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3D 렌더링 워크샵' 이라는 주제로 열린 겨울방학 특강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 입니다.
프로젝트라 이름을 붙이니 거창하지만, 개인적으로 작품을 하나 만들면서
모델링, 쉐이딩, 렌더링 연습도 하고, HDRI 이미지를 이용한 라이팅 연습도 하면서
Z-brush 등의 다른 3D 툴도 배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3D 렌더링 워크샵의 주제는 '신화의 주인공을 만들어보라!' 였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은 영화 300에 나오는 강한 스파르타 전사들을 모티브로 해서
강력한 군신(軍神) 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그림1. 영화 300의 한 장면
실제로 영화 300은 배경을 풀 3D 로 제작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기도 하다는...
...일단 차치하고, 어떤 과정으로 제작하였나, 한번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레퍼런스 수집
모든 것의 기초는 레퍼런스를 수집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저는 300의 주인공을 모델로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에 필요한 여러 가지 레퍼런스들을 수집합니다.
그림 2. 주인공 제라드 버틀러의 얼굴
예, 주인공 제라드 버틀러의 얼굴입니다. 이 외에도 모델링에 필요한 모든 물건들의 레퍼런스를 준비해 놓습니다. 헐벗고 있는 300 전사들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소품들이 다양하더군요.
그림 3. 방패, 투구, 창, 망토 등의 다양한 소품들 레퍼런스
그리고 300 전사들의 생명은 바로 우람한 근육! 이를 잘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근육질의 남성 신체 레퍼런스를 수집했습니다.
그림 4. 다양한 인체 레퍼런스
물론 실제로는 훨씬 많은 레퍼런스를 준비합니다. 작품은 그 레퍼런스 이상을 뛰어넘을 수 없다. 라는 말도 있거든요. 많은 자료수집을 통해, 더 나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창작의 기본입니다.
2. 얼굴 모델링
이제 본격적으로 모델링에 들어가도록 합니다. 모델링은 일단 얼굴 모델링부터 시작했습니다.
먼저 얼굴 모델링을 하기에 앞서, 얼굴을 구성하는 와이어의 흐름, 즉 토폴로지(topology) 를 구성합니다. 토폴로지는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모델링에서는 면의 배치, 즉 어떤 식으로 면을 분할하고, 배치할 것인가를 의미합니다.
그림 5. 얼굴 토폴로지 구성
폴리곤 모델링은 면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지는데, 오브젝트를 Smooth 했을 때 부드러운 결과가 얻어질 수 있도록 각 폴리곤의 크기를 되도록 균등하게, 와이어의 흐름을 잘 이어지게 모델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미리 손으로 와이어의 흐름을 그려보면, 직접 마야에서 모델링을 할 때 초보자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후로는 열심히 모델링 해 나가면 됩니다. 본래 정확한 모델링은 물체의 삼면도, 즉 정면, 측면, 평면에서의 도면을 마야에 import 시킨 후 작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러나 제라드 버틀러의 삼면도를 가지고 있을 리 만무하니, 삼면도에 가까운 레퍼런스를 준비하고, 상상력을 함께 동원해서 최대한 모델과 닮게 모델링하려 노력합니다.
그림 6. 1차 얼굴 모델링
어때요, 제라드 버틀러와 좀 닮았습니까?
(퍽)
;;; ...첫 술에 어떻게 배부르겠습니까... 계속해서 모델링을 수정해 나갑니다.
그림 7. 2차 얼굴 모델링
머리카락과 수염은 3D 모델링 툴인 Z-brush 를 이용했습니다. 붓으로 칠하듯 모델링을 할 수 있는 매우 획기적인 툴입니다.
이제 조금은 제라드 버틀러와 닮았다고 해 주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좌우지간 얼굴 모델링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신체 모델링으로 넘어갑니다.
3. 신체 모델링
신체 모델링, 바디 모델링은 사실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지만, 또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습니다. 얼굴 모델링을 능숙하게 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신체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신체 모델링은 위에서 보셨듯이 괜찮은 레퍼런스들이 있었던 것이 좀더 작업을 도왔던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처음 시도했던 것 치고는 뚝딱뚝딱 몸이 만들어져서 스스로도 신기했었습니다.
그림 8. 포즈 구상
이 단계에서 기본적인 포즈를 간략하게 스케치해봅니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 신체의 강조 및 생략할 부분을 정하게 되는데, 공부하는 마음으로 일단 전신을 다 모델링해 보았습니다.
그림 9. 인체 모델링 과정.
몸에는 기본적인 컬러만 입혀 보았습니다. 아직까지 많이 어색하지만, 이후로 계속 모델링을 수정합니다.
이런 식으로 모델링을 하게 됩니다. 이번 300 프로젝트 과정은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전체적으로 CG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맛보는 글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무엇하지만,
또 다른 말로 하기에도 무엇하기에 그냥 작품이라고 말해둡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한 얼굴.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한 타이포그라피. 십자가-죄-사랑을 주제로 만들었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작업한 정보디자인. 집을 떠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경험이 많아서,
살아왔던 기간은 색으로, 숟가락의 갯수는 함께 살았던 사람, 숟가락의 색깔은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의 친밀도를 표현합니다.
전체적으로 '밥솥, 밥숟갈' 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해서 '동거동락' 이라는 주제로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동고동락이 맞지요?)
이런 식의 패러디 물은 취미로도 무수히 만들었었는데... 남은 것은 이것뿐이네요.
전역하고 나서 의욕에 불타, '패러디' 에 대한 주제의 레포트 표지를 패러디로 만들어 보는 짓을 해 봤습니다. 아래에 적힌 글을 보니 참 민망하네요. ㅡ_-a;;
지금은 온게임넷 해설자로 맹활약중인 프로게이머 김정민 선수... (저에겐 언제나 선수라는 ㅡ_ㅡb)
한때 열심히 팬질(;;) 을 했더랬습니다.
수능시험 끝나고, 친구와 함께 강원도에서 삼성동 아셈 메가웹까지 달려가서 목쉬어라 응원했던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김정민 선수를 위해 만들었던 치어풀을 모아봤습니다.
몇 개는 방송을 탄 것도 있고... 간만에 보니 재미있네요. 후훗.
제가 만든 치어풀중에서는 가장 유명한 치어풀이 아닐까 하네요. 방송에서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던...
(그랬어?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뭐 나름 인기있었다구요.) 질레트배 스타리그 16강 변은종 선수와의 경기에 치어풀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오랜만에 스타리그에 올라온 김정민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서,
많은 이들이 '김정민의 부활이다' 라고 말했을 때, 저는 웬지 그 말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치어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정민 선수는 아쉽게 패배...
이때부터 제 치어풀이 걸리면 김정민 선수가 패배하는 징크스가 생겼... ㅡ_-a;;
경기에 사용될 목적이 아닌, 순전이 응원하는 팬심(ㅡ_-a;; 허헉)으로 만들었던 치어풀입니다.
치어풀에 씌여진 문구 '야, 임마...' 는 약간의 사연이 담겨 있는데,
김정민 선수 팬카페 'TheMarine' 에는 회원들이 자기자신을 소개하는 자기소개 게시판이 있습니다.
여기에 김정민 선수도 자기소개 글을 올렸는데,
30문 30답 형식으로 되어 있는 자기소개 맨 끝의 문항이 'To. 정민' 이었거든요.
결국 김정민 선수는 'To. 정민' 에서,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저게, 그 문항에 대한 김정민 선수의 답이고요.
김정민 선수 자기 자신에 대한 격려와 채근을 일깨우고, 더 열심히 하길 바랬다는...
(저게 언젠데 그때 팬심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
치어풀이 한창 인기를 끌자 온게임넷 사이트에서 '베스트 치어풀' 이라는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주장원을 하면 MMgear 3D 헤드폰을 주고, 월장원을 하면 최신형 핸드폰을 주는 행사였죠.
첫 주에 이 치어풀로 주장원을 차지했습니다. ㅇ_ㅇ/~
MMgear 3D 헤드폰은 손에 넣었는데, 그 이후로 월장원 이벤트는 온겜측에서 진행을 안하더군요...
호응이 별로여서 그랬나...
보기보다 만들기 어렵지 않은 치어풀이었습니다;;
그래도 '콜럼버스의 달걀' 아닐까요? 후훗...
어느 대회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듀얼 토너먼트 1라운드 A조에 김정민 선수와 임요환 선수가 함께 있었습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같은조가 김정민-임요환-문준희-박성준(삼성준 선수) 였었죠.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이라, 먼저 김정민-문준희 선수 , 임요환-박성준 선수 경기가 있었는데,
임요환-김정민 선수 경기가 성사되었을 경우 이 치어풀이 걸리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김정민 선수는 2패 탈락, 임요환 선수는 2승으로 듀토 2라운드에 진출했습니다.
사실 지금은 많이 희미해졌지만,
임요환 선수의 최대 라이벌은 김정민 선수였지요. 테란이라는 종족, 전략과 정석이라는 대비, 준수한 외모로 인한 인기, 황제와 귀족이라는 닉네임...
하지만 임요환 선수는 두 번의 우승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많은 인기를 얻었지만,
김정민 선수는 중요한 길목에서 고배를 마시고 비운의 테란, 눈물의 테란이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저는 그 비운과 눈물의 주인공에게 왜 그렇게 끌렸던 것일까요.
한 사람은 지금 최고 기량의 해설자로 변신하여 제 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30대 프로게이머라는 약속을 지키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멋진 청년들입니다.
우주배 MBC 게임 스타리그 박정석 선수와의 경기에서 사용되었던 치어풀입니다.
군대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제작한 치어풀이고, 이후에 김정민 선수가 은퇴하면서
정말로 '마지막' 치어풀이 되어 버렸죠...
어찌 보면 좀 철없는 짓이기도 했던 치어풀 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뭐, 그 때도 제 인생이니, 소중하게 추억하려고 해요.
누구에게나 즐거워서 몰두했던 일들은 행복이라 말할수 있을 테니까요.
군생활의 끄트머리 무렵, 한 번쯤은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써 보고 싶어 적어내린 소설입니다다.
스스로도 다시 읽을 엄두는 잘 나지 않습니다. 민망하고 무안해서...
그래도 쓸 당시에는 마음 속에 담긴 사랑을 생각하는 언어들을 잘 표현하려 애썼고,
그 때에는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가진 언어였을 테니, 추억하는 의미에서라도 보관의 가치가 있겠지요?
손
1
7월의 햇살은 솔잎 사이로 바스라지며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 빛살의 가루들은 산들거리는 바람과 함께 춤추며 나의 눈 언저리로 떨어져 들어왔다. 어제 빗방울이 조금 흩뿌려진 후 날씨가 맑게 개어서인지, 솔잎들은 저마다 물기를 머금고 생글거리며 이리저리 몸을 흔들어댄다. 그 눈부신 산뜻함에, 나는 정겹게 한쪽 눈을 찡긋 해 보였다.
7월.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달이라니. 조용히 발음해 보면 입 속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머쉬멜로우를 장난스레 굴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7월은 빛나는 햇살도, 그 아래 드리워진 솔빛 녹음도, 그 사이에 흐르는 공기의 향기마저도 달콤하다. 이렇게도 한껏 오늘 맞이한 7월의 첫날에 대한 감사의 제목들을 정신없이 나열하고 있으려니까 누군가가 나를 큰 목소리로 불러댔다.
"이현 병장님! 이현 병장님!"
처음에는 아득한 메아리처럼 들리던 그 소리가, 나의 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걸걸한 그 군인 목소리마저, 오늘은 싫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그렇지만 나를 부르는 것이 영민이 목소리라는 것,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서 나를 찾는게 분명하다는 것이므로 간만에 즐기던 사색도 여기까지였다. 역시 이런 여유로움, 군인이라는 내 분수에 어긋나는 호사였나. 하지만, 뭐 어떤가? 이 7월은, 내가 그 군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달이니까.
"이현 병장님! 또 여기에서 농땡이 피우고 계십니까?"
역시 영민이는 금방 나를 찾아내 버렸다. 영민이는 이 더운 날씨에, 내가 당신을 땀 뻘뻘 흘리며 공짜로 등산하면서 찾아다녀야 하겠소, 하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고, 나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긋이 입가에 떠올리며 그의 푸념어린 눈초리에 응수했다. 하긴, 나의 단순한 행적은 '영민한' 영민이에게 금방 추적당하고 만다. 나와 함께 군생활 한 지도 벌써 13개월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13년과 맞먹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된다. 그게 군인이다.
"농땡이는. 잠깐 쉬는거지."
그러면서 어깨에 걸쳐 놓은 삽을 몇 번 흔들어 보였다. 뭐, 행정 보급관님도 나에게 무슨 대단한 작업 역량을 기대하면서 나 한사람에게 이곳 교통호 작업을 지시하신 것은 아니다. 전역 마지막 달 말년 병장이, 여기 저기에서 빈둥거리면서 출몰한다는 것은 오히려 휘하 장병들의 사기 앙양에 도움이 못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셨기에, 나를 이 곳에 휙 하고 던져 놓았으리라.
"여기서 그만 얼 때리시고, 지금 보급관님께서 찾으십니다."
"무슨 일인데?"
"신병 왔습니다."
"신병?"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역 한 달 남은 말년 병장에게, 전입 신병 소식은 전혀 뉴스거리가 되지 못했다. 단지 나는 신병이 전입해 들어왔다는 사실이 왜 나에게 뉴스거리가 되어야만 하는가, 그 이유가 진짜 뉴스거리였다.
"다른 병사들은 다 작업 나갔고, 이 병장님밖에 사람 없습니다. 행정보급관님이 직접 시키신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신병 더블백 풀어주라는 거?"
그러자 영민이가 어깨를 으쓱 했다.
"짬밥 안 되면 해야지 말입니다. 보급관님보다."
"나 이제 대우좀 해 줘. 행정보급관님보다 전역 빨리 한다구."
"그렇게 전해드립니까?"
"됐다, 됐어."
결국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탁에 샤워까지 꼭 시켜야 한다는 영민이의 마지막 당부를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터덜 터덜 생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금새 등줄기에는 땀이 배어나왔다. 국방색 속옷에는 점점이 퍼져나가듯 땀방울들이 배어날 터였다. 그렇게 속옷으로 스며드는 땀방울처럼, 어느새 나의 생각도 그 뜨거웠던 2년전 여름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도 세상은 무더움을 피하려 열중하고, 편하고 안락하기 원하던 것들이, 그 훈련소의 여름에는 모두 허깨비처럼 느껴져 버렸던 것인지. 땀과 흙먼지가 곤죽이 되어서도 대책없이 뒹굴었고, 저항할 틈도 없이 먹을 것이 주어지면 즉시 행복했다. 쉬게 해 주면 철없이 감사했다. 숱한 즐길거리, 놀거리, 볼거리, 먹거리, 재밋거리. 이 모든 '꺼리' 들을 제한당한 그 해 여름은 그 치열한 만큼이나 민감하고 순수했다. 악질같은 조교에게까지 고마움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고, 생면부지였던 동기들은 계산없이 끈끈한 정을 나누었다. 그래, 그 시기에 정말로 감사했다. 그 때는, 그렇게 해 주는 것에 너무도 감사해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그러던 순간, 무엇인가가 가슴에 퍼뜩 떠오르려 하기에 나는 서둘러 한숨을 쉬었다. 폐는 공랭식(空冷式) 기관이었던지, 가슴에 서늘해졌다. 마음이 추스려졌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2
"예! 이병! 김! 광! 은!"
내무실에서는 신병의 관등성명이 우렁차게 울렸다. 일과 시간이 끝나자 여기 저기서 기웃 기웃하며 신병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모여든 녀석들은 이런 저런 질문들을 중구난방으로 던져댔고, 신병은 그 질문 하나 하나에 '잘 못들었습니다' 나 '예 그렇습니다' 따위를 번갈아가며 답하고 있었다.
"이 병장님, 그래도 꽤 똘똘해 보이긴 합니다?"
"그래도 며칠 두고 봐야지."
몇 명의 상병들이 신병을 힐끔거리고는 내 귓가에 와서 소곤거렸다. 신병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 생활관으로 들어가보니 납작한 빵모자를 푹 눌러쓰고 침상 끝에 굳은 허리로 앉아 있는 깡마른 이등병. 그게 신병의 첫 모습이었다. 의류대를 풀어서 빨래를 해 주고, 같이 샤워를 하며 몇 마디를 주고받아 보았는데 생각하는 것도 있고, 군기가 제법 들어 있었다. 전역 한 달쯤 남겨두니, 사람의 첫인상과 처음 몇 마디로 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이 거의 독심술 수준이 되었다. 하긴, 군대에서 뭘 배웠느냐고 물으면 '사람을 배웠다' 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게 가장 크면서도 유일한 소득이었다.
한편, 생활관에서는 한창 신병의 호구조사가 실시중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들의 쓸데없는 심문을 지켜보았다. 군인들이 묻는 것이야 뻔하게도, 누나가 있는지, 여동생이 있는지 따위가 주된 관심사였다. 안타깝게도 신병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남동생이 한 명 있다는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그러던 와중에, 신병이 여자친구가 있다는 대답에 생활관이 술렁였다.
"우오~ 사진 있나?"
"예! 있습니다!"
"우와, 함 보자! 빨리 꺼내봐라!"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후임 녀석이 보채자, 신병이 윗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수첩을 꺼냈다. 까만색 가죽에 금색 육군훈련소 마크가 찍혀 있는, 나도 가지고 있었던 그 수첩이었다. 가장 바깥쪽의 겉장을 열더니 고이 넣어 두었던 사진을 빼내어 준다. 모두의 관심이 일제히 그 사진으로 쏟아지는 찰나, 나는 조용히 오른팔과 오른손을 뻗었다. 그리고 씩 웃어주었다.
"아, 이병장님!"
이제 막 사진을 받아든 후임이 툴툴거리면서 내게 사진을 넘겼다. 다시금 후임들은 내 옆과 뒤로 웅성거리면서 몰려들었고, 나는 여유롭게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서는 곱게 생긴 아가씨가 밝게 미소짓고 있었다. 이 녀석, 비실비실하게 생겼으면서 재주도 좋군. 아니나 다를까, 사방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우와, 이쁘다!"
"야, 참하게 생겼다!"
나도 빙긋 웃으며 신병에게 물어보았다.
"사귄지는 얼마나 됐냐?"
"예! 2년 됐습니다!"
2년이라. 요즘 애들 답잖게 오래도 사귀었다. 이제껏 만나왔던 시간 만큼 떨어져 지내야 하겠구나. 과연 그 무게감을 너는 실감하고 있는지. 그 아가씨는 실감하고 있을까. 시간이라는 매질 속에 빽빽하게 들어찬 그 숱한 질문들을 헤아려보기나 했을까. 하나만 물어보면 되겠지. 나는, 다시 한 번 신병에게 질문했다.
"사랑하냐?"
그러자, 신병은 잠시 머뭇거리더니만 갑자기 허공으로 고개를 꺾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사랑합니다!"
어쭈? 이 녀석 봐라. 전입 첫 날, 선임병들이 득시글거리는 생활관에서 신병의 대답은 마치, 뭐랄까. 일본인 가득한 거리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애국지사의 신념, 그런 것이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든 옆구리를 쿡 찌른다고 하여도, 가슴 속에 단단히 심어두어 그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는, 배신할 수 없는 소중함. 그 책임감.
순간, 갑자기 가슴 언저리 한쪽이 움찔 했다. 책임감이라는 단어 하나에,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민감하게 침을 흘렸다. 그 신념이라는 것에, 누군가에 대한 책임에, 갑자기 내 마음까지 들썩거려 버리자 나는 황급히, 그리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깊은 한숨이 콧속을 지나 단내를 풍기며 흩뿌려졌다. 마음이 추스려졌다.
이래 저래 마음에 들면서도 영 탐탁치 않은 녀석이었다. 웅성거리는 다른 후임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으로 사진을 집어 신병에게 건넸다. 신병은 그걸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그래, 너 잘났다. 잘 넣어두고, 다른 애들 함부로 보여주지 마라."
예 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하고, 신병은 그 사진을 다시 수첩에 넣고,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여자친구를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가 되찾은 듯 안도하는 기색이 그의 눈 주위에 어른거렸다. 이 자식, 어지간하구만.
"덥다, 더워!"
그 때, 영민이가 생활관으로 벌컥 들어섰다.
"아, 죽겠습니다. 오늘 정신 하나도 없네."
"왜? 뭐 때문에 이렇게 바빠?"
또 어딜 그렇게 뛰어 다녔는지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상병 6개월차인 녀석이 아직도 이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다니. 영민이가 내 옆에 걸터 앉자, 싫지 않은 땀냄새가 훅 하고 끼쳐왔다.
"신병 하나 또 있습니다."
"뭐? 신병? 인사과에서 오늘 신병은 얘 한명이라고 했잖아?"
누군가가 묻자, 영민이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 신병 말고, 소대장님. 새로 왔습니다. 지금 곧 생활관으로 옵니다."
새로운 것은 늘 갑자기, 한꺼번에 찾아온다. 항상 그래왔다. 내 이등병 시절부터 소대장을 맡았던 중사는 '현아, 나 먼저 간다' 는 말과 함께 두 달 전에 전역했고, 그 때 나는 분대장을 달았다. 여군 소대장님이 새로 오신다는 소문은 꽤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신병이 전입한 오늘일 줄이야.
아니나 다를까, 영민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생활관 물이 끼익 하고 열렸다. 먼저 들어선 것은 중대장님이었다. 중대장님을 보자마자, 내무실 최고 선임자였던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어."
중대장님은 내 경례를 받은 후, 뒤쪽에 따라 들어온 선임 소대장을 불러들였다. 신병으로 인해 떠들썩하던 생활관은 또 하나의 신병으로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또각 하고 군화발 소리가 들리고, 수십 개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이미 알고 있었던 대로, 소대장은 여군이었다. 군대에서의 소문이란 사회에서 천리를 간다는 말보다도 좀 더 빠른 것이어서, 벌써 소대장의 대략적인 신원은 신속하게 퍼져 있었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 스물 셋, 여기가 두 번째 근무지, 이전에는 우리 사단의 예하 연대에서 복무했다는 것, 그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다른 녀석들은 다들 나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군인이라는 것의 천성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던지, 직속 상관으로 여군이 온다는 것에 대한 소대원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군인이고, 소대장이었기에 우리는 또 무관심하려 열심들이었다. 그 무관심과 관심 사이에 놓인 긴장의 끈은 팽팽했다. 그리고 그 외줄 위에 올라서 있는 소대장의 모습은, 정작 본인은 모를 터이지만 위태로워 보였다.
"안녕, 오늘부터 너희들의 소대장을 맡게 된 이혜진 하사라고 한다."
또박 또박 여유롭게 자기 소개를 하는 목소리에서, 많은 연습을 읽어낼 수 있었다. 사실, 솔직한 심정은 조금 귀찮았다. 전역이 한 달 남았잖은가. 말년 병장의 주적은 귀찮음이다. 귀찮은 일은 적과 같아서, 없는 것이 최선이었다. 새로운 소대장에 적응하고 맞추어 나가는 일은 확실히 귀찮은 일임에 분명했다. 우리를 바라보는 소대장의 눈빛은 초롱초롱했고, 소대장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빛 또한 번들거렸다. 서로의 심중을 가늠은 할 수 있는데 확답은 할 수 없으니 막막할 따름이다. 인사 끄트머리에, 소대장은 물어왔다.
"누가 분대장이니?"
"다른 분대장은 근무 중이고, 저 뿐입니다."
내가 대답하자, 소대장이 손을 내밀어 왔다. 나는 무심히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선이 고운, 가느다란 손이었다. 그게 실수였다.
"그래, 잘 부탁한다. 현이? 이 현 병장! 열심히 해보자."
순간, 가슴이 소리도 없이 내려앉았다.
가슴 속에 그런 것이 있을 리도 없는데, 거대한 무저갱이 입을 벌리고 내 속에 들어있는 것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내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더 깊은 어딘가로 한없이 쏟아져 내려가 버려서 나는 그 끝을 가늠조차 하지 못했다.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벽이었는데, 그저 벽돌을 한장 한장 올려놓았을 뿐이었나보다. 가볍게 밀자 마자, 벽은 괴성을 지르며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 손으로. 하얗고 선이 고운 손으로, 2년의 시간동안 묶어 놓은 시간의 매듭이 속절없이 풀어져버렸다. 마음은 한숨을 쉬어도 추스려지지 않았다. 호흡은 들뜨고, 의식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3
"그래서 조기 취침중입니다."
"말년 병장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무슨..."
머리 맡에서 당작 사관과 부분대장 영민이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어느새 저녁 점호 시간인 모양이었다. 나는 배를 웅크렸다.
"이현? 좀 어떻냐? 이현?"
당직 사관이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답할 기운도, 기분도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아파버렸다. 마음이 몸 속에 있는 것일까, 몸이 마음 속에 있는 것일까. 마음이 옥죄어서, 속에 있는 소화기관을 죄어 들어왔고, 웅크려진 몸 속에 든 내 마음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의무대에서 준 알약 몇 알만을 삼킨 채 나는 드러누웠다. 모포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쓴 채, 나는 번데기처럼 나만의 고치 속으로 들어갔다.
"잠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이따가 불침번에게 상태 지속적으로 파악하라고 할 테니, 특이사항 있으면 보고해라."
사관이 사라지고 나서, 난 좀더 편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왜 이러지. 미친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거야. 결국 소대장이 내민 그 손을 잡지 못하고 침상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아팠다. 대체 왜 그랬지. 정신 차리고, 진정하고, 숨을 쉬자. 숨을 쉬어. 들이마시고,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손, 손이었다.
소용없었다. 가늘고 하얀, 그 손은 터져버린 둑과 같았다. 뭉클 뭉클 수많은 영상들이 홍수처럼 떠밀려들었다. 이제껏 누르고 밀어낸 만큼 그것들은 쉴새없었다. 왜, 왜 손이었을까. 이제껏 숱한 것들이 찌르듯 다가와도 한숨 한 번 쉬면 그만이었는데.
3년이라는 시간은 삶에 무던히도 많은 것들을 묻혀 놓는다. 그 사람과의 기억 또한 그렇게 세상의 여기 저기에 얼룩처럼 묻어 있다가 옷깃만 스쳐도 나를 흔들어댔다. 어찌나 그렇게 사소한 것들 틈바구니에도, 속속들이 그 사람은 끼워져 있고, 들어 있는지. 그만 나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크게 심호흡을 할 때, 내 폐 속의 폐포에서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내 감정과 의지와 상관도 없이 교체되며, 그럴 때마다 나는 현실을 회복했다. 호흡은 그 사람 없이도 버젓이 살아가는 생의 증거였고, 내가 주제넘은 감성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경각시켰다.
- 진짜 잘생겼다.
하얀 손이 나의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기분 좋게 눈살을 찌푸렸다.
- 놀리지 마.
- 정말이야. 나한테 이렇게 잘생긴 남자친구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가슴이 또 옥죄어왔다. 매트리스 위에 누워, 나는 괜한 옷깃을 주먹으로 그러쥐었다. 왜 손이었을까. 왜 하필 손이 그렇게도 닮은 것이었을까.
"좀 어떠니?"
소대장의 목소리였다.
"아까 약먹고 계속 누워 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되니까... 종종 이러니?"
"잘 모르겠습니다. 뭐,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 드러누운 적은 처음입니다."
"체한 거야?"
"예, 의무대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 의식이 내 의지와는 상관도 없이, 소대장의 목소리를 물고 늘어졌다. 멍텅하던 생각의 줄기들이 그 목소리 하나 하나에 곤두섰고, 마치 낚싯바늘을 잡아당기듯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잡아채서 나에게 끌어당겼다. 정신이 온전해지면서, 두리뭉실하던 몸 속의 고통들도 다시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통증은 심박과도 관련이 있는 듯 했다. 박자를 맞추며 다가오는 통증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참, 만난 첫날부터. 걱정이다."
나는 소대장이 그 손으로 내 머리를 짚거나 하지는 않을까 안절부절했다. 몸 속은 뜨거운데, 등줄기에는 소름이 돋았다. 진부하게도 내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아, 너도 오늘 전입왔다고 했지?"
"예! 이병, 김! 광! 은!"
"그래. 적응 잘 하고, 힘든 것 있으면 소대장에게 이야기하고."
"감사합니다!"
천만 다행으로, 소대장의 관심은 새로 전입한 신병에게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소대장은 신병과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영민이의 경례를 받고 생활관을 나갔다. 또각거리는 그 군화소리가 아득해졌다. 그 아득함이 나를 다시 휘몰아쳤다. 의식은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것도, 가장 잊고 싶은 기억부터.
내 이를 악문 시선과, 눈물이 그렁거리는 그 눈빛이 팽팽히 맞선다.
-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빛이 더 커졌다. 그러더니 이윽고 불이 번쩍 하며, 이를 악문 시선은 초점을 잃고 흩뿌려졌다.
- 대체, 너한테 난...
내가 모포 속에서 쥐어뜯고 있는 주황색 활동복은 우스운 빛깔이었다. 옷깃을 그러쥔 주먹을 서서히 풀었다. 다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듯 했다. 땅이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깊이를 알 수 없이 추락하는 내 마음처럼.
점호는 끝났다. 생활관 불이 꺼졌고, 후임들은 생활관 바닥에 모기향을 피웠다. 불침번이 인원 파악을 위해 들어왔다가, 내 머리맡에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대로 나갔다. 생활관 여기 저기에서 소근거리는 목소리들도 이내 고요해졌다. 적막함은 오히려 나를 일깨웠다. 잠을 자려고 노력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드는 것 만큼 노력한다고 되지 않는 일이 또 있을까. 머릿속은 마치 내 일부분이 아닌 것처럼, 제멋대로 생각의 줄기들을 뻗쳐갔다. 불침번이 들어오더니, 누군가를 근무 시간이라고 깨웠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탄띠를 차고 전투화 끈을 묶는 동안 나는 잠들려 애썼다.
명치 안쪽을 쥐어짜던 통증은 다행히도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순간 순간, 기억의 수면 아래에서 영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은 여전히 추락하는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아득하게 곤두박질쳤다. 몇 시간이 넘도록 하염없이 질주하는 청룡열차에 올라탄 것과 진배없었다. 아까 근무를 나갔던 근무자가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그가 다시 전투화 끈을 풀고 탄띠를 풀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잠들려 애썼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다시 생활관 안이 고요해지자, 나는 조용히 모포를 얼굴까지 내렸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서 닿았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내쉬었다. 마음은 추스려지지 않았다.
4
화장실에 앉아 있자 검고 묽은 변이 나왔다. 먹은 것도 없는데 악취가 코를 찔렀다. 많이 속상해서, 정말로 속이 상해버렸고, 그 속상해서 응축된 찌꺼기들이 몸에서 배출되어 나왔다. 갑자기 이유도 없이 창피해진다. 서둘러 물을 내려버렸다.
"후우......"
세면대에서 손을 씻다가, 얼굴에까지 물을 끼얹었다. 거울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 달이라고, 한 달. 아우성치던 마음은 이제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손목에 채워진 검정색 돌핀 방수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월 2일. 칠월이었다. 31일까지만 다다르면 군인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는 달이다. 9박 10일의 말년 휴가와 주말 휴일, 제헌절 따위를 빼면 7월의 남은 검은 날들은 손에 잡힐 듯 분명했다. 그런데 첫 날부터 호되게 보냈다. 역시 군대라는 녀석은 녹록치 않았다. 쉽사리, 고이 놓아 줄 요량은 아닌가보다. 간밤에 끝도 없이 뒤채이던 속병은 새벽녘에 얼핏 잠이 들자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하지만 아침밥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흰 밥에 미역국, 열무김치와 멸치 볶은 것, 계란찜을 식판에 받아만 놓고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숟가락 끝에 달린 포크로 쌀알만 두어 번 뒤적거리다가 그대로 짬통에 부어버렸다. 밥을 받아간 그대로 버리러 내어가는 내 식판을 보고, 취사병의 표정이 심드렁해졌다. 어차피 맛있게 먹으라고 만든 밥도 아닐 테고, 그도 똑같이 하기 싫은 군생활 하며 하기 싫은 밥 내어 놓은 것 먹기 싫다 하는 것인데도 실례가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정작 밥을 버릴 때에도, 그 취사병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도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 그 일을 떠올리는 지금 갑자기 꼬리를 물고 생각났다. 그녀였다. 내 삶의 도처에 도사리면서 수시로 나를 찔러대던 그 기억의 편린들이 이제 대놓고 머리를 쳐들고 있었다. 이젠 저항하는 것도 힘겨웠고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왜? 왜 그토록 그 기억들을 떨쳐내려고 하는데? 그깟 일들, 좀 되새김질 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잖아? 언제나 혼자 난리였다. 혼자 성내고, 혼자 고민하고, 결국 혼자 결정으로 끝냈다. 혼자 설레발 치는 것 좀 관둬야 한다.
- 야, 이현. 밥 남기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너, 이거 프랑스에서는 요리사에 대한 대단한 모욕이야.
- 여기가 프랑스냐? 대한민국이지.
- 됐어. 다 안 먹을 거면 다시는 밥 안 차려줘.
- 아니야, 아니야. 먹을게.
- 내놔, 치우게. 맨날 맛없다 그러고. 남기고.
- 윤하연이 만든 밥인데, 어떻게 맛 없을수가 있어?
윤하연. 세 음절의 그 단어가 마음속으로 불리워지자 마법처럼 그 사람이 되살아났다. 이름이란, 진짜 주문과도 같았다.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그 이름을 불러봤자 그건 '통나무', '핸드폰' 이라는 낱말보다도 무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을 부를 때, '윤하연' 이라고 하자마자,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의 알갱이들이 돌멩이를 던진 흙탕물처럼 뿌옇게 떠올랐다. 죽어있던 사람이 살아나고,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후우..."
다시 한 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비어져나왔다.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파란색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거울을 보니, 우울한 표정의 낯선 남자가 서 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다시 쳐다보지 못하고, 생활관으로 뒤돌아섰다. 손목의 돌핀 시계를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여덟 시 십팔 분이었다. 일과 집합 오십 분 까지는 삼십 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잠깐 더 누워서 눈을 좀 붙여야겠다. 몸은 정직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눈은 피로를 호소했다. 걸어오는 길에 나를 보고 경례를 붙여 오는 몇몇 후임들을 무표정하게 지나쳤다. 세면백을 관물대에 던져놓고, 모포 위에 올려둔 베개를 꺼내어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이현 병장님, 괜찮으십니까?"
눈이 부셔서, 왼팔로 눈을 덮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처음으로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대학교 1학년 때, 호프집 아르바이트였다. 가게는 '채플린' 이라는 이름의 아담한, 그리고 흔해빠진 대학가 술집이었다. 하는 일도 뻔했다. 손님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나르고, 그릇을 닦고, 손님이 나가면 뒷정리를 하고, 다시 다른 손님을 받았다. 두 달 남짓 일했을 때, 곧은 등을 가진 동갑내기 아가씨가 신참으로 들어왔다. 나와 같은 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좁은 가게에 알바가 셋이나 필요 없었지만, 주인은 서빙을 할 예쁘장한 여학생이 꼭 있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윤하연은 그런 주인 아저씨의 기대 이상이었다.
워낙 일도 성실하게 할 뿐더러, 그녀에게는 그녀가 있는 공간을 조금 들뜨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마치 그녀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컴퍼스로 빙 그려 놓은 일정 영역이 있어서,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생기가 돋고 활력을 불어넣는 아우라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하연이 딛는 발걸음이 복 있는 발걸음이었는지, 가게는 금새 북적였고 매상이 오르기 시작했다.
헌데, 유독 나와 하연과는 대화가 없었다. 주인 아저씨도, 가게에서 일한지 1년이 다 되어간다는 선배 형도 그녀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졌고, 단골 손님들과 깔깔거리면서 그 틈에 끼여앉아 공짜 술을 얻어먹을 때도 많았건만, 나하고는 한 달이 다 되도록 제대로 이야기 한번 나누지 못했다. 손님들 테이블에서 술잔과 그릇들을 나르다가 마주칠 때에도 서로 어색하게 목례만 나누었고, 주방에서 함께 그릇을 닦을 때에도 무덤덤한 달가닥거리는 소리에 둘 다 난처해했다. 일을 마치고 하연이가 가게 사람들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돌아갈 때, 나는 가게 한쪽 귀퉁이에서 애먼 바닥만 대걸레로 훔쳐냈다.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를 나와서 워낙 여자에 대해 숫기 없던 내 탓도 있겠지만, 유달리 나에게만 거리감을 두는 하연이의 태도는 더 알 수 없었다.
그 날도 주방에서 접시와 포크, 수저 등을 닦고 있었다. 주말 저녁이라 가게는 무척 분주했다. 싱크대에 물을 받아 놓고 식기를 가득 담가 놓은 다음, 수세미로 거품을 내며 문질렀다. 정신없이 닦고 있던 그 때, 하연이가 또 다른 식기를 한아름 안고 들어왔다. 그녀도 나를 보앗고, 나도 그녀를 돌아 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칠 때 그녀는 잠시 멈칫 했다. 나는 습관적으로 까딱 목례를 했고, 그녀도 해온 것처럼 고개를 숙여 답했다. 그녀는 내 싱크대에 그 설거지 거리를 내려 놓더니, 팔을 걷어붙이고서는 그릇을 헹구기 시작했다. 나는 수세미로 그릇을 닦아 넘기고, 그녀는 그것을 받아 물에 헹구었다.
한참을 그렇게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그릇을 헹구어 내는 그녀의 손이 보였다. 나에게서 거품 묻은 그릇을 받아 쥐어,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에 대고서는 손으로 문질러가며 헹구었다. 맨손으로 해야 그릇에 기름기가 남아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안쪽, 바깥쪽 돌려가면서 거품이 남아 있지 않도록 몇 번이고 문질렀다. 손가락으로 뽀드득 소리가 나는 것을 확인하고 옆의 건조대에 종류별로 쌓아 놓았다. 나는 그 일련의 동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얀색 접시와, 하얀 비누거품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손도 투명한 하얀색이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마디, 손등, 손목까지, 참 고운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릇들은 지저분함을 떨어내고 순결함을 부여하는 그녀의 다정한 손길을 거쳐 저마다 말끔하게 쌓여갔다. 성스러운 정화의 예식인 듯, 그렇게 고귀하게 느겨지는 순간이었다.
"손이 참 예쁘네요."
"예?"
그녀의 얼굴로 내 시선이 옮겨갔다. 뒤로 묶은 머리타래에서 몇 가닥이 그녀의 볼에 흩어져 있었다. 하연도 설거지를 하던 손을 멈추고서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합을 알리는 방송이 스피커에서 흘러 나온다. 눈을 누르고 있던 왼팔을 들어, 실눈을 뜨고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니 여덟시 오십분이다. 기운없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칠월의 두번 째 날이었다.
5
"서걱, 서걱, 서걱..."
사포로 쇠 긁는 소리가 수송부 건물 안을 가득 메웠다. 사포가 한번 왔다갔다 할 때마다 붉은 녹가루가 춤추며 떨어졌고, 흰 목장갑과 전투복에는 벌써 붉은 녹가루로 범벅이다. 지난 주 목요일에 시작된 위병소 바리케이트 작업은 주말을 제외하고 오늘로 닷새째이다. 부대 여기저기에서 쓸모 없는 쇠파이프, 철근 등을 모아다가 절단기로 자르고, 글라인더로 갈고, 용접기로 용접해서 여닫을 수 있는 바리케이트를 만든 것이 어제까지였다. 이제 마무리 도색 작업을 하고 위병소로 가져다 나르기만 하면 된다. 도색을 하기 전, 먼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녹을 사포로 긁어 내야 한다. 잘 긁어내지 않으면 나중에 유성 페인트를 칠했을 때 표면에 밀착되지 못한 페인트가 계란껍질처럼 바스라져 떨어져버린다. 그 때문에, 나를 포함한 세 명은 붉은 녹가루 먼지 피워올리며 큼지막한 바리케이트에 달라붙어서는 오전 내내 '빼빠질' 이었다.
"좀 쉬었다가 하자."
마스크 대신 얼굴에 둘러놓은 군용 손수건을 턱 밑으로 내리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둘도 분주하게 놀리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담배 한 대씩 피우고 해. 신병! 너 담배 피워?"
"이병, 김! 광! 은! 예, 피웁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신병이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지간히 열심으로 문질렀는지, 런닝 앞뒤가 땀으로 흥건했다.
"그래? 상필아, 얘 데리고 가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어. 난 PX 잠깐 다녀올게."
"우와, 이현 병장님. 쏘시는 겁니까?"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사줄게. 담배피울 때 수송부 건물 안이나 유류고 옆에서 피우지 말고, 꼭 오른쪽에 벤치 만들어 둔 데 거기서 피우고."
"예, 예."
잔소리 몇 마디를 덧붙인 뒤, 나는 느릿느릿 PX로 향했다. 위병소 옆에 자리잡은 PX는 수송부에서부터 걸어서 삼 분 거리에 있었다. 후임들 쉬는 시간을 판단해주고, 과자 부스러기라도 제 돈 들여 사 먹이는 것. 비록 작업을 설렁설렁 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작업장 최고 선임자의 암묵적 책임이었다. 후임들에게 돈을 쥐어주며 먹을 것을 사오라 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냥 혼자 휘적휘적 다녀오는 편을 택했다. 하늘엔 두꺼운 구름들이 햇빛을 듬성듬성 뿌리고 있었다. 내일 비가 온다던가, 하늘을 올려다 보던 중에, 구름 틈 사이로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이 두 눈을 파고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속담을 역행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렸다.
*****
손은 언어였다. 실제로 손으로 하는 언어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이들도 누구나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손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였다. 하연이와 처음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 나는 진작부터 입기로 마음 먹었던 하얀색 남방과 검은색 바지를 입고, 몇 시간동안 거울 앞에서 옷 매무새를 고쳤다. 아껴둔 옷이었지만, 탐탁치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 머릿속에서 나와 하연은 수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내 머릿속의 하연이가 내 농담에 풋 하고 미소짓자, 나도 헤벌쭉 미소지었다. 그런 나를 버스 옆자리에 앉은 아주머니가 힐끔거렸다.
내 눈 앞에 샛노란 개나리 꽃밭이 펼쳐졌다. 노란색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목에도 노란색 스카프를 두른 하연은 그대로 조그마한 개나리 꽃이었고, 정신없이 활짝 핀 개나리 꽃밭이었다. 영화관 앞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오갔지만, 나에게 존재하는 사람은 눈 앞의 한 명 뿐이었다. 꽃무늬가 들어간 하얀색 주름 치마를 사각거리며, 나에게 걸어오는 매끈한 다리로 내 시선이 황망히 떨어지는 순간 나는 불경스러운 짓이라도 한 양 움찔 했다. 많이 기다렸어? 밝게 웃는 그녀의 인사에, 아니, 나는 얼버무리며 짧게 답했다. 내 대답이 퉁명스럽게 느껴졌는지, 미안, 화났니? 그녀가 묻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변명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솔직할 수 밖에는.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서 그래. 그렇게 답하자, 어머 얘, 하며 하연이 나를 툭 건드린다.
영화관 안에 들어가, 그녀와 나란히 앉았다. 내가 왼편에 앉았고, 그녀가 오른편에 앉았다. 노란색 개나리 꽃이 내 옆에서 숨쉬었다. 달콤한 향기에 입술이 말랐다. 무의식적으로 팔걸이에 팔을 올려 놓으려는데, 순간 아차 했다. 그녀의 팔이 이미 올려져 있었다. 그녀의 손등 위에, 내 손이 아주 잠깐 닿았다 떨어졌다. 뜨거운 것이라도 만진 듯 황급히 팔을 떼며 아, 미안. 소근거리며 사과하자, 그녀가 말없이 웃었다. 다시 영화에 집중하려는데, 그녀의 손등의 감촉이 아련했다. 그 때, 극장 안의 어두움이 내 마음에 용기를 불어 넣었을까. 아니면 그 꽃 향기에 취한 것이었을까. 다시 하연의 손등 위에, 내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녀의 손이 의아했는지 멈칫 했다. 심장이 하릴없이 쿵쾅거렸다. 그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질 정도로 심박은 내 온몸을 들썩였다. 그녀의 손은 그냥 그대로, 잠시동안 나의 언어를 이해했다. 바로 그 대,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손을 움직이더니, 내 손을 살며시 맞잡았던 것이다. 여린 그 손이 나의 손을 부드럽지만 힘있게 감싸안자, 등줄기에 전율이 지나갔다. 그 손으로, 우리는 천 마디 말보다 많은 것을 나누었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쥐고,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극장 안에서 나누는 그 사랑의 밀어는 다분히 선정적이었다. 너무 멀어서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내 손에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그 어떤 은밀한 밀회보다 더 가슴 떨리고 비밀스러운 나눔이었다.
손은 그렇게 우리의 마음이 잇닿도록 연결해 준, 영혼의 다리였다. 그녀가 손으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다시 그 손으로 서로에게 먹여 주며 즐거워했다. 보드라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은 것은 내 손이었고, 미처 면도를 못한 날 내 턱수염을 쓰다듬은 것은 그녀의 손이었다. 나의 두 손으로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 아르바이트를 한 돈으로 그녀의 손에 커플링을 끼워 주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들여다보며 해맑게 미소지었다. 한 밤중, 학교 노천극장에서 그녀와 첫 키스를 할 때에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작별할 때 끝내 떨어지지 못하는 손끝에 안타까워했고,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면 마주잡은 서로의 손등에 입술을 대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의 손등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대며 정중한 기사도를 전했고, 그녀의 입술이 내 손등에 닿을 때 나는 비밀스러운 아찔함을 선사받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손은 분명한 언어였다.
*****
PX에 들어서자마자, 예기치 못한 상황에 걸음을 멈칫 했다. 오전 시간의 한산한 PX에는 손님이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소대장이었다. 소대장은 노란색 장바구니를 왼팔에 끼고 이런 저런 물건들을 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 물건 저 물건을 뒤적거리는 모습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흘러갔다. 나는 PX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왜 그렇게 갈등하는지도 모른 채, 우물쭈물거리고 있던 내 판단을 도운 것 또한 소대장이었다. 소대장은 나를 발견하더니 살짝 미소까지 띄우며 알은체를 했다.
"어, 이현!"
별 수 없이 나는 경례를 하고 PX 안으로 들어섰다. 소대장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안색부터 살폈다.
"어때, 몸은 좀 괜찮니?"
그 날 이후 만나기만 하면 이 질문이다.
"이제 진짜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말년 병장이 몸관리 잘 해야지. PX에는 왜 왔어?"
"작업하는데, 후임들 아이스크림이나 사 주려고 왔습니다."
"몇 개나 되는데? 소대장이 사 줄게."
난감했다. 몇 번이고 사양을 했지만, 결국에는 제법 근엄한 표정까지 지어보이는 소대장 앞에서 더 실랑이할 수가 없었다. 아이스크림 냉장고로 가 아무거나 세 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PX 계산대로 가는데 아무래도 소대장의 표정이 이상했다.
"어어? 어라..."
소대장은 군복 주머니 여기 저기를 뒤져보고 있었다. 상의에 두 개, 바지에 여섯 개. 여덟 개의 주머니를 이리 저리 더듬어 보아도 찾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소대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살짝 고개를 가로로 흔들고, 지갑 속의 카드를 꺼냈다.
"이거 다 얼마에요?"
"아이스크림까지요? 팔천 칠백 오십원입니다."
"카드로 할게요. 봉지도 하나 주세요."
내가 PX병에게 카드를 내밀자 그때까지도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소대장이 어쩔 줄 몰라했다. 지갑을 책상에 놓아두고 온 것 같다고, 올라가서 꼭 다시 준다고 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오늘은 현금을 안 가지고 와서 다음에 꼭 주겠다고 했다가, 계통없는 말들을 덧붙였다. 미안한 마음에 횡설수설하는 소대장에게 나는 비닐봉지에 물건을 넣으며 대답했다.
"다음에 사 주십시오. 그때 사양 않고 비싼 것 먹겠습니다."
"아유... 진짜..."
소대장도 더 이상은 말이 없었다. PX 문을 나서자 소대장도 뒤따라 나왔다.
"그거 이리 줘. 내가 들고 갈게."
"수송부까지만 들어 드리겠습니다. 저도 작업 가야 됩니다."
함께 걸었다. 소대장의 발걸음은 더뎠다. 별 수 없이 그 발걸음에 맞추어야 했다.
"무슨 작업 하는데?"
"위병소 바리케이트 다시 만드는데, 이제 거의 끝났습니다. 도색만 하면 됩니다."
"더운데 고생이다. 하긴 다른 애들도 다 고생 많겠지. 그래도 현이는 이제 곧 집에 가잖아?"
전역 이야기가 나왔다. 소대장의 다음 질문은 뻔했다. 전역하면 뭐 할거냐. 앞으로 계획은 뭐냐. 아니면 군생활 끝나는 기분이 어떤가. 그런 것들을 물어올 터였다. 하도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서, 이제는 몇 개의 질문에 대해 대답할 거기를 미리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전역하면 한 학기 쉬지 않고, 바로 다니던 학교에 복학할 것이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군생활 하려고 하는데 끝날 때가 되니 아쉽다, 밖에 나가면 군대에서 몸에 익힌 규칙적인 생활 잃지 않아야 겠다 등등. 미리 모법 답안들을 준비해 놓으면서 발걸음을 서너 번 옮기고 나자, 예상대로 소대장이 물어왔다.
"현아, 너는..."
"예."
그런데, 소대장의 질문은 전혀 뜻밖이었다.
"현아, 너는 군생활하면서 제일 슬펐던 때가 언제야?"
나는, 그자리에 우뚝 멈추어섰다. 그러자 소대장도 따라 멈추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은 준비하지 못한 답을 요구했고, 준비하지 못한 답은 진실을 요구했다.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나는 소대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체, 이 사람은 누구지?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칠월에, 그 첫 날부터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내 존재를 통째로 이렇게 흔들어 놓는 이유가 대체 뭔가? 소대장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소대장도 뭔가 이상하다 싶은 기색을 얼굴에 띄웠다.
가장 슬펐던 순간은, 하나뿐이었다. 그 때, 몸 속에 있는 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 깊은 어느 곳에서, 마치 우물에서 물이 스며나오듯 몸 안의 물은 서서히 차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눈 언저리까지 다다랐다. 가득 찬 물은 몸 안에서 찰랑거리며 넘쳐 흘렀다. 막는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6
두돈 반. 2.5톤 차량 뒤에 실려 있는 우리들은 병력이라기보다는 화물에 가까웠다. 군복 속에 입은 내복은 헐거웠고, 그 밖을 깔깔이와 야전상의, 스키파카로 덮어도 추위는 맹렬히 엄습했다. 무엇이든지 이중, 삼중 이상이었다. 손에는 장갑 위에 방한 장갑을 덧씌웠고, 얼굴에는 목토시, 귀도리, 안면 마스크로 친친 감아놓고 방한 두건을 덮어썼다. 최대한 몸을 웅크려 보았지만, 차가운 공기는 영리하게 빈틈만을 노리고 파고들어왔다. 코와 입 언저리에는 물방울이 맺혔고, 허벅지와 무릎은 대책없이 얼어붙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은 피할 길도, 막을 수도 없었다. 발은, 진짜 말로 표현할 만한 게 못 된다. 농담 아니고, 발가락을 잘라 내어 버리고 싶었다. 발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따뜻하게 할 방도가 없었다. 단단하고 좁은 전투화 속에서 애처롭게 발가락을 옴지락거려 보았지만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여름의 더위는 짜증날 뿐이지만, 겨울의 혹한은 공포감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 와중에서도, 최악은 K2 였다. 그 한기를 내뿜는 검은색 쇳덩어리를, 신주단지처럼 끌어 안고 있어야 한다는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내 몸의 일부분처럼 여겨야 할 터인데, 지독히도 내 몸과는 동화되지 못했다. 항상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끝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그 차디찬 바람의 터널을 지나온 끝에 혹한기 훈련장에 도착했다. 그 때 나는 아직 이등병이었다. 무엇을 핑계댈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다. 묵직한 방탄헬멧과 방독면, 그리고 빌어먹을 K2를 짊어진 채 그저 뛰엇다. 눈에 보이는 대로 옮겨다 나르고, 나다 싶은 일에 무조건 끼어들었다.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자, 고참들이 칭찬을 했다. 하지만 칭찬을 받으려던 게 아니라, 그렇게 뛰어다녀야 얼어붙으려는 발가락이 어느 정도 열이 올라 버틸 만 했다.
혹한기 훈련은 별 게 없다. 그 별 게 없는게 정말 힘들었다. 그저 추위를 버티는 것이 혹한기 훈련의 핵심이었고, 밤이면 그 사실은 분명해졌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입김은 허옇게 공중에서 얼어붙었고, 불출되어 나온 건빵을 씹으며 수통에 든 물을 마셨다. 그런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통 주둥이는 이미 두텁게 얼어 있었다. 수통 안쪽의 물은 찰랑거리는데 입구가 얼어버려서 물을 못 마시니 난감했다. 건빵은 더욱 뻑뻑하게 느껴졌다. 침낭 속에 들어가, 서걱거리는 핫팩을 세 개 터뜨렸다. 하나는 가슴에, 하나는 발 있는 곳에, 하나는 손에 쥐었다. 텐트 안과 밖의 온도 차이는 없었다. 그저 바람이 불지 않는 게 다였다. 고참들의 침낭들은 겉보기에도 두터웠지만, 내 침낭은 지퍼도 온전치 못했다. 영하 두 자리수로 내려가는 기온 속에서 잠들면, 과연 내일 아침에 무사히 일어날 수 있을까. 찬 공기가 안면 마스크를 두른 얼굴에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셋째 날 저녁 무렵, 하연이가 찾아왔다.
아무런 말도 없었고, 기별도 없었다. 내가 그랬다는 것이다. 내 부대 주소와, 전화번호는 아무도 몰랐다. 형에게도 그저 내가 속한 사단만 가르쳐 주었을 뿐이다. 나는 사단 예하, 연대 예하, 대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형이 가르쳐준 것일까. 하연이는 내가 속한 사단과, 내 이름 하나만 들고 나를 찾았다. 나중에야 헤아린 일이지만, 그녀는 사단 본부를 찾아가고, 다시 연대 본부를 찾아가고, 그리고 다시 대대까지 찾아가서, 훈련장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어이 이 곳까지 온 것이었다. 그건 '그럴 수 없는 일' 중의 하나다. 저녁 배식을 하던 도중에 중대장이 나를 불렀을 때, 그리고 나를 부른 이유를 설명할 때 나는 중대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하연은 이 곳 까지 나를 찾아왔다.
오 개월 만이었다.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떠난 지 오 개월이었다. 저 멀리, 하연은 훈련장 위병소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있을 수 없는 현실은 분명해졌다. 오 개월 이었는데도,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녀 또한 멀리서도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이를 악문 시선과, 그눈물이 그렁거리는 그 눈빛이 팽팽히 맞선다. 침묵의 시간은 아득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첫 마디가 그랬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 마지막 한 마디가 그거였다. 그녀의,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빛이 더 커졌다. 그러더니 이윽고 불이 번쩍 하며, 내 시선은 초점을 잃고 흩뿌려졌다.
"대체, 너한테 난..."
내 시선이 머무른 곳은 하얀 손이었다. 그 가느다랗고 고운 하얀 손에, 나의 시선은 그대로 고정되었다. 내 영혼을 통째로 흔들던 그 손이, 이제는 내 영혼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뺨이 얼얼했다. 하연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섰다. 감정 없는 겨울 바람 속에, 그녀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졌다. 홀연히 마법에 걸렸다 풀려난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냐 하고 다가오는 중대장과, 누구냐고 묻는 고참들의 말소리들이 그저 귀 언저리에 맴돌다가 사라졌다.
나는 텐트로 돌아왔다. 고참들이 타 놓은 밥이 있었다. 나는 차갑게 식은 밥과 국을 먹었다. 다 먹고 난 다음, 식기의 비닐을 벗겨서 버리고, 포크 달린 숟가락을 수통의 물로 씻어 비닐로 싸 탄입대 안에 넣었다. 날은 금새 어두워졌다. 저녁 이후에는 특별한 일과가 없었고, 텐트 정리를 하라는 중대장의 지시에 나와 내 맞선임이 텐트 안에 널브러져 있던 군장과 침낭, 의류대 등을 정리했다. 고참들은 텐트에서 뒹굴거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홉 시가 되자, 중대장이 텐트 밖으로 집합을 시켰다. 간단한 인원 파악만을 한 후, 일찍 재워 주겠다는 것. 오늘 밤만 지나면 내일 부대로 돌아간다는 말로 병사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서둘러 철수해야 하니 행동을 빨리 할 것, 주위를 말끔하게 전장 정리를 해야 한다는 말들을 했다. 다시 텐트로 들어와, 침낭을 펴고 누웠다. 남아 있던 핫팩 네 개를 모두 터뜨렸다. 하나는 가슴에, 하나는 발에, 하나는 등에 넣었고, 하나는 손에 쥐었다. 텐트 안의 등을 끄자 주위는 몹시 어두워졌다.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7
"여기 와서 앉아."
책상 위에는 커피 두 잔이 올려져 있었다. 검은 커피의 수면에 하얀색 프림의 소용돌이가 빙글거리며 맴돌았다. 그 소용돌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대장이 재차 재촉하자, 나는 가만히 소리가 나지 않게 의자를 꺼내어서, 그 위에 천천히 앉았다. 소대장이 커피를 가리키며 권했다.
"마시렴."
"커피 안 마십니다."
소대장은 낮게 한숨을 쉬면서 커피를 가져가더니 한 모금 마셨다.
"현아."
"예."
나는 소대장의 질문에 너무 빠르다 싶을 정도로 즉시 대답했다. 무성의한 태도를 눈치챘을까. 소대장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자, 책상 위에 있던 탁상시계의 초침소리가 갑자기 볼륨이 높아졌다. 탁상 시계는 중대장님의 것이었다. 조용한 중대장실에서, 나는 소대장과 책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았다.
"현이, 요즘 무슨 힘든 일 있니?"
순간,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실수다. 이건 소대장님께 대한 실례지. 하지만 이미 새어나온 웃음을 어쩔 수는 없었다.
"왜 웃니?"
"소대장님, 지금 저 면담하시는 겁니까?"
"아니... 면담이라기 보다는 그냥 요즘 네가 약간 이상해보여서. 무슨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그렇지."
면담이라니. 이등병으로 전입해 온 날 받아보고 처음이었다. 만난 지 열흘 남짓 된 사람으로부터 '요즘 이상해보인다' 라는 말을 듣는 것도 희한한 일이었고, 지금 소대장의 팔꿈치 아래에 놓여진 봉투 안에 들어 있을 나의 노란색 생활 지도 기록부도 나를 어이없게 했다.
"소대장님, 저 힘든 일 없습니다."
"현이, 네가 형하고 둘이서만 사는 줄 소대장이 오늘에서야 알았네. 많이 힘들었을 거 알아. 그래서..."
"소대장님."
나는 끼익 하고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다분히 그 쇳소리는 거칠었다.
"소대장님, 솔직히 말씀 드립니까? 이거 진짜 웃긴 일입니다. 저 아무 일도 없고, 아무 걱정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번달 말이면 전역합니다. 제 집 이야기가 지금 상황에서 왜 나옵니까? 괜히 저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이등병들이나 다른 고민 많은 애들부터 만나 보십시오."
"현아."
"신경 써주시는 것 감사한데, 저 그냥 좀 내버려 두시면 안됩니까? 가만히 계셔도 저 조용히 알아서 별 탈 없이 전역 합니다."
"이현, 자리에 앉아. 소대장이 한번 이야기 했어."
소대장이 눈을 치켜떴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소대장님. 저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꾸벅 목례를 하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대장실을 나왔다. 내 등뒤로 한두 번 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대로 가던 길을 가버렸다.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소대장도 무척 기분 나쁘겠지. 무언가 처벌을 한다고 해도 내가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아직까지는 군인이니까.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
육 개월 정도였다. 여섯 달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연이는 최대한 좋게 이야기하려 애썼지만, 그 단어와 표정, 어투 속에 담겨진 불만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나를 찔러 들어왔다.
문제의 발단은 하품이었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며 길을 걷는데, 내가 하품을 한 번 했다. 그 날따라 하연이는 그것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내가 하품을 하는 것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따분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치즈 크림 스파게티를 앞에 두고서도 시무룩한 모습에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내가 묻자, 하연이는 그런 자신의 섭섭함을 조근조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논리적이고 분명했다. 그 날은 그게 오히려 거슬렸다.
평소같으면 그랬냐고, 미안하다고 하연이의 기분을 달래 주었을 나엿지만, 그 날은 나도 피곤이 쌓인 나머지 신경이 예민했다. 그 무렵의 나는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하고 있었다. 하나는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그대로 주중에 계속했다. 하연이는 석 달 정도 일하다 호프집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돈이 필요해서 하는 아르바이트였지만, 하연이는 경험이 필요해서 했던 아르바이트였다.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약사이신 하연이는 돈의 부족함을 모르며 자라온 아이였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고 형과 단 둘이서 오랫동안 살아온 나로서는, 돈에 대한 하연이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건 하연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아르바이트로, 주말에는 청소년 사회복지법인의 '직장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돈을 받았다. 나머지 하나는 알음알음으로 의뢰받은 홈페이지를 제작해주는 일이었다. 그 전날, 마감에 쫓겨 밤 늦게까지 홈페이지와 씨름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수업은 수업대로, 일은 일대로 하면서 매일같이 하연이를 만나다보니 몸에도, 정신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속이 상했다. 그날 밤, 하연이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면서, 그녀와 손을 잡고 말없이 걸었다. 그러다 퍼뜩 그녀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냥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손을 잡고 걷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냥 내 손을 서로 맞잡은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감정의 변화도 그 손으로부터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옆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무표정에서 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예민하게 그것을 공감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우울해있는 그녀의 표정으로부터, 처음으로 내가 그녀의 우울함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존재가 아닌, 그녀의 즐거움을 우울함으로 바꾸어 버릴 수 있다는 현실을 자각했다. 그건 충격이었다. 우리는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하지만 전혀 평소같지는 않았다.
집에 들어오니 형이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형은 내가 집에 들어서자 라면을 입에 가득 문 채 손을 흔들었다. 형이 먹고 있는 라면과, 아까 하연이가 절반 이상 남긴 치즈 크림 스파게티가 눈 앞에서 겹쳐졌다. 짜증이 치밀었다. 짜증의 근원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짜증스러웠다. 나는 형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잘 놀다 왔냐?"
형이 방문을 빼꼼히 열며 물어왔다. 짧은 스포츠형으로 자른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형의 손에는 접시에 담긴 방울토마토가 담겨 들려 있었다.
"아까 시장에서 이거 좀 샀어. 먹어봐."
"됐어."
옷을 갈아입으며 내뱉듯이 대답했다. 나는 애써 기름때묻은 형의 하얀 런닝을 외면했다. 형은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자동차 정비하는 일을 시작했다. 형은 나보다 더 공부를 좋아하는 학구파였다. 생긴 것만 봐도 곱상했다. 그런데도 자동차 정비를 아주 잘해서 칭찬받았다. 지금은 이름있는 자동차 회사 A/S 센터에서 자동차 정비하는 일을 했다. 지금 형의 손에 들려 있는 저 방울토마토가, 저 사람이 내 대학 등록금과 이 집 집세를 내가며 자기는 새 런닝 한장 사 입지도 않으면서, 저녁 끼니를 라면으로 때우고 동생을 먹이기 위해 사온 방울토마토라는 생각에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그 울컥함이 목에까지 차올랐다.
"안 먹냐? 그럼 나 혼자 먹는다."
형은 접시를 들고 나가는 척 하다가, 다시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능글거리면서, 형은 방바닥에 접시를 놓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방울토마토는 알이 굵고 단단해보였다. 나도 형 앞에 앉아서 방울토마토를 먹었다. 붉은 방울토마토가 잇새에서 으깨지면서 찰진 과즙이 흘러나왔다. 맛있었다. 맛있어서 가슴이 저려왔다. 이제껏 눈에 들어오지 않던 집안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 망막 앞에 드리워졌던 무엇인가가 벗겨진 느낌이었다.
"맛있지? 냉장고에 더 있으니까 꺼내서 씻어가지고 먹어."
나는 말없이 먹었다. 형과 이야기를 한 지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저다 그렇게 되었냐고 돌아보면 이유는 하나였다. 형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형은 한번도 내가 여자친구 사귀는 것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훈이 형."
"응?"
젠장,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방울토마토를 넘길 수가 없었다.
"미안해."
8
테이블 위에는 커피 두 잔이 올려져 있었다. 검은 커피의 수면에 하얀색 프림의 소용돌이가 빙글거리면서 맴돌았다. 그 소용돌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어머님께서 조용히 권하셨다.
"마시렴."
"예."
나는 평소에 잘 마시지 않는 커피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제 갓 나온 커피는 입을 가까이 하자 마자 뜨거운 기운이 훅 하고 끼쳤다. 너무 뜨거어서 마실 수가 없었다. 한 모금을 마시는 척만 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카페에는 'Fly to the moon' 이 소근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소리 틈새로 은은히 흐르고 있었다. 어머님은 'in other words' 부분에서 입을 열기 시작하셨다.
"이현 군, 나는 항상 우리 하연이 편이야. 우리 하연이가 좋으면 나도 좋은 거고, 그래서 나도 이현 군을 참 좋아해."
"예, 감사합니다."
사실이었다. 어머님께서는 항상 나를 잘 대해 주셨다. 음식 하나도 푸짐하고 정성스레 준비해 주셨고, 하연이와 나를 함께 좋은 곳에 데리고 다니신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은 아이라고 해서 단 한번도 그것에 대해 표를 내거나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지 않으셨다. 딸의 남자 친구에게 말이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군대 다녀오지 않았지? 언제쯤 다녀올 생각이니?"
가슴이 철렁 했다.
"이제, 곧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어서 다녀 와야지. 군대 다녀와서의 계획은? 물어봐도 될까?"
오늘 어머님께서는 무언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오신 모양이었다. 이렇게 어머님과 단 둘이 대면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무언가를 많이 물어오신 것도 처음이었다.
"일단 학교를 계속 다녀서 졸업을 하고, 지금 생각으로는 바로 취업을 할 계획입니다."
"지금 이현 군이 전공하고 있는 컴퓨터 관련 분야로?"
"예.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하면서도 내 답들은 껍데기만 있지 실체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표정은 담담해 보였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어머님의 질문에 답하는 순간보다 침묵이 더 부담스러웠고 불편했다.
"이현 군이 군에 있는 동안에 하연이는 졸업을 하게 될 거야. 그리고 아직 학교에 다닐 때 직장 생활을 하게 될 거고. 나이가 같으면, 여자는 원래 그렇게 한 걸음 앞서 나가게 마련이야."
"...예."
"나는 이현 군이 우리 하연이 그냥 가볍게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나도 이현 군을 그저 하연이 친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건 아니고. 물론 세상 일은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지만, 앞으로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할 것도 생각하고 있을 테고,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도 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예."
'예' 라는 짧은 대답에 나는 머물렀다.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했다.
"하연이가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 보이는 게 달라. 주위에는 다 직장을 가지고 있으면서 안정된 사람들일 텐데, 아직도 이현 군은 학생일 테고. 군대 복무하는 시간 2년, 학교를 졸업하는 시간 2년, 그리고 바로 직장 잡아서 안정되기까지 몇 년 동안, 우리 하연이는 이현 군을 잘 기다려야 해. 지금 우리 하연이랑 만난 지 얼마나 되었지?"
"일년... 조금 넘었습니다."
"그래,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 그런데 내가 방금도 말했지만, 앞으로 두 사람이 거쳐 내야 할 시간은 그것보다 훨씬 많아. 그 이후에는 평생이라는 시간을 두고 함께 해야 하고. 그게 인생이고, 그게 사랑이라는 거야."
어머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나는 양파껍질 벗기듯 그 껍질이 한 겹 한 겹 벗겨졌다. 그리고 그 양파처럼, 다 벗기고 나면 내 안에 남는 것은 없었다. 그게 나였다. 어머님도 그것을 모르시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나를 신뢰하고 계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를 사랑하는 당신의 딸을 신뢰하고 계셨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현 군이 우리 하연이에게 평소에 정말 잘 해 주는 것. 나도 알고 있어. 하연이가 집에 와서 자랑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래서 무척 고맙고, 나도 이현 군을 우리 가족처럼 사랑하고 있어. 내가 우리 이현 군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이제 남자로서 좀 더 책임감 있게 우리 하연이를 잘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야."
책임감. 내가 이제껏 생각하던 책임감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다른 무게의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내 가슴에 얹혔다.
"하연이한테 이현 군이 뚜렷하게 서 있지 않으면, 하연이는 몹시 힘들어 할 거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잖아. 사람 마음이란 게 항상 한결같기를 자신하는 것도 교만이고. 난 하연이 엄마로서 그게 걱정돼. 그건 이해해 줄 수 있지?"
"예."
"그래. 이현 군도, 우리 하연이도 이제 성인인데 자기들의 인생은 당사자들이 결정 하겠지. 더 이상 내가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도 없는 거고, 그저 약간의 조언 정도를 해 주고 싶었어. 혹시라도 내가 말한 것들 중에서 마음 상한 말 있었으면 미안하고."
"아닙니다. 어머님, 그런거 없었습니다."
얼굴이 뜨거웠다. 나는 안절부절 못 했다. 사랑은 나와 하연이가 전부 써내려가는 줄로만 알았던 스스로가 얼마나 어리석었고 생각이 좁았는지, 민망해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그 때, 어머님께서 나를 더 난감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핸드백에서 흰색 봉투를 하나 꺼내시더니, 나에게 밀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 그리고 하연이보고 나오라고 했어. 조금 있으면 이 쪽으로 올 거야. 둘이 만나서 재미있게 놀고, 그리고 이건 오늘 하연이 만나면 맛있는 밥 한끼 먹으라고 주는 건데,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아니, 아닙니다, 어머님."
"어른이 주는 건데 받아. 이현 군이 이런 거로 자존심 상할 만큼 속 좁지 않은거 내가 아니까 오히려 주는거야. 그동안 우리 하연이 뭐 이것 저것 얼마나 많이 사줬어? 오늘은 그거로 맛있는 것도 먹고, 하연이랑 쇼핑도 다니면서 걔 옷도 좀 사 주고 이현 군도 필요한 것 사. 내가 선물로 따로 못 주고 이렇게 주는 거니까 이해하고."
"아니, 정말 괜찮습니다. 어머님."
"안 받으면 서운해할거야. 우리 딸 더 잘해주라고 주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둬. 알았지?"
나는 봉투와 어머님을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어머님은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드시더니 웃으며 나에게 말씀하셨다.
"커피 다 식었다. 마시렴, 아깝잖아."
"예."
어머님의 말씀에, 나도 잔을 천천히 들어 올려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미지근하게 식은 커피가, 그 날따라 혀 끝에서 더욱 쓰디썼다. 마실만한 음료가 못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커피를 입에 대지 않았다. 그 날 어머님께서 주신 봉투 안에는, 십 만원짜리 수표가 석 장이나 들어 있었다. 그 날 하연이를 만나, 어머님을 어떻게 보내 드리고, 하연이와 무엇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날 분명히 결정했다.
하연이와 헤어지겠다고.
9
여름은 자신의 이름을 가진 이 계절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싶은 모양이다. 7월 중순은 여름의 소유였다. 특히나, 군 부대는 어디를 가든 '여름스러움' 일색이었다. 여름스럽게 무더웠고, 습했고, 끈적거렸으며, 물과 그늘과 바람이 필요했다. 더위와의 싸움은 분주했다. 군인들은 끊임없이 찬물에 샤워하고, 찬물에 세수했으며, 땀에 절은 속옷을 세탁하고, 말렸다. 부지런히 달아오른 땅에 물을 뿌려댔고, 초병 근무자들은 냉동실에 얼린 물통과 물수건을 들고 나갔다. 밤이면 거대한 선풍기가 복도의 끝에 놓여져서 굉음을 내며 돌아갔다. 그래도 후덥지근한 생활관 안쪽까지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군인들은 팬티에 런닝 차림으로 포단 위에서 뒤척였고, 귓전에서 앵앵거리는 모기 때문에 철썩거리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
삽질은 그 여름스러움 안에서 가장 여름스러운 작업이었다. 삽이라는 도구를 빼놓고 어찌 군생활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땡볕 아래에서 구슬땀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삽 한자루를 들고 열심히 흙을 퍼내고 있는 소대장의 모습은, 말장난 같지만 '여름다웠다'. 그런 단어를 떠올리고 나서, 그게 '아름다웠다' 와 비슷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내 생각에 아연했다. 아니다, 그냥 여름다울 뿐이다. 아름답다, 여름답다.
"야, 이현! 왔으면 도와줄 생각을 해야지!"
소대장이 허리를 펴다 나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소대장 옆에서 웅크려 앉아 사낭을 붙들고 있던 후임 두 명도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났다. 벌써 녀석들의 런닝은 앞뒤가 땀으로 흥건했다. 주위에 적당한 그늘도 없어, 그저 햇살을 몸으로 받아내며 작업하는 중이었다.
"아우, 소대장님.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 됩니까?"
"지금 삼십분 째 한 번도 안 쉬었습니다."
그러자 소대장이 삽을 땅에 꽂고, 한쪽 손을 허리에 걸치며 어이없다는 듯이 후임들을 나무랐다.
"이것들이 기껏 사낭 몇 개 옮겼다고 남자녀석들이 징징대? 소대장은 계속 삽질했잖아!"
"아, 저희가 힘든 게 아니라, 소대장님 힘드시니까 잠깐 쉬자는 거 아닙니까."
"저희들이 PX 가서 음료수라도 좀 사오겠습니다. 소대장님 잠깐 쉬십시오."
후임들의 능청에 소대장도 손을 휘휘 내저었다. 둘은 해냈다는 표정으로 신나게 내리막을 뛰어내려갔다. 둘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대장이 다시 나를 부르더니 삽을 내밀었다.
"이현! 넌 방금 왔으니까 소대장 쉬는 동안 여기 삽질 좀 더 해. 이쪽은 평탄화 하면서 그 흙으로 사낭 만드는 거니까 너무 파버리지 말고."
"예."
내가 순순히 삽을 받아들려 하자, 소대장이 삽을 휙 하고 다시 뒤로 뺐다.
"나, 참. 소대장이 의리가 있지 나는 쉬고 너 혼자 삽질 시킬까? 저기 그늘 가서 좀 쉬었다 하자."
그리고 소대장은 소나무 그늘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언젠가, 내가 앉아서 쉬던 그 그늘이었다. 나도 조용히 따라가서는 그 곁에 앉았다.
"후아... 덥다."
소대장은 손에 끼고 있는 목장갑을 벗어들더니 이마에 송골 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입고 있던 전투복 가슴께를 펄럭거려서 바람을 불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더워도 소대장은 전투복을 벗고 작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군인들이야 런닝까지 훌훌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작업해도 그만이지만, 여군이 그럴 수가 있는가. 이 더위에 전투복을 입고 작업하는 것이 얼마나 덥고 힘들지, 가장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소대장이 안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때마침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소대장은 잠시 눈을 감고, 얼굴에 스쳐가는 그 바람을 감상하더니 한숨 쉬듯 한 마디 던졌다.
"힘들다."
"수고하셨습니다. 날도 더운데 작업하시느라."
그러자 소대장이 살짝 미소지으며 나를 넘겨다보았다.
"아니, 군생활이."
나는 잠시 그 답의 의미를 찾지 못해 대꾸하지 못했다. 그러자 소대장이 땅에 있던 돌을 하나 집어 올리더니, 그것을 만지작거렸다.
"여군이란 거, 어떤 것일지 생각해 본 일 있어?"
"......"
난 분명히 당황했다. 몹시도 당황해서 그저 조막돌을 만지작거리는 소대장의 손을 내려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군대는 어쩔 수 없는 남자들의 사회야. 그 안에 있는 여자 군인이라는 것. 남자다움을 흉내내야 하고 남자같은 성향을 요구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성으로서의 능력을 요구하기도 하지. 일부러라도 더 냉정하고,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야 한다면서도, 부드럽고, 온순하고, 섬세하기를 원하기도 해. 참 모순되는 곳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서, 소대장은 돌을 땅에 떨어뜨렸다.
"게다가 사람들이란. 여자가 왜 군대에 갔을까, 집안에 무슨 문제가 있나? 솔직히 현이 너도 그런 생각 하지 않니? 다들 말은 안 하지만 그렇게들 생각하잖아. 그래, 사실 나도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아. 하지만, 그게 이유는 아니야. 할 게 없어서 군대에 왔다거나, 집을 위해 내 인생을 희생했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야. 난 이곳 군대에 꿈이 있어. 목표가 있고, 비전이 있어. 모두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나에게는 나라와 민족에 대한 분명한 신념이 있어서 이 길을 선택한거야."
나는 여전히 꿀 먹은 벙어리였다. 마음속에 질문 하나가 떠올랐지만, 물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소대장이 내 마음속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어제, 내가 현이에게 잘못한 것 같아서. 나는 내 마음을 열지도 않았는데 현이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려고 했잖아. 그게 큰 실수였다고 여겨지더라. 그래서, 그 실수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가장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 준 거야."
"소대장님..."
"그렇다고 억지로 현이 너 이야기 하라는 건 아니야. 네 말대로, 이제 곧 전역이잖아. 사실 나도,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방법을 좀 배워야 해. 그래서 곧 전역하는 너에게,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 해 봤어. 부탁인데, 아직은 어디 가서 내가 이런 이야기 했다고 하지 말아줄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대장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홀가분하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다시 한 번 서늘한 바람이 스쳐왔다. 발갛게 상기되어 있던 소대장의 볼이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제는."
"죄송한 건 아네? 내가 너 확! 한따까리 하려다가 참은 거 알어? 대체 왜 그런거야?"
소대장의 질문이, 이상하게 마음을 파고들어왔다. 그냥 질문 한 마디였지만, 더 이상 무엇인가를 숨기게 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진실의 힘이었다. 누군가 마음 문을 열고 다가온다면, 나 또한 그 진솔함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나도 처음이었다. 군에 와서, 누군가에게 하연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렇게 가슴 속에 눌러 두고, 담아 두고, 숨겨 왔었는데, 막상 이야기를 하니, 어이없을 정도로 짧았다. 한 여자를 사랑했고, 아주 많이 사랑했는데, 그 사람의 미래와 내 미래를 보았을 때 내가 아무것도 확신을 줄 수 있는게 없었다고. 그래서 헤어지고 군에 왔다고. 그게 다였다. 더 이상 뭐가 있나 했지만 정말로 그게 다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소대장의 표정을 살폈다. 이 사람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고통은, 그 무거웠던 시간들이라는 것은 그냥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이별 이야기 아닌가. 그렇게 들었을 수도 있다. 아니, 아마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나니, 나 또한 그게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남 몰래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노여워하고, 눈물 흘렸었는데, 그걸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지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 한 거야?"
"손이 예뻤습니다."
"응?"
소대장이 되물었다.
"소대장님처럼, 손이 예뻤습니다. 그래서, 소대장님을 볼 때마다 그 애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그 이야기까지 했다. 그 말을 듣고, 소대장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더이상 소대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아마, 함부로 무어라 이야기할 수 없을 터였다. 소대장은 내가 가정 문제로 고민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성 문제는 가정 문제보다 좀 속되 보일 수도 있겠지. 완전히 가정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별 말 없이, 조용히 그것을 생각해보고 또 공감해주는 소대장이 고마웠다. 너무도 굳게 닫아오던 것을 풀어 내 놓으니, 속이 뻥 뚫려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가벼웠다. 이게, 이 뻥 뚫려버린 허전한 가슴이 홀가분함이라는 감정인가. 내 얼굴에도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스스로도 그 의미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했지만, 어쨌든 내 얼굴에 떠오른 것은 미소였다.
바로 그 때, 내 눈에 소대장의 뒷머리가 들어왔다.
"소대장님, 그런데 머리가..."
"아, 머리? 작업하다가 헝클어졌나?"
그물망 안에 들어있떤 소대장의 머리카락 뭉치가 그물망이 흐트러지면서 삐져나와 있었다. 소대장은 그것을 목 뒤로 만져 보더니, 그물망을 벗겨 내고 머리를 묶고 있던 고무 밴드를 풀었다. 그러자 치렁 치렁한 긴 머리가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흘러 내렸다. 저 길고 검은 머리가 작은 뭉치 안에 담겨 있었다니. 신비한 일이었다. 소대장은 긴 머리카락을 몇 번 흔들어서 정리한 다음, 두 손으로 잘 다듬어서 다시 고무 밴드로 묶었다. 그리고 나서, 머리카락을 또아리 틀더니 다시 그물망을 씌워서 고정시켰다. 손으로 몇 번 툭툭 건드린 다음, 소대장이 물었다.
"됐니?"
"예. 예쁘게 잘 됐습니다."
그 말에, 소대장이 풋 하고 웃었다.
"훗, 현이도 스물셋이지?"
"예."
미소짓는 소대장의 눈가엔, 솔잎 틈새로 들어오는 여름 햇살이 가득했다. 소대장은 그것을 올려다보며 실눈을 떴다.
"나하고 동갑이네. 우리가 만약 밖에서 만났더라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10
"정말 연락 안 할거야?"
형이 또 물었다. 벌써 세 번째다. 나는 이번엔 대답 없이 도리질을 했다. 형도 더 이상은 어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어제, 하연이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바로 논산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오로지 형과 나, 단둘이었다. 하연이가 정신없이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꽉 막혀왔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냥 오늘 하루도 잘 지내고 있을 것이다. 황당하고 어이없기는 하겠지. 며칠간은 몹시 슬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시간이 할 일이다.
처음 헤어지자고 했을 때, 하연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어젯밤, 호프집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하연이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함께 길을 걸었다. 만나자 마자, 하연이는 학교에서 꼴불견 짓을 오랫동안 해 온 같은 과 친구 이야기부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길을 걸으면서, 하연이는 그 친구가 하필이면 조별 수없에서 같은 조라고, 오늘은 교수님과의 조별 면담 자리에서도 졸린 눈으로 꾸벅거리다가 조 전체가 감점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분통을 터뜨렸다. 정말 짜증나지 않니? 그 질문에, 나는 대답했다.
- 우리, 헤어지자.
하연이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멈칫 했다.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뭐?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 우리, 이제 헤어지자.
- ......왜?
하연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빛은 더욱 떨려왔다. 그걸 듣자, 태연하고 싶었지만, 나 또한 목소리가 떨려서 길게 말할 수가 없었다.
- 네가 싫어.
그리고 뒤돌아섰다. 돌아보지 않았다.
"입영하시는 입영 장정 여러분께서는 지금 즉시 가지고 계신 귀중품, 현금, 신용카드, 핸드폰 등을 가족과 친지분들께 모두 전달하신 다음, 연병장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방송이 흘러 나왔다. 주위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짧게 깎은 청년들은, 저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작별의 시간을 가졌다. 여기 저기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식을 끌어안고 등을 두드리며 축복의 말을 하는 어머니들은 웃는 얼굴로 울었고, 그 옆에 서 있던 아버지들은 굳은 얼굴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붙잡고, 젊은 아가씨들은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일부러 큰 소리로 환호하면서 친구를 보내는 청년들도, 그 청년들에게 어리숙하지만 씩씩하게 경례를 하는 친구도 애틋하긴 마찬가지였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은 눈물로 울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들은 가슴으로 울었다. 저마다 그렇게 작별을 한 다음, 계단을 성큼 성큼 내려가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형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갔다올게, 형."
"그래."
형은 내 어깨를 두드려주더니, 자기 턱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감정이 북받칠 때 형의 버릇이었다.
"빨리 가, 임마."
턱짓으로 나를 보내는 형을 다시 한 번 돌아본 후, 손을 흔들고 나서 나는 짧은 머리들 속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아주 잠깐, 하연이가 생각났지만, 나는 한숨을 쉬었다. 깊이 숨을 들이키고, 깊이 숨을 내쉬었다. 마음이 조금 차분해졌다.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묻어두기로 했다. 너무 미안했고, 너무 안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러기에 나는 상처받은 그녀를 모른척하는 짓을 이겨내야만 했다. 뚜껑만 살짝 열어도 끓어 넘쳐버릴 그 모든 감정들을, 나는 조용히 마음 한 켠에 숨겼다. 그리고, 먼 훗날까지 덮어두기로 했다. 아주 먼 훗날까지.
11
"신고합니다! 병장 이 현은 2007년 7월 31일 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나의 우렁찬 경례소리가 중대장실을 쩌렁 쩌렁 울렸다. 중대장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병장! 이! 현!"
"그래. 이현, 정말 수고 많았다. 우리 중대에서 현이만큼 열심히 최선을 다 해서 자기 임무 하고, 또 내무생활 잘 한 병사도 없었던 것 같다. 사회 나가서도, 여기서 열심히 살았던 만큼만 한다면 꼭 성공할 거다."
"감사합니다!"
"자, 이건 가지고 나가야지?"
중대장이 전역증을 수여했다. 2년의 세월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귀중하게 감상적으로 받아들기엔 억울할 정도로 조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가라!"
중대장이 장난스레 손을 휙 내저었다. 나도 씩 미소지으며, 마지막으로 안녕히 계십시오! 라고 크게 외치며 고개를 숙였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중대장을 뒤로 하고 중대장실을 나오니, 소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고 잘 했어?"
"예! 병장! 이! 현!"
내 큰 목소리에 소대장이 눈을 흘겼다.
"오버하지 마. 귀청 떨어지겠다."
"소대장님, 전역 신고하겠습니다!"
"됐네요. 그 동안 수고했고, 집에까지 조심해서 잘 들어가. 위병소 나가는 순간까지 안심하지 마. 너 후임들 많이 괴롭힌 모양이더라."
"걱정 감사합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행정병들이 거들었다.
"걱정 마십시오, 소대장님. 위병소 아마 기어서 나가야 할 겁니다. 어딜 두 다리로 걸어서 나가려고."
"어젯밤에 아주 십자인대를 끊어놨어야 하는데."
"야, 어제 나 많이 맞았어. 아직도 등이 욱신거린다. 어제 무릎으로 찍은 거 김영민이지?"
"야? 이 아저씨가 야라고 하네? 어이, 아저씨. 정신 놨어요?"
"이거 진짜 안되겠네. 야, 가서 K2에 착검해서 가져와!"
우리는 다들 좋다고 낄낄댔다. 함께 웃던 소대장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나 한번 하자."
다시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하얀 손. 하얗고 선이 고운 그 손을, 나는 이번엔 힘있게 맞잡았다. 하연이의 손은 서늘했었지만, 소대장의 손은 따뜻했다.
"잘 가라.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보자."
"예. 소대장님도 건강히 군생활 잘 하십시오."
그렇게, 소대장과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왠지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나는 서둘러 행정반을 빠져나왔다.
*****
옛날에는 중대원들이 두 줄로 죽 서서 전역자 가는 길을 축하해주는 도열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것도 옛날 일이었다. 중대원들은 다 오전 일과로 바빴고, 가는 길에 마주친 몇몇 후임들과 작별 인사만 나누었다. 남겨진 이들에게는 남겨진 삶이 있을 터였다. 나는 조용히 위병소를 나섰다.
위병소 바깥에 나가서, 부대를 돌아보았다. 이제 끝이다. 그렇게도 나오고 싶었는데,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곳이 그곳이었다. 전역이라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나. 왜 그렇게도 전역자들이 그 감흥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는지, 나는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말로 설명되는 기쁨도 아니었고, 말로 설명되는 서운함도 아니었다.
"이 병장님, 좋으시겠습니다."
"이 병장님은 무슨. 이제 민간인이야."
오늘 백일휴가를 떠나는 신병, 광은이가 곁에서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후반기 교육을 받고 와서, 자대에 온 지 한 달만에 백일휴가를 출발하는데 그게 하필이면 내가 전역하는 오늘이었다.
"그래, 광은아! 내가 맛있는 거 사줄까?"
"아닙니다."
"왜, 빨리 가야해?"
"예. 약속이 있어서..."
그의 난감해하는 표정을 읽고, 나는 씩 웃었다.
"아아,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구나?"
"그렇습니다."
"여자친구 이쁘던데. 끝까지 잘 사귀어라. 뭐, 이제 아저씨인데 이런 말 하는건 실례이겠지만."
"아닙니다."
광은이가 머리를 긁적였다.
"광은아."
"예."
"여자친구에게, 항상 진솔하게 대해라. 그러면 잘 될거야."
내가 해 줄 충고는 그것뿐이었다. 광은이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그 때, 때마침 부대 앞으로 택시 한 대가 달려왔다. 나는 손을 흔들어 택시를 세웠다.
"광은아! 어서 이거 타고 가."
"아닙니다. 이현 병장님 타고 가십시오."
"아무리 이제 민간인이라도, 백일 휴가 나가는 이등병은 챙겨야지. 어서 이거 타고 먼저 가."
그러자 광은이는 쭈뼛거리더니, 결국 택시를 탔다. 그리고 창문을 내리더니, 나에게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현 병장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 너도 잘가라!"
부웅 소리를 내며 택시가 떠나갔고, 나는 그 뒤를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위는 조용해졌다. 이 곳은 차가 잘 다니는 곳이 아니다. 택시 아니면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차가 많이 다니는 삼거리까지 십 분 정도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날씨는 여전히 더웠지만, 오히려 기분은 상쾌했다. 발걸음을 옮기기 전, 나는 다시 한 번 부대 정문을 돌아보았다. 노란색과 검은 색 유성 페인트를 반짝거리면서 빛내는 바리케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만든 것이었다. 숱한 내 흔적들이 이 곳에 남겨져 있다.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안녕."
나는 손을 흔들고 나서, 툭.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Epilogue
"김영민 상병님?"
야전상의에 초록색 견장을 달고 있던 영민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거, 이현 병장님한테 온 건데 말입니다?"
"현이한테?"
영민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후임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다. 하얀색 규격 봉투에 씌여진 글씨는 반듯하고 깔끔했다. 보내는 사람 쪽에, 주소와 함께 '윤하연' 이라는 이름이 씌여 있었다.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김영민 상병님도 모르십니까?"
"모르겠는데."
영민은 편지 내용이 궁금해졌다. 뜯어볼까 하다가, 그의 손이 멈칫 했다. 영민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냥 그대로 편지를 후임에게 넘겼다.
"이거 그냥, 문서 수발병한테 반송시키라고 그래."
"예. 알겠습니다."
후임은 편지를 받아들고서는 생활관을 뛰어나갔다. 영민은 다시 야전상의 어깨에 초록색 견장을 달았다. 왠지 묵직해 보이는 어깨에, 기분이 좋아진 영민은 피식, 미소지었다.