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cimple 2009. 11. 20. 23:13
로드(THE ROAD)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코맥 매카시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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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세계.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온 세상이 불에 타 버렸습니다.

소설 'The Road' 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이미 온 세상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이유도, 원인도 모릅니다. 산도, 강도, 도시도, 인간의 영혼도 불에 타버린 세계. 태양이 가리워져 온기를 찾을 수 없고, 재가 섞여 검은 눈이 내리는 무채색의 세상.

그 잿더미 속을 아버지와 아들이 걸어갑니다.

그 가는 길의 목적지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남쪽'으로  향하지만, 그 곳에 도착할 곳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걷습니다. 걷고, 또 걷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는 무덤덤한 표정의 살인자이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밤은 하루도 어김 없이 두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리고 영혼없는 인간들이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먹습니다. 어린 아들은 사람을 먹는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로, 사람을 먹지 않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로 부릅니다. 불타버린 세상에서 인생의 화두와 인간의 가치는 단순히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책장 가득 쌓인 인류의 거짓말들

불타버린 세계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약한 자들의 꿈틀거림을 코맥 매카시는 정밀하게 묘사합니다. 그 소묘는 연필선 한줄 한줄이 불편할 정도로까지 정밀해서,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던 부분까지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표현 중의 하나는, 주인공이 불타버린 도서관을 거닐면서 말한 '책장 가득, 인류의 거짓말들이 쌓여 있었다' 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멸망과 생존이라는 단순한 글자 앞에서 인류의 많은 것들이 껍데기가 벗겨진 채 실체가 드러납니다.  소설 'The Road' 는 그 거름종이을 통해, 이제껏 부풀려진 인간의 허세를 받쳐 냅니다. 그리고 그 위에 남은 찌꺼기들을 묵묵히 보여줄 따름입니다. 마치, 수술 후 보호자에게 적출물을 보여주는 의사의 직무처럼.


길을 걷는 것.

소설을 읽고 나서, 가게에 들러 보았습니다. 가게에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먹을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먹을 것 가득한 진열대가 황량하게 텅 비어버린 세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어둠의 공포를 형광등이 몰아내지 못하는 세상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The Road' 의 불타버린 세계처럼, 인류가 더이상 삶에 풍족을 쌓아두지 못한다면, 인간이 시도해 볼 만한 것은 무엇인가. 고민해 보았습니다.

'The Road' 의 아버지와 아들은 길을 걸어갑니다. 물론 음식을 찾아서, 따뜻한 곳을 찾아서, 끊임없이 걸어가지만, 그들이 목표로 한다는 '남쪽' 의 실체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남쪽을 향해 걷는 것이 옳다고 믿으며 걷습니다. 그 길을 걷는 것에 대해 소설 'The Road' 는 가치 판단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나면 누구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모습과 닮았다 여겨집니다. 보통 살아가는 삶도 똑같이, 먹지 않는다면 죽고, 온기 없이 땅에서 자면 죽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구하고 잠자리를 마련하면서도, 어떻게든 '남쪽' 을 향해 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남쪽에 가면 뭐가 있나? 그냥, 뭐가 있을 것 같아. 그렇게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이, 썩을 것을 비축하지 못하는 발걸음 가벼운 인류의 마지막 자존심입니다.


ThEnd.



p.s. 퓰리처상을 수상한 코맥 맥카시의 소설 'The Road' 는 2010년 1월에 영화로 개봉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The Road' 의 불타버린 세계를 영상으로 옮긴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대되면서도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cimple 2009. 10. 14. 14:15


고객 체험의 경제학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b.조지프 파인2세 외 (세종서적,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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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로운 것은 돈인데, 그보다 약간 더 가치있는 것은 경험이다’. 아마 경험은 돈을 주고 손쉽게 살 수 없는, 삶의 여러 일들을 겪어가면서 차근 차근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그 경험이 가장 주목받고 효율적인 상품이 되어버렸다. 물론 우리가 경험이라 지칭하는 삶의 모든 영역이 돈에 의해 잠식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영역도 영원한 성역을 자처할 수 없다.

가족의 행복한 나들이, 연인의 달콤한 데이트, 신도의 거룩한 종교예식, 청년의 열정적인 꿈과 노력이 기업의 상품으로 디자인되고 판매된다. 이러한 기업 활동은 곧 연극이다. 기업은 소비자를 상대로 하는 커다란 판을 꾸민다. 그 연극은 소비자가 물건을 구매할 때에나, 테마 파크를 거니는 잠시 잠깐 동안일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소비자는 잘 짜여진 각본 안에서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며, 행복한 기억들로 인생을 채워 나가려 한다. 물건을 구입하는 것은 허무하지만, 경험을 구입하는 것은 아깝지 않다. 바로 이것이 체험 경제. 경험의 경제학이다.

사실 좋은 경험을 판매한다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특히나 서비스 산업에서, 경험 상품이란 ‘좋은 서비스’ 로 그 의미와 역할이 축소되기 쉽다. 하지만 서비스 자체도 범용화되어 버리고,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공산품의 그늘이 드리워진 이 때, 고객으로 하여금 서비스 그 이상의 좋은 만족감과 기억을 남긴다는 구체적 목적은 또 다른 상품의 영역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하다.

기업은 의도적으로 고객이 느낄 감정과 뇌리에 남을 이미지들을 긍정적으로 조작해 내려 하고, 여기에서 진실과 가식, 본질과 비본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보다 환상적인 동화를 원하는데, 그것이 본질적으로 진실이든, 아니든, 어차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만족스러운 경험이다. 모호한 진정성을 붙드는 것 보다는, 확실한 행복감을 보장하는 것이 낫다. 따라서 기업들은 연극의 연출가로 변모한다. 어차피 기술의 발달로 상품의 질로 승부하는 시대는 지났으니, 산더미같이 생산된 상품은 뒤로 숨겨두고, 자신의 매장과 자신의 사원들로 하여금 고객이 남다른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 경험 자체를 돈을 받고 판다. 체험에 대해 돈이 오간다는 것, 즉 매장에서 입장료를 받고, 특정 시설에서 체험료를 받는다는 새로운 개념은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중요하다. 기업은 돈을 받고 판매되는 상품인 만큼 더욱 고객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해 주목하고, 모든 것을 끊임없이 새롭게 구성하고 기획한다. 소비자 또한 자신이 돈까지 내고 즐기는 체험에 대해 더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몰입하고 몰두한다.

이러한 신개념 경제 논리는 사회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삶에도 깊숙이 개입한다. 나를 어떻게 체험하게 할 것인가? 스스로를 디자인하고, 연기로 자신을 포장해야 하는 시대. 삶 전체를 연극처럼 꾸며 나가야 하는 시대.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오늘도 일용할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묵묵히 집 밖을 나서는 지금 이 시대 우리들에게.

Q. 책은 첫머리에서부터 ‘우리의 관심은 도덕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체험을 전개할 것인가이다’ 라며 체험 상품에 대해 도덕적 중립성을 전제했다. 하지만 정말로 체험 경제의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그 사회적 윤리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아야 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도박, 음란한 체험 등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나쁜 체험 상품’ 부터, ‘매장에 돈을 받고 들어가게 하는’ 체험 상품 시스템이 특정 계층에 대한 소비 영역 접근 자체를 차단시켜 버림으로써 양극화와 사회불만을 낳는 악영향까지. 체험 상품의 도덕적 결함으로 인한 문제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 이에 대한 대책을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9. 24. 03:40
소유의 종말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제레미 리프킨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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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의 속박보다, 우리는 가벼운 접속을 원한다.

소유는 공허하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 들면서도 그것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느끼고, 이야기했다. 따라서 인간사회는 많이 소유하려 하는 세속적 집단과 많이 소유하지 않으려 하는 고상한 집단으로 손쉽게 분화되었다. 소유의 문제는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함에 있어, 그 다양한 요소들의 원리를 규정하는 데 핵심 주제였다.

그러나 접속의 시대는 다르다. 이제껏 인간생활을 굳건히도 붙들어왔던 소유의 개념이 해체되며, 그 반대쪽에 서 있던 고상한 가치들, 즉 소유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개인의 만족감, 행복, 즐거움, 등이 ‘경험의 접속’ 안에 복속되었다. 다시 말해, 이제껏 인류가 소유의 반대편에 서서 숭고하게 여겨왔던, ‘삶의 소중한 것들에 대한 경험’ 마저, 기업에 의해 판매되는 상품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거운 소유가 아닌 가벼운 접속으로 얻을 수 있으며, 손쉽게 누리고 또 폐기할 수 있다. 소유가 없는 삶은 가벼워지며, 그 무게만큼이나 자유롭지만 또한 정처없다. 우리 삶의 베이스캠프라는 ‘집’ 조차 소유의 개념을 상실함으로써 가치와 의미가 불분명해지고, 우리는 진정으로 붙들고 가진 것 없이 삶의 모든 것을 잠시 빌리고, 잠시 즐기고, 잠시 누린 다음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한다. 인생 전반에 걸쳐 느끼고 경험하는 시간들 자체가 사고 파는 물품으로 간주된다. 더 이상 숭고한 가치들의 성역은 없다. 자본주의는 손으로 잡을수 있었던 물건에 흥미를 잃고, 이제 우리 개개인의 머릿속과 마음속에 들어있는 무형의 상품에 손을 뻗는다. 우리는 실체가 없는 것을 소비하며, 형태도 없는 것에 집착한다.

접속의 시대를 간파한 이들이 생산해내는 상품들은, 뚜렷하게 빈부와 접속권의 격차를 가르는 모습이다. 부자가 오히려 소유의 무게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소유의 시대에 집착하고 있는 서민들, 접속권을 박탈당한 소외된 계층은 소위 말하는 ‘1세계 계층’, ‘제 1집단’ 이 누리고 남은 찌꺼기들에 집착한다. 부유한 이들이 ‘가볍게도’ 고급 주택이나 승용차를 임대할 때, 가난한 이들은 집 한 채를 사기 위해 평생을 쏟아넣는다. 발달된 네트워크망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이들은 세련된 방식으로 접속의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이들은 정보와 부의 분배에 급속도로 뒤처지게 된다. 이는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든 극심한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다. 접속 자체의 여부에서 벌어지는 간극은 메워지기 어렵다. 네트워크 접속의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이 사회의 리더로 진출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렇게 새롭게 재편되는 소유의 개념 안에서, 우리는 발빠른 포식자들의 네트워크에 종속되어 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류가 지켜온 성역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다가오는 접속의 시대의 자본 논리에 맞서서, 우리가 여전히 사수하고 있고 지켜 나가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ThEnd.

p.s. 이 책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네트워크가 연결되어 있다’ 라는 사실로 가능해진 또 하나의 중요한 속성, 바로 ‘공유와 나눔’ 에 대한 부분이다. 인류는 네트워크가 구성되자, 특별한 소득이 없음에도 자신의 것을 그저 나눠주기 시작했다. 기존 자본주의는, 소유가 종말되고 접속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면서도, 자본을 독점하고 권력을 누리려는 기존 전략을 가상 세계에서도 그대로 구현하려 한다. 그러나 Web 2.0 으로 대표되는 이 ‘공유’ 와 ‘나눔’ 의 정신은, 진정으로 소유에서 해방된, 인류가 가지고 있는 또다른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접속의 시대에 대한 두려움에서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posted by cimple 2009. 2. 1. 19:31

괴물의 탄생
카테고리 경제/경영
지은이 우석훈 (개마고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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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에 대한 나의 무식함.

‘경제’ 를 아시나요? ‘경제’ 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신가요?

당신은 경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박식한 수준의 경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경제에 대해 몹시도 무지하고 미련한 일자무식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저와 같은, 좋게 말해서 관심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무식할 수도 있겠지요. 글 처음부터 무식하다 어쩌다 해서 기분 나쁘실 수도 있겠지만, 툭 터놓고 이야기 했으면 좋겠습니다. 뭐, 누가 보나요. 당신과 저만 아는 비밀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석훈 씨가 쓴 이 책, 「괴물의 탄생」은 저에게는 저의 무식함을 책망하지 않고 경제와 경제학에 대해서 알려준 고마운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저는 대체 경제가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한창 세계 경제가 어렵다, 국가 경제가 어렵다 하는데 대체 무엇이 ‘경제가 어렵다’ 는 것이고, 대체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들이 있는가 알 수 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아직까지 ‘밝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어렴풋이, 윤곽을 잡고, 무언가 아는 것 같기는 하다, 그 정도입니다. 책 한권 읽었다고 제가 미네르바처럼 국가 경제에 대해 수준 높은 예견을 한다던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지는 못하겠지요. 단지, 그 ‘무언가 아는 것 같기는 하다’ 라는 사실이 즐겁고, 또 누군가에게 그런 즐거움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이제껏 저에게 경제란 그저 입에 올리기 꺼려지는 돈 이야기, 그리고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갑자기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물가가 올라 먹고살기 힘들어진다는 것 정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면 극복할 수 있다. 하는 정도였지요. 나라의 정책이 어떻고, 국제 정세가 어떻고, 이런 것은 그저 TV 뉴스에서 떠드는 저와는 먼 이야기였습니다. 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것이 물가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몰랐다면, 저의 무식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 책, 「괴물의 탄생」에서 저는 경제와 경제학의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 강의 식으로 구성된 책의 구조와 문체도 제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강의가 있었다면 열심히 듣고, 과제도 하고, 레포트도 쓰고 하면서, A+ 받을수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 공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말이지요.


세계 경제와 경제학의 역사,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야기

지금부터 제가 책에서 배울 수 있었던 유익한 점들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물론 책에서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을 가르치고, 또 말하고 있으니 저자인 우석훈 교수님께서 혹시라도 제 글을 읽으신다면 “뭐야, 이거 헛읽었구만” 하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네요. 단 한번 읽어서는 경제학의 유치원생인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힘들었던 부분이 많습니다. 나중에, 경제학적 소양이 더 쌓이고 난 다음에 읽으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지도요.

먼저, 이 책을 통해 세계 경제와 경제학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 경제는 어떠한 흐름으로 발전하고 발달해왔는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그것을 유통시키는 방법에 대해, 학자들은 어떻게 연구하고 또 말해왔는가 알 수 있었지요. 역사를 통해, 경제학은 두 가지 힘의 충돌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그 두 가지 힘이란 바로 ‘국가’ 와 ‘시장’ 이지요. 경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데,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가, 아니면 시장에게 맡겨 둘 것인가. 국가의 주도적 개입이 극에 달하면 사회주의이고, 시장의 힘이 강한 것이 바로 현대에 득세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라고 하겠습니다. 역사를 거쳐 오면서 많은 국가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시장과 국가의 주도권 싸움을 풀어 나갔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요? 이 책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유익한 점이라면, 바로 경제학적 시각으로 바라본 역대 우리나라 위정자들의 정책과, 그 의미,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온 영향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박정희는 무슨 정책으로 발전을 이룩했고, 전두환은 물가를 잡기 위해 무슨 짓을 했으며, 김영삼은 대체 왜 IMF 라는 환란으로 나라를 밀어넣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과 노무현은 그 이후에 어떤 식으로 나라를 몰아갔고, 이명박은 왜 욕을 먹어야만 하는가,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그 ‘정책’ 들과 그 정책이 가지고 온 파장, 그리고 우리나라가 가지고 온 고질적인 문제점이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등을 소상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지금 이 글에서 설명하기는 무리일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싶으시다면 책을 보시고,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아, 그랬구나. 무언가 알 것 같다’ 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안목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큰 자산입니다. TV 뉴스를 볼 때, 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다, 어떤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한다, 할 때 저것이 앞으로 어떠한 파급 효과를 가지고 올 것인가 판단하고, 이해하고, 그것에 찬성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되겠지요. 무조건 “한나라당이 하는 거니까 안 봐도 뻔해” -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더러운 똥이라고 침 뱉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팔을 걷어 붙이고 삽으로 떠서 밭에다 가져다 버리는 노력이 있어야겠지요. 앎의 노력, 판단의 수고로움이 나라를 사는 우리들에게, 특히 저와 같은 청년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라는 질문에 글쓴이 우석훈 교수님에게도 참 어려운 질문이었다고 합니다.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제까지 있던 일을 분석하기는 쉽지만, 한치 앞의 미래를 예견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자고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서 ‘네가 그렇게 잘났으면 대안을 내놓아봐라’ 하는 요구만큼 막무가내도 없습니다. 논쟁할 때에도 되도록 이 말은 피했으면 합니다. 좌우지간, 우석훈 교수님은 대안을 내놓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이 사실 제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제 3부문’ 이라는 대안입니다.

‘제 3부문’ 이란, 앞에서 언급했던 경제의 흐름을 주도하는 강력한 두 주체, 즉 국가와 시장이 아닌 다른 주체를 말합니다. 국가를 ‘제 1부문’, 시장을 ‘제 2부문’ 으로 본다면, 이 국가와 시장 사이에서 둘 사이의 관계를 완충하고, 자생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제 3부문’ 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럽 등 국민소득 4만불을 넘어서는 선진국가, 복지국가에서는 이러한 ‘제 3부문’ 이 하나의 당당한 경제 주체로서 자리잡아 일자리를 창출해 내고, 돈을 돌게 하고, 문화를 생산하고, 복지를 실현시키는 등 긍정적은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로서는 ‘제 3부문’ 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또 세계 경제학에서도 이 ‘제 3부문’ 이라는 개념은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역사회의 생활협동조합, 특산물 및 전통공예산업 등의 지역적 특화상품 생산, 대기업들의 자발적 후원으로 조성되어 정부나 시장의 간섭없이 운영되는 복지 기금 등이 있습니다. 책에서는 이러한 ‘제 3부문’ 이 경제에서 어떠한 역할을 가지고 있고, 어떤 식으로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돌파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설명하고 있지만, 제가 지금 그것을 다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단지, 이러한 ‘제 3부문의 활약’에서 제가 받을 수 있었던 뉘앙스는, 단순한 법률 한 조각, 정책적으로 지원되는 돈 한 다발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경제의 문제를 경제논리로 풀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요점입니다. ‘윤리경영’, ‘호혜성’ 과 같은 단어들의 논의되고, 나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정상적인 경제 활동으로의 회복. 이것이 바로 책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대한민국 경제대안의 요체가 아닐까 합니다.


흐름, 흐름.

저는 문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문화만 잘 알면 돼,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문화가 뭔지도 잘 모르고 말이지요.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은 경제입니다. 내가 먹고, 쓰고 있는 모든 것은 다른 누군가가 만들고, 키워낸 것입니다. 모두가 혼자 살고 싶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살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도움을 받고,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갑니다. 이 더불어 사는 삶이 경제의 참 모습이고, 경제학의 참 목표일 것입니다. 보다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보다 빨리 커나가는 것이 집중했던 경제가 이제 서서히 그 목표를 바꾸어 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키우고, 거대해지면, 그것을 독점하는 몇몇이 생기고, 차별과 차이가 심화되고 박탈감과 사회적 우울이 커져가는 것이 도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시대가 지날 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시된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꺼지지 않을 것만 같던 신자유주의의 등불도 이제 쇠락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보고, 그 흐름을 알고, 그 흐름에 발맞추어 현명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지금 2009년의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고, 제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 28. 11:51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유재덕 (브니엘,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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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은 성경 안에 있는 시대 -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의 연결점을 찾는 일이 주가 되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줄곧 이해해왔다.
비단 나 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크리스쳔들은 성경이라는 text 와, 그 text 에 담긴 context 를 이해하고, 삶으로 내면화시켜서 손끝과 발끝에서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올바른 크리스쳔의 삶이라고 알고 있다. 그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면서,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교리, 공격적인 전도 활동, 거대화되고 기업화되는 교회조직 등으로 사회로부터 비난과 비판의 뭇매를 얻어맞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쳔들은 그들의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있다. 왜냐 하면, 그들 스스로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하나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성경 말씀에 있는 거룩한 도덕 지침들을 제시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 복을 받는다는 기복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성도들은 기독교 안에서 성경이라는 책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현재 교회라는 조직의 직제가 어떤 이유로 구성되었는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대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독교가 어떠한 길을 거쳐 왔는지 그 역사를 알아보아야 한다. 성경의 시대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를 연결하는 법은 알지만, 그 중간을 채우고 있는 시간들은 소홀하기 쉽다. 마치 중세가 흔히 암흑기로 불리우는 것 처럼, 초대 기독교 교리와 직제를 정립하고, 신앙의 대상과 방법, 원리를 세워가던 시기를 우리는 흔히 까맣게 잊고 지낸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틀' 로 만들어지는 것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를 보며, 마치 아이가 자신의 혈육을 찾아 나가면서 자신의 뿌리와 근원을 알아가듯, 나는 기독교가 생성되고 발달해 온 역사를 되짚으면서 나 자신의 정체성 또한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현대 기독교가 공격받고 있는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 또한 스스로 얻어낼 수 있었다.

기독교가 욕을 먹고, 비판을 받는 일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 유별난 일이 아니라, 기독교가 처음 생성되던 시기, 즉 1세기부터 줄곧 계속되던 일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은 1세기부터 있어왔고, 그 말을 듣기 싫어 귀를 막고 비판하고 욕하고 조롱하고 심지어 돌을 던져 죽여버리던 이들도 1세기부터 있어왔다.
예수믿는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는 일도 21세기에 들어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 1세기부터 그리스도인 위정자들은 탐욕과 권력에 눈이 멀어 세상에 수많은 악을 행해왔다. 초기에는 핍박받고 박해받던 그리스도인들 이었지만, 로마의 국교로 선포된 이래 기독교 사제들은 돈과 권력에 맛들어가고 교회는 세속화되었다.
교회와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부터 시작된 이 문제는 오랜 기독교 역사를 걸쳐 끊임없이 대두되었고, 유별난 것도 아니고,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기독교 인들은 조롱당했고,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는 비판받았으며, 비대하고 부패한 교회와 성직자들은 손가락질당했다. 2천년 역사 중에 그러지 않은 시기는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만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 참된 의미를 밝혀 나가며 사회와 인류에 공헌하기 위해 헌신했던 등불같은 사람들도 끊임없이 있었다. 썩어가는 환부를 도려내고, 과감히 개혁하며, 진정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찾기 위해 밤낮으로 연구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 또한 기독교 역사와 함께 해 온,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기독교 역사를 증거할 명백한 증인들이다. 2천년 역사 중에 그로써 기독교는 숱한 사람들을 살리고, 인생을 바꾸었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무수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현대에 들어 기독교의 반대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논리, 이성, 과학조차도 그 태동은 스토아 학파, 르네상스 시기 학자들의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면, 그 어떤 학문이라도 아주 깊이 연구하면 결국에는 그 근원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역사는 계속되고, 되풀이될 뿐이다. 무엇은 발전하는 듯 하나, 어떤 것은 있는 그대로이다. 기독교의 본질과, 그 가치에 대한 논쟁도 결국은 1세기나 21세기나 마찬가지이다. 분명한 것은 결국 짧은 삶을 살아가면서, 신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이다. 성경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삶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냈을 때, 기독교는 참 의미를 부여받고 교회는 진정한 제 모습을 찾는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기독교를 좀더 제대로 알고 싶다면 기독교 역사를 먼저 잘 알아보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렇다면 대체 자신이 믿는 것이 왜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권위를 부여받고, 진정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그 근거를 알아야 한다. 역사를 알면 대답할 수 있다.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는 그래서 더욱 의미있는 책이다.

ThEnd.


posted by cimple 2009. 1. 13. 23:35
세상을 탐하다 : 우리시대 책벌레 29인의...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장영희 (평단문화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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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데 무슨 책부터 읽는 것이 좋을까? 고민이라면, 일단 책을 칭찬하는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이 맞는 듯 하다.

책을 칭찬하는 책을 읽으면, 일단 책을 읽을 맛이 난다. 독서의 가치에 대해 칭찬을 하고, 책 읽는 사람에 대해 칭찬을 한다. 책을 읽는 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칭찬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니, 괜스레 내 머리를 누군가 쓰다듬어 주는 듯 하여 뿌듯해지고 내가 무언가 그럴 듯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 마련.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일단 '독서 입문서' 로는 독서 예찬, 독서 방법 등에 대한 책을 한두 권 정도 읽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어렸을 적 부터 나름 책을 좋아하고 어느 정도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게 되듯, 나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서는 책을 멀리하게 되어 버렸다. 군대에 있을 때 - 또한 그 때도 누구나 그러겠지만 - 잠시 책의 감칠맛에 빠져서 잠시 책을 폭식하듯 읽어 나가면서, 내가 읽은 책의 목록을 수첩에 적어 나가는 것이 지루한 군 생활을 이겨 나가는 하나의 재밋거리였다. 하지만 전역한 이후에 다시 책을 붙들자니 왜 그렇게 눈과 귀를 빼앗가는 볼거리, 놀거리들이 많은지.

나름 영상을 전공한다는 것은 핑계일까, 책 읽을 시간이 나도 영화 한 편을 보거나, 게임 한 판을 즐기는 데 시간을 사용해 버리고,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손에 든다는 것이 참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일단 책을 열고 나면, 그 속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언어들과 놀라운 지식들은 얼마나 매혹적이고 매력적인지. 일단 시간을 만들고, 책을 손에 쥐고, 그 첫 장을 펴들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시작을 하면 책은 여간해서는 실망시키거나 거짓말하는 법 없이 그 나름대로 각자 가지고 있던 가치로운 보물들을 내 앞에 펼쳐 보인다.

다시 한 번, 책과 독서에 대한 소중함과, 책 읽는 사람에 대한 아름다움을 되새기고저 고른 책이 우리 시대의 애서가 29인이 함께 펴낸 <책, 세상을 탐하다> 였다. 책을 사랑하고,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가치를 역설하는 이들의 짧지만 호소력 있는 메시지들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글은 이문재 시인의 '척추로 읽읍시다' 였다.

살고 있는 집 자체가 의자가 별로 없는 좌식 문화이다 보니, 어렸을 적 부터 책을 책상에 바로 앉아서 읽는 습관보다는 벌렁 드러누워, 그러다 팔이 아프면 옆으로 드러누워, 그러다 옆구리가 결리면 엎드려, 이렇게 뒹굴거리면서 책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이 되고 도서관에 다니면서도 삐딱하게 기대어, 아니면 허리를 푹 숙여, 그렇게 구부정하게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문재 시인의 '척추로 읽읍시다' 는 책을 읽는 새로운 방법과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가르쳐주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별 특별한 내용이 있지는 않다. 바르게 등을 세우고 책을 읽는 올바른 자세를 말하고 있기도 하고, 그만큼 정신을 집중하고 정독해서 책이 가지고 있는 깊은 가치를 정갈하게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 대목을 읽을 때 내 자세가 삐딱했었고, 때문에 자세를 고쳐 잡았던 것이 뇌리에 남아서일까.

책을 읽다 보면 책을 읽기보다는 글자를 읽고 있고, 책을 읽고 나서 정보를 얻기 보다는 또 한권의 책을 읽었다는 자기 만족을 얻기 급급한 스스로를 발견할 때가 있다. 이것은 눈으로 읽는 책이고, 한쪽 눈으로 읽고 한쪽 눈으로 내버리는 책이다.

하지만 척추로 읽는 책은 다르다. 단어와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고, 행과 행, 그리고 그 행간의 보이지 않는 여백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읽으며, 내가 이제껏 축적해 온 지식과 내 손에 들려 있는 한 권의 책이 서로 힘겨루기도 하고 이리저리 맞대어보며 들어올 것은 들어오고 내칠 것은 내친다. 책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비슷하다. 문학이 아니어도 줄거리는 있다.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 까지, 잘 만들어진 책은 하나의 소설과 같아서, 나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 들이고 웃고 울리다가 결국에는 감동을 준다. 결국 감동은 척추로 읽는 책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많은 양의 책을 읽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이 자그마한 산골 도서관에서 쌓여 있는 장서도 내가 다 읽을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아마 세상에는 이 도서관에 쌓여 있는 모든 책보다 더 많은 책이 하루만에 쏟아져 나올 것이다. 결국, '내가 읽은 책' 목록표에 빈 칸을 채워 나가는 산술형 독서보다는, 내 척추 한칸 한칸에 새겨놓을 의료적 독서가 나에게 정말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 정신과 마음을 회복시킬.

마지막으로, 같은 글에 소개된, 이면우 시인의 <빵집> 의 일부분을 옮겨본다.




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 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 하는 아이가 함께 있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Th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