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09. 10. 20. 23:43

디스트릭트 9
감독 닐 브롬캠프 (2009 / 미국)
출연 샬토 코플리, 윌리엄 앨런 영, 로버트 홉스, 케네스 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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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만족스러운 영화.

일단,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만족스러운 영화를 보았다는 말로 리뷰를 시작해야겠습니다. 만족스럽다는 기준은 참 주관적이고 애매모호합니다. 그것은 전체적인 '총평' 인지라, 무언가 명확한 기준들을 하나 하나 내세워 구별짓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디스트릭트 9> 은 참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슴 어디엔가가 묵직한 것이 느껴지는 영화. 내가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인해 내 삶이 해석당하는 느낌의 영화. 그런 일종의 감성적 포만감을, 디스트릭트 9은 주고 있습니다.

District 9 의 포스터



요하네스버그, 그리고 디스트릭트 9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거대한 외계 우주선이 멈추어 섭니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랍고,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겠죠. 그런데 우주선 내로 강제 진입이 이루어지고,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외계인들의 실체가 밝혀집니다. 인간이 외계인을 보살펴야 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외계인 수용 시설이 만들어지고, 외계인들은 그 곳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바로 디스트릭트 9 입니다.

호기심이 사라지고 난 후, 인간의 태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공존하게 된 외계인의 존재는 귀찮고, 거추장스러울 따름입니다. 외계인에 대한 혐오. 배척. 차별은 삽시간에 확산되고, 그들을 지능낮은 벌레라는 '프런' 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프런들은 물도, 음식도, 의약품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쓰레기 더미 속을 뒤지며 비참하게 살아갑니다.

이에 외계인에 대한 강제적인 이주 정책이 실시됩니다. MNU(Multi-National United) 는 군 병력을 투입, 디스트릭트 9 의 외계인들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명목상은 더 나은 환경의 제공이지만, 귀찮은 외계인들을 한켠으로 '청소' 해 버리기 위한 수단이지요. 영화는 여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요하네스버그 상공의 거대한 우주선



이야기의 배경이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인 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니겠죠. 사전 지식 없이 보아도,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상상의 산물이 아닌,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건들임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남아공 정부는 1904년 요하네스버그의 도시 빈민가인 쿨리타운스(Coolietowns) 에 거주중인 유색인종들을 도심으로부터 남서부 20km에 위치한 클립스프룻(Klipspruit) 으로 강제 이동시킵니다. 대외적인 이유는 빈민층 주거환경 개선이었지만, 움푹 파인 분지 지형에 하수도 시스템으로부터 3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클립스프룻은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죠. 사실 진짜 목적은 요하네스버그에 유입된 백인들에게 주택 부지를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후로도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로 불리우는 소수 백인과 다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인종분리 정책이 법제화되면서, 남아공은 인종차별문제의 가장 대표적인 국가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록 92년에 인종분리정책 폐지 이후 17년동안 남아공은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여전히 뿌리깊은 인종 문제는 남아공의 커다란 숙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남아공 출신 감독인 닐 블롬캠프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던 이 인종 차별 문제를 노골적으로 솔직하게 파고듭니다.



평범하게 사악하고, 보통으로 착한, 비커스.

영화의 주인공은 MNU 소속의 '비커스'입니다. 처음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사무실에서 펜대나 굴리고 있을 법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무직 직원입니다. 그가 디스트릭트 9 이주 정책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의 애인이 바로 MNU 국장의 딸이기 때문에 이루어진 낙하산 인사입니다.

영화의 주인공, 인간 비커스


그는 외계인들을 디스트릭트 9에서 강제 이주시키기 위한 합법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해, 거주중인 외계인들에게 형식적인 서명을 받으러 다닙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숨겨진 목적은 외계인들이 숨기고 있는 외계인 무기들을 찾아내어 압수하는 것이지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착실하게도 수행하는 그는 평범하게 악합니다. 외계인들의 알을 불태울 때 팝콘 터지는 소리가 난다며 낄낄대고, 외계인의 자식을 가지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커스가 지독한 외계인 혐오주의자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는 그냥 평범할 뿐이죠. 우리처럼 말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고로 외계 물질(유동체)에 감염되면서 상황은 바뀝니다. 그의 팔이 외계인의 팔로 변하게 되자, 외계인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외계인 뿐이기에 MNU는 그를 가지고 갖가지 생체 실험을 하기에 이릅니다. 해부당하기 직전에 간신히 탈출한 비커스는 디스트릭트 9 으로 돌아갑니다. 우월하고 우등하던 지배와 억압의 위치에서, 삽시간에 비커스는 인간의 추악하고 탐욕스러운 욕망의 희생자로 전락합니다. 쓰레기를 뒤지고, 움막에서 잠들고, 고양이 먹이를 게걸스럽게 손으로 집어먹으면서, 평범했던 비커스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변모해갑니다.

영화의 주인공, 외계인 크리스토퍼

그리고 디스트릭트 9 에서 비커스는 또 한명의 주인공, 외계인 크리스토퍼를 만나게 됩니다.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토퍼는 지구에 머무르던 20년동안 '유동체' 를 모았는데, 이것으로 지하의 수송선을 띄운 뒤 모선으로 복귀하여 고향 별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동체는 바로 비커스를 감염시켰던 그 물질이고, 때문에 이 유동체는 MNU 본부로 압수당해 버린 상태입니다. 크리스토퍼는 비커스에게, 이 유동체를 구해 오면 모선에 있는 의료기로 비커스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비커스와 크리스토퍼는 둘 다, '인간다운 삶(?)' 의 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MNU 에 침투해서 유동체를 가져오기로 결심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MNU 지하 4층에서 유동체를 발견해서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그 곳에서 크리스토퍼는 끔찍한 것을 발견합니다. 바로 인간들이 자신의 동족을 붙잡아 생체 실험을 한 현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실험대 위에서 잔인하게 파헤쳐져 있는 동족의 시체를 보고 심한 충격을 받은 크리스토퍼는 분노합니다. 디스트릭트 9 으로 돌아온 뒤, 크리스토퍼는 낮게 중얼거립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군대를 불러 올 것이다."


비커스를 잡으려는 MNU, 그리고 비커스를 잡아 먹어서 그 힘을 가지려는 남아공 갱단 두목, 그리고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비커스와 크리스토퍼간의 피과 살이 튀기는 잔인한 싸움이 디스트릭트 9 에서 펼쳐집니다. 크리스토퍼와 함께 목숨을 걸며 탈출하던 비커스는, 결국 자신이 희생하고 크리스토퍼를 고향으로 돌려 보내는 선택을 합니다.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보통 사람이던 그가 다른 종족, 다른 존재를 진심으로 위하고, 공감하며, 헌신하는 영웅으로 변모합니다. 끝내 크리스토퍼는 모선으로 복귀하게 되고, 거대한 모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모선은 떠나가고, 남은 외계인들은 디스트릭트 10 으로 이주하게 되자 인간들은 기뻐합니다. 훗날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 채.



아종에 대한 차별. 무시. 포악. 약한 상대에 대한 폭력. 우월의식. 탐욕. 그것으로 인류는 멸망하리라.

<인디펜던스 데이>, <우주 전쟁>, <화성침공> 등 외계인의 인류 침공에 대해 그렸던 영화는 많습니다. 그러고보니 저 또한 그런 소재로 소설을 쓴 적도 있군요. 하지만 그런 영화들은 외계인의 이유없는 정복욕과 사악함을 전제로 하여, 그에 대한 인류의 저항을 숭고하게 그립니다. 아무 죄 없이 침공받는 인간들은 억울한 희생자이며, 그들의 싸움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행동입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 9> 의 접근은 전혀 다릅니다. 자신들보다 조금 못해 보인다고 해서 인류는 외계인을 학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에 대한 욕심으로 외계인을 생체실험하며,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외계인을 해부합니다. 그 잔인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능으로 인해, 크리스토퍼는 분노하고, 군대를 데려와 복수할 것을 다짐합니다. 외계인의 본래 과학기술은 인간의 그것보다 훨씬 앞서 있습니다. 아마도 <디스트릭트 9> 의 세계관에서, 인류는 얼마 못 가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자신들의 죄로 인해서.

영화의 포스터. 다른 종에 대한 '차별' 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이 비유는 직유법처럼 명백합니다. 여전히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과 '다른 집단' 에 대해 선을 긋고, 배척하며, 심지어 한없이 잔인해집니다.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집단이 그러지 못한 집단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은 너무나도 흔한 일입니다. 피가 튀기고 사람이 죽어 나가는 폭력 또한 세계 도처에 여전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멸시와 차별로 다른 이를 상처주고 좌절하게 하는 일은 우리 바로 곁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야 성공할 수 있다고, 현명한 일이라고 학교와 선배들은 가르치며, 도덕과 윤리, 희생과 헌신은 고리타분하고 어리석은 한심한 소리로 치부됩니다.

정말로, 인류는 이로 인해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대는 가고, 피터 잭슨의 시대가 오다.

영화의 원작은 같은 감독, 네일 브롬캠프의 6분짜리 단편 'Alive in Jobug'(2005) 입니다. 이것을 눈여겨 본 피터 잭슨의 제작으로 <District 9> 은 탄생했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았던, CG를 하는 친구들끼리 형성된 공감대는 이제 스티븐 스필버그의 시대는 가고, 피터 잭슨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인물의 이름은 직접적이기보다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전자가 미국 중심의 가족적이고 오락적인, 소위 우리가 알고 있던 '전형적인' 헐리우드 상업영화를 말한다면, 후자 즉 피터 잭슨의 영화는 그 주제와 스토리텔링, 영화적 기법에서 새로운 할리우드의 방향성을 제시해 나가고 있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잭슨... 은 아니고 둘다 피터잭슨. (응?)


기법 이야기가 나왔으니, 영화의 CG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의 컴퓨터 그래픽은 거의 흠잡을 데 없이 매우 훌륭하지만, 정작 영화는 3천만불이라는 헐리우드 영화치고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러닝타임 상당부분을 TV 뉴스 화면, 인터뷰, CCTV 화면 등으로 현실감과 현장감있게 구성함과 동시에, 정교한 CG 에 대한 부담감을 대폭 줄인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린 것입니다. CG를 하는 입장에서, CCTV와 같이 낮은 화질 안에 그럴듯한 CG 캐릭터를 넣는다는 것은 부담이 확 줄어드는 일입니다. 이제 CG 물량으로 쏟아부어서, 관객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가져다 주는 영화는 한계점에 다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결국 영화가 돌아갈 곳은, 얼마나 그럴듯하고 심금을 울릴 만한 '이야기' 로 관객을 설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헐리우드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가장 미국적인' 상징 중의 하나인 헐리우드 영화가, 과연 인류의 차별과 억압을 해소시키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지 그것조차 이미 경제적, 문화적으로 우월함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의 참신한 오락거리, 새로운 재밋거리로서의 소재일 뿐일까요. 그러나 적어도 <디스트릭트 9> 은 우리 가운데 그러한 자그마한 논쟁거리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을 만한 영화였습니다.

좋은 영화를 원하신다면, 한번쯤 보세요.

ThEnd.


p.s. 감독의 6분자리 단편 'Alive in Jobug' 의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