살자입니다. 과연 이러한 인간의 폭력성과 이기심, 잔혹함도 과학과 이성, 합리적인 사고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영화 내내 사람들은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결국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부분들, 컴퓨터로는 프로그래밍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같은 것들이 현존함을 부정한다면,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스스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영화는 역설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난 후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대체 뭘 말하려는 지 모르겠다."
"뭐가 어쨌다는 건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우리에게는 무언가를 보고, 그 원인, 과정, 결과, 의미, 모든 것을 명명백백히 알아야만 하는 일종의 집착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추상화를 감상하는 것과 비견될 수 있겠습니다. 추상화를 보며, 많은 사람들은 대체 이게 무엇을 그린 것인가? 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질문합니다. 무언가 있을 것이다. 무언가 의미하고 있을 것이다.


그림 1. 잭슨 폴록의 추상화.



하지만 추상화는 그렇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화를 보고 있는 순간 '예술' 과 '나' 라는 존재가 있어서, 그 상호작용 안에서 예술적 가치가 만들어지는 그림일 텝니다. 거기에 대놓고 과학적, 합리적, 이성적인 이유와 원인, 설명을 요구한다면 허공에 공허하게 울리는 외침이 아닐까요.

영화 <해프닝> 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최고의 위치에서 끌어 내리더니,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 버리고, 요즈음에는 아예 그런 것이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믿는 당신에게도, 바로 오늘, 지금 이순간, '어떤 일' 들은 끊임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ThEnd.


p.s. 여주인공 주이 디샤넬은 정말 아름답더군요. 영화 보는 내내 "우와..." 최근 보았던 영화 <예스맨> 의 여주인공이었다는 사실도 최근에 알았습니다.

그림 2. 주이 디샤넬.



p.s.2. 공감 많았던 영화 내용에 반해, 좀 지나치게 잔혹한 장면들이 많았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의 메시지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좀 불필요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좀 관객들에게 충격이 필요하긴 했겠지만서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